가장은 만능 빌런 89화 - 리디북스
뜬금없이 영상을 퍼뜨린 사람. 즉 데빌을 만나고 싶다는 박남호 회장의 말에 이광진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 영상을 퍼뜨린 사람은 아마도 데빌... 일 겁니다.”
“데빌? 아. 최근 유명한...”
“예. 빌런이죠.”
이광진은 반복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끄며 말했다.
“데빌은 위험하다는 것을 떠나서 저는 그가 누군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죄송합니다.”
“음...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는 박남호 회장을 보던 이광진은 문뜩 그가 어째서 데빌을 찾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에 질문을 하니.
“글쎄... 의심이랄까?”
“의심... 말입니까?”
“그렇네. 자네는 정부의 이번 프로젝트가 너무 원활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
“네 뭐... 근데 원활하게 흘러가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국가적인 규모로 일반인과 초능력자 사이의 융화를 목표로 움직이는 도중임에도 잡음이 없는 건 이상하지.”
잠시 대성 그룹을 운영하며 일어난 수많은 잡음이 떠오른 박남호 회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본래 사업은 잡음이 생겨나고 그걸 지우면 다시 생기고를 반복하는 짓이거든.”
“네...”
“그런데.”
박남호 회장은 정부의 프로젝트를 조사한 정보를 떠올리며 말했다.
“슬슬 잡음이 나오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부분에 갑자기 금관 호텔에 사회 융화에 불만을 품은 빌런이 쳐들어오고, 그걸 또 프로젝트 대상자가 격퇴해서 스타가 됐지.”
“아. 그건 저도 들어봤습니다.”
한동안, 아니 지금도 신서하의 얘기는 굉장히 핫하기에 이광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만을 품은 빌런이 한둘이 아닐 텐데 지금까지 행동으로 옮긴 건 금관 호텔에 쳐들어간 놈 하나뿐이고.”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지만... 정부의 진압대에서 사전이 미리 차단하고 있는 건...”
“그랬으면 내 귀에도 들어왔겠지.”
“그렇긴 하군요.”
빌런의 행동 양식에 대해서 나름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광진이었기에 머리 한구석으로는 빌런이 조용한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이제는 본인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외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G.K의 몰락에 날뛰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조용해진 빌런들. 이상하지 않나?”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긍정하는 이광진의 모습에 박남호 회장 또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부, 혹은 그 뒤에 누군가가 지금의 한국을 조종...? 아니, 조종이라고 하기보다는 제어... 가 맞겠군. 음. 누군가가 한국을 뒤에서 제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게 데빌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정확하게는 자네의 영상을 퍼뜨린 자를 말하는 거였지만. 뭐 그게 데빌이 맞다면 그렇지. 자네의 영상도 굉장히 묘한 타이밍에 퍼지기 시작했거든.”
신서하의 화려한 활약을 의심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이 이광진의 영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초능력자는 위험한 자들이 아닌, 당신들과 똑같이 꿈이 있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는 듯이 말이다.
“우석훈, 그치의 짓은 절대 아니야. 그치는 우직하게 눈앞에 보이는 것만 하는 황소 같은 자거든.”
“...”
“남은 건 그치 아래에 있는 놈들. 그리고 정부와 손을 잡은 템페스트인데...”
이제 슬슬 자신이 박남호 회장이 하는 말을 들어도 괜찮은 건지 걱정이 되는 이광진이었다.
“템페스트 놈들은 빌런 출신답게 뭔가 일이 거칠단 말이야. 이렇게 섬세하게 계획을 조율...”
“...”
자신이 데빌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딱히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계속 이어가는 박남호 회장을 보며 이광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모시겠습니다.”
“그래.”
꽤 긴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이광진과 헤어진 박남호가 차에 올랐다.
“식사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음식은 나쁘지 않았네. 뭐 딱 그뿐이었지만.”
“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미리 차에 타 있던 비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쯧, 어떻게든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정부, 템페스트, 데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하나하나 풀어봤지만 영 손맛이 없었던 이광진을 떠올린 박남호가 혀를 찼다.
“다시 처음부터 찾아봐야겠구만.”
“요즘 전략 실장이 죽을 맛이라고 투덜거립니다.”
“에잉, 그동안 G.K 정보부에 눌려 푹 쉬었으면 더 열심히 일할 것이지.”
“뭐 그것도 한 달 정도죠. 몇 개월 동안 비상체제를 유지하면 저라도 죽을 맛일 것 같습니다.”
“딴 놈들에게 선수를 빼앗기면 안 돼. 당분간은 고생 좀 더 하라 그래. 퇴근하고 싶으면 뭔가를 알아내라고 하든가.”
박남호의 대성 그룹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대기업들도 하나같이 현 정부의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중에서 이상할 정도로 스무스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눈치를 챈 것은 딱 세 개의 기업.
박남호 회장의 대성.
한천훈 회장의 사성.
최동협 회장의 지엘.
“한국을 뒤에서 마음대로 주무르는 놈을 잡는다면 그놈들을 확실하게 제칠 수 있겠지.”
세 개의 기업은 한국 기업 순위 1위, 2위, 3위를 항상 엎치락뒤치락하는 기업이었다.
박남호 회장은 그런 경쟁자들을 확실하게 제치고 1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강력한 패를 원하는 것이고 말이다.
“데빌이라...”
이광진에게 유일하게 얻은 단서는 박남호 회장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이라 크게 의미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작은 확신을 가지게 할 수는 있었다.
“역시 그자가 주인공인가.”
자신이 원하는 강력한 패는 빌런, 데빌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말이다.
“전략실에 데빌에게 집중하라고 알려. 그자의 조직인 이클립스도.”
“알겠습니다.”
비서의 대답을 들은 박남호 회장이 고개를 돌려 창문 밖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거리를 바라봤다.
‘그자와 연결될 만한 사건이라도 있으면 일이 편해지겠다만...’
이내 너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 박남호 회장이 고개를 털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생각하기도 싫은 아버지와의 해우를 마친 유차빈이 푸석푸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G.K 본사에 출근했다.
‘오늘 당장 움직인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부하들을 불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근 10년간의 요원 선별과정 기록, 체포한 빌런 기록이랑, 각 부처의 예산 지출 내역. 그리고...”
유차빈의 지시에 비서팀의 모두가 식겁하며 창백해졌지만, 시간이 없는 유차빈에게 있어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제 술 먹고 뻗었으니... 늦게 일어난다고 하면 세 시에는 올 거야. 늦어도 두 시까지는 준비해 놔야 해.’
“--마지막으로 요원 활동 기록까지 해서 14시 30분까지 정리해 오세요.”
“14시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
“제 권한으로 비서팀 전체에 500%의 보너스를 드리겠습니다. 5시간 남았군요.”
“뭣들 해?! 할 일이 산더미다! 당장 움직여!!”
““네에엡!””
무리라고 딱 잘라 말하기에는 너무 큰 보상이 걸린 일이었다.
그렇게 비서팀이 5시간 동안 뭣 빠지게 G.K 전체를 돌아다니며 시간이 지나.
오후 3시 정각.
“이야~ 진짜 오랜만이네.”
유차빈의 예상시간에 딱 맞춰 유자혁과 부하 다섯 명이 G.K 본사의 앞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조촐하네요?”
“24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게 조촐한 거냐? 지금 한국 무시해?”
“아니, 그 우리에 비하면 그렇다고요...”
가디언, 아시아 통괄 지부는 제주도의 절반만 한 무인도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기에 그에 비하면 확실히 조촐하긴 했다.
“시끄럽고, 들어가자.”
이제 진짜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귀찮음이 몰려온 유자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넵!!””
아직도 뚱해 있던 레나를 포함한 다섯의 무력대원들이 각 잡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G.K 본사의 정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여섯을 향해 한 요원이 그들을 정지시켰다.
“정지. 이곳은 가디언 코리아 본사입니다. 관련...”
“관련자니까 비켜.”
“...실례지만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유자혁의 모습에 G.K 요원이 움찔하며 정중하게 물었지만.
“쯧.”
이미 귀찮음이 극에 달한 유자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원을 밝히지 않으신다면 들어가실 수 없...”
“여기요.”
“...?”
그에 유자혁의 성향을 잘 아는 레나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신분증과 가디언 아시아 통괄 무력대 1급 요원증을 내밀었고.
“헉!?”
그에 G.K 2급 요원이 눈이 튀어나올 듯이 크게 뜨며 경악했다.
척!
“실례했습니다!”
베일 것같이 각이 잡힌 경례와 함께 신분증과 요원증을 돌려준 G.K 요원이 순간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여기.”
“여기도.”
“나도.”
“응.”
그에 다른 유자혁을 제외한 다른 네 사람이 자신의 요원증을 꺼내 들어 내밀었고.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들어가십시오!!!”
G.K 요원은 경례조차 잊고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정문에서 비켰다.
“가자.”
““넵!””
유자혁의 신분은 확인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아시아 통괄 지부 1급 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여유롭게 걸어가는 사람을 굳이 확인할 정도로 담이 강한 요원은 아니었다.
“뒤, 뒤질 뻔했다...”
“어이, 그냥 보내도...”
“나도 몰라! 니가 막아보든지!”
“...몰라 신분 확실하면 됐지 뭐.”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 또한 그냥 외면할 뿐이었기에 유자혁의 일행은 손쉽게 G.K 본부에 발을 들였다.
“하아... 이 꿉꿉한 기분...”
어제 유차빈과 술 한잔하며 나눈 얘기는 단순히 오랜만에 보는 딸과 하는 대화가 아니었다.
“귀찮... 아니, 매우 귀찮다...”
정인태를 끌어내리고자 하는 유차빈의 계획.
그것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뭘 그리 어렵게 가려고 하는지...”
치밀하고, 확실한 계획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가디언 코리아 자체에는 큰 대미지 없이 정인태만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G.K 이사가 몇 명이었더라...”
하지만 유차빈이 몇 가지 간과한 것은.
“얘들아.”
““넵!””
그녀의 계획은 매우, 아주 귀찮은 일이었고.
“가서 이사 직함 달고 있는 애들 전부 끌고 와.”
““넵!””
그걸 순순히 성실하게 행할 유자혁이 아니었다는 것.
“하~암... 그럼 나는 오랜만에 인태를 보러 가봐야겠네.”
그리고 그냥 계획이고 뭐고. 무력으로 정인태를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하아, 엘리베이터도 귀찮아. 어디 보자... 이쯤? 아니, 이쯤인가? 흐읍!”
콰아아아앙!!!
자신의 아버지 유자혁에게는 있다는 것.
딱 그 몇 가지가 유차빈이 간과한 것들이었다.
“누, 누구냐!!”
“엇차. 오? 빙고. 역시 내 기억력이 나쁘진 않단 말이지.”
“유, 유자혁?”
갑자기 바닥을 뚫고 올라온 유자혁을 알아본 정인태가 눈을 크게 뜨며 반사적으로 사용하려던 능력을 거뒀다.
“인마, 오랜만에 봤다고 맞먹으려 하네? 씨 정도는 붙여라.”
“......”
콘크리트를 뚫고 오느라 잔뜩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유자혁을 보며 정인태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돌려댔다.
“이야... 이름은 기억하면서 인사도 안 하네?”
“...오랜만입니다. 아시아 통괄 무력대 총대장님.”
“거, 내 직함이지만 더럽게 기네.”
정인태의 인사에 피식 웃은 유자혁이 앉을 곳을 찾다가 자신 때문인지 반쯤 부서져 있는 소파를 발견하고는 곧장 앉았다.
“야.”
“...실례지만 저도 지사장이니 서로 존칭 정도는--”
“너 무슨 약 한다며.”
“!?”
크게 움찔한 정인태가 순식간에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무슨 소리신지...”
“하아... 귀찮으니까 쉽게 쉽게 좀 갔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기울여 삐딱하게 정인태를 바라본 유자혁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한 번만 더 말한다? 뭔 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넘기고, 지사장직에서 내려와. 얌전하게.”
“......”
최후의 통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