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만능 빌런 86화 - 리디북스
“아, 어서 오게. 미안하군 아직 일이 남아서.”
“아, 아닙니다!”
아직 점심시간임에도 사무실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금관 호텔의 오너, 박진권.
그를 보니 다시 긴장되기 시작한 신서하가 쭈뼛쭈뼛 사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사각, 사각.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해서 서류에 뭔가를 써내려가는 박진권의 모습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진짜 왜 부르신 거지? 진짜로 해고!? 아니, 아니야 설마... 그치만 요즘 나 때문에 클레임이 좀 많아졌다고... 헥!? 설마 높으신 분이 클레임을 걸었나!? 시끄럽다고!?’
‘해고되면 다시 템페스트로... 힝... 오빠 언니들한테 어엿한 호텔리어가 돼서 호텔에 초대한다고 장담하고 온 건데 해고되면 어떡하지...’
빌런 생활을 하며 생겨난 부정적인 사고가 계속해서 최악, 차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만들며 신서하의 몸에서 육수를 뽑아냈다.
사각, 사각, 탁.
“히끅!”
차라리 서류 작업이 안 끝나서 별말 없이 가기를 바랐던 신서하가 박진권이 펜을 내려놓는 소리에 식겁하며 딸꾹질을 했다.
“음? 안색이 왜 그렇게...”
“아무것도 히끅! 아닙니다!”
“딸꾹질이...”
“멈추겠습니다!”
우웅! 꽈아악!!
[육체 강화]를 사용하고 마력을 이용해 횡격막을 통제해 억지로 딸꾹질을 멈추게 만드는 기예를 보일 정도로 신서하는 긴장하고 있었다.
“멈췄습니다!”
“어... 뭐 멈췄다니 다행이군.”
박진권은 얘가 왜 이러나... 하며 신서하의 앞에 앉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자, 그래서. 오늘 서하 양을 부른 이유 말이네만...”
“네, 넵!!”
“자네도 알다시피 최근 호텔의 앞에...”
“죄송합니다!!”
“...?!”
털썩!
벌떡 일어나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어버린 신서하의 모습에 박진권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서하 양?!”
“제발 자르지만 말아주세요!”
“...자르? 안 잘라... 아니 그보다 일단 일어나서 말합시다!?”
“더 열심히! 뼈가 빠져라 일할 테니 제발 해고만은!!”
“이, 일어나세...”
직원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자 직원 휴게실 근처에 마련한 박진권의 사무실 특성상 뭔가 큰 소리가 들리면 직원 휴게실 쪽에도 들리는 것은 당연했고.
(어머? 오너가 서하 씨 해고하려고 하나 본데?)
(헐... 서하 씨 덕분에 투숙객분들이 이렇게 많아졌는데?)
(세상에, 오너가 그런...)
“어!?”
신서하의 처절한 목소리를 들은 직원들이 사무실 문 앞에서 모였는지 문 앞에서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저 진짜로 호텔리어가 되고 싶...”
“안 자르네! 안 자른다고!! 애초에 자른다고 한마디도 안 했네!”
“네?”
이대로 가다가는 뭔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오너로 낙인찍힐 것 같은 위기감에 박진권이 급하게 소리쳤다.
“애초에 못 자르네! 정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온 자네를 자르면 무슨 불이익을 받으려고 내 마음대로 자르겠나!?”
“아...”
뭔가 필사적으로 말하는 박진권의 모습에 신서하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다행이다...”
다만, 멋쩍거나 창피한 게 아닌 안도감이 먼저였지만 말이다.
“하아...”
한숨을 쉬며 다시 소파에 앉은 박진권을 따라 신서하 또한 그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이거 정신이 하나도 없구만.”
“죄송합니다...”
해고되는 것 때문에 부른 게 아니라는 것을 안 것 때문일까 신서하의 음성과 표정이 평상시로 돌아왔다.
“아무튼 자네를 부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인터뷰랑 광고 출연 때문에 그런 거네.”
“그렇군요...? 뭐 때문에요?”
이어지는 박진권의 말을 정리하자면.
1. 신서하 덕분에 호텔 이미지가 좋아져 손님이 많아졌다.
2. 하지만 기자들과 기업 관련자 때문에 클레임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3. 계속 피하기만 하면 기자들도 기업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 인터뷰와 광고. 각각 하나씩은 해야 할 것 같다.
4. 이는 오너인 자신의 의견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정부에서 내려온 권고다.
5. 물론 선택사항이니 거절해도 아무런 불이익은 없다.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왜 정부에서 직접 권고를 내렸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나도 했으면 하네. 이대로 계속 둘 수는 없는 일이니.”
“네에...”
신서하가 생각하기로도 지금 금관 호텔의 정문 앞은 매일 아침마다 난리통이다.
출퇴근하는 직원들이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오늘 아침처럼 자신도 외출하고 들어올 때 굉장히 불편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 꼭 해야 하는 건가요?”
“아까도 말했듯이 선택사항이네. 자네가 불편하다면 하지 않아도 무관하지.”
“으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박진권은 신서하가 인터뷰와 광고를 찍었으면 하는 눈치였기에 신서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계속 이대로 가는 것도 안 좋다고 하셨으니까... 할게요.”
“오오. 정말 잘 생각했네. 그럼 인터뷰다만, 이건 정부에서 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하니 신경 쓸 필요 없고, 광고는...”
자신이 마음을 돌릴까 빠르게 말하는 박진권의 모습에 신서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박진권의 말을 경청했다.
“어디 보자, 광고 문의가 나한테만 23건이 들어왔군. 골라보게.”
“그렇게 많... 하아...”
시작부터 괜히 하겠다 한 건지 후회가 되는 신서하였다.
* * *
“허허,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군.”
“G.K가 방해하지 않아서 이렇게 잘 풀린 거 같습니다.”
진우는 스마트폰을 들고 계속해서 누군가와 문자를 나누며 대답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누구랑 그렇게 문자를 하는 건가?”
“미국에 있는 친구입니다.”
“미국?”
“네. 이제 한국의 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다음 일을 진행해야 해서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자네가 나보다 바쁜 것 같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이은선과 지은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나름대로 유해진 진우였지만, 유해진 것과는 별개로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나머지는 맡기고...”
“아, 잠시 기다리게.”
초능력자 사회 융화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 진우를 우석훈이 불러세웠다.
“어제 러시아 대통령이 핫라인을 통해 도움을 요청했네.”
“...러시아에서 말입니까?”
뜬금없이 러시아의 얘기를 꺼내는 우석훈의 모습에 최유나가 생각난 진우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
“특급 빌런, 최유나가 청색 마탑을 장악했으니 제자리를 돌려놓기 위해 힘을 빌려달라는 얘기였지.”
“...”
“최유나 양은 데빌, 자네의 조직원이지 않나.”
탓하려는 것이 아닌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 담담히 말하는 듯한 우석훈의 모습에 진우는 가면의 아래에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건 러시아 정부의 요청이라고 하기보다는 가디언 러시아. G.R의 요청일 테니까요.”
“뭐, 그럴 거라 생각은 했네만...”
러시아 정부는 이미 옛날 옛적에 가디언 러시아에 모든 권력과 힘을 빼앗겨 껍데기만 남은 상태.
이미 G.K와 적대하고 있는 한국 정부로서 같은 가디언인 G.R의 요청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정부 쪽 라인으로 도움을 요청해온 이상 그냥 무시하기는 곤란하단 말이지.”
다만 G.R의 이름이 아닌 러시아 정부의 입장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기에 대통령인 우석훈의 입장에서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음...”
그에 진우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루비에게 염화를 걸었다.
-루비, 그쪽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주인? 어... 이쪽은...
* * *
“냥...”
-뭐랄까... 개판이야.
-개판?
루비는 마탑주의 방에 있는 책장 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리스를 처리한 다음에 최유나는 마탑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원로들 세 명의 권한을 박탈하고 남은 두 명이랑 거래를 했어.
-거래?
-응. 송조운이 그러는 게 좋다고 했나봐.
-대충 이해했다. 그다음에는?
-그리고...
루비가 그동안의 일을 진우에게 설명하는 동안 최유나는.
“보리스는 대체 일을 어떻게 해온 거야!? 왜 마탑의 기반 절반 이상이 G.R에 넘어가 있는 건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서류의 산을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덜컥!
“(마탑주님! 여기 외부 파견 마법사들의 자료...)”
“꺄아아악!! 또!? 제발 그만 가져와아아!!”
“(네,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적당히 둬...)”
“(아 넵!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임시! 임시 마탑주야!)”
“(넵! 알겠습니다 마탑주님!)”
후다닥 문을 닫고 나가는 마법사를 보며 최유나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아인 삼총사는 도움도 안 되고... 송조운이랑 사샤는 진작에 도망쳤고...”
송조운과 사샤노프는 대충 마탑의 상황을 살피고는 이렇게 되리라 짐작했는지 옛날 옛적에 튀었다.
“그렇다고 루비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는 최유나였지만, 그렇다고 진짜 고양이 손을 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루비... 보스? 그래! 보스한테 도와달라고 하자!”
잠시 우울한 얼굴로 서류를 끄적거리던 최유나가 고개를 번쩍 들어 구석 책장 위에 웅크려 식빵을 굽고 있을 루비를 찾았지만.
“루비야!! 보스한테 연결해... 줘? 루비야?”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루비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뭐야 어디 갔어!?”
고개를 휙휙 돌리며 루비를 찾아보는 최유나였지만, 이미 루비는 마탑주실을 나와 송조운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전하면 돼?
-그래. 송조운한테 그렇게 전해.
-알았어~
루비는 진우와의 [염화]를 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며 송조운에게 [염화]를 걸었다.
“루비야아아아!!!”
그런 루비의 뒤로는 최유나의 처절한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 *
“열흘 내로 러시아 정부에서 다시 도움 요청이 올 겁니다.”
“으음...?”
의자에 앉아 조용히 침묵하다 뜬금없이 말하는 진우의 모습에 우석훈이 잠시 의문을 표했지만, 이내 뭔가 초능력으로 연락을 했을 거라 짐작하고는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때 그냥 적당히 인원을 선별해서 보내시면 됩니다.”
“음? 보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네. 그냥 체면치레만 하신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도석환 씨와 상의해서 그쪽 인원을 섞어도 될 것 같군요.”
“흠... 체면치레라... 전투를 상정하는 게 좋겠나?”
“아마 없을 겁니다. 있어도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라고 일러두십시오.”
앉은 자리에서 뭘 어떤 준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봐온 진우의 능력이 있기에 우석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그게 끝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그리고 한 달 정도 있으면 미국에서 한 가지 중요한 발표가 있을 겁니다.”
“또 미국인가... 아까 연락하던 그 친구라는 자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음...”
우석훈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는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 말을 이었다.
“그게 우리에게. 아니,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발표인가?”
우석훈의 말에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나름일 겁니다.”
“사람들? 일반인을 말하는 건가?”
“일반인과 초능력자, 전부입니다.”
“으음...”
무슨 일일지 걱정하는 우석훈을 향해 진우가 말했다.
“지금 상황이라면 한국은 아마 괜찮을 겁니다.”
“한국... 은? 다른 나라는 괜찮지 않을 거라는 말로 들리네만?”
우석훈의 말에 진우는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정확합니다.”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