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만능 빌런 82화 - 리디북스
촌극이다.
보리스의 증명식을 보고 있는 송조운은 그 이외에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만, 극빙은 사용자의 경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꾼다. 부끄럽게도 나는 전대 마탑주이신 이바노프 님과 비교하면 아직 부족함이 많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 촌극이 청색의 마법사들을 설득할 수 없느냐는 또 아니었다.
(그렇군, 극빙의 마력이 어쩐지 예전만 못하더니...)
(색은 또 어떤가. 그 찬란하고 오묘하던 푸른색이 약간 빛이 바랜 것 같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자만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법이지.)
극빙과 비슷한 것으로는 적색 마탑의 염옥(炎玉), 백색의 링 오브 라이트(Ring of light), 흑색의 쉐도우 케이프(Shadow cape)가 있긴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극빙은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물건.
거기에 대마법사 이바노프의 물건이었기에 알려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하지만 이 청정한 빙결의 마력은 확실히 극빙답군.)
(음. 수준은 떨어지는 것 같지만, 확실히...)
(이바노프 님께서 보리스 님께 물려주지 않으셨던 것이 아니었구만.)
그렇기에 사샤노프가 만든 가짜, 극빙이 아닌 빙정임에도 청색의 마법사들은 이리도 쉽게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슬슬 전부 온 건가? 신호해야겠군.’
송조운은 잠시 보리스의 손에 들린 빙정을 바라보다 슬쩍 대강연실의 구석으로 물러났다.
-루비, 마법사들이 전부 모였다.
-오케이. 천천히 들어갈게.
그리고 루비에게 청색 마탑으로 잠입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어느새 자신 쪽을 바라보고 있는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 최유나를 바라봤다.
‘얼굴 뚫어지겠네. 더는 듣고 있기 힘든가 보네.’
송조운은 슬쩍 시선을 돌려 보리스의 뒤쪽,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샤노프를 확인하고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또각, 또각.
“(—또한 극빙은 이렇게...음?)”
최유나가 걸음을 옮겨 대강연실의 구석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또각, 또각.
일부러 걸음 소리를 크게 내어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직 증명식이 끝난 게 아닌...)”
진행을 맡은 마법사가 당연히 자신을 막아서겠지만, 상관없다.
“(한 가지 의문점이 있어서요.)”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흠... 상관없다. 의문을 가져야 마법사. 그것이 당연한 것이니.)”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보리스는 그냥 넘길 수 없으니까.
최유나는 로브의 속에서 몰래 시선을 돌려 단상 위 보리스의 뒤에 있는 사샤노프를 바라봤다.
“...”
끄덕.
이제 물러날 곳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최유나가 작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보리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극빙은 소유자의 빙결계 마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립니다. 이것은 이바노프 님이 청색의 설립 당시 강연에서 극빙에 대해 설명해주신 내용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보리스 님이 들고 계신 극빙은 빙결계 마력을 증폭시켜주기는 하나 그것이 극한까지라고 할만한지는 의문이군요.)”
“(...)”
보리스는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 있는 듯한, 아름답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여성의 목소리에 살짝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가 정당한 계승자라는 것을 알리는 증명의 자리.
거슬린다고 하여 저 의문을 그냥 넘기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극빙은 소유자의 경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고, 성능조차 변화한다. 내 경지가 아직 이바노프 님을 따라잡지 못해...)”
“(만약 그렇다면 예전 이바노프 님이 극빙의 효과에 대해 설명해 주실 때 그렇다 말해주시지 않았을까요?)”
“(...내가 알기로 이바노프 님 이외에 극빙을 사용했던 자는 없다. 이바노프 님조차 수준에 따라 극빙의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은 알지 못하셨겠지.)”
“(그건 이상하네요.)”
“(...뭐?)”
최유나는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그렇다고 무감정하지도 않게, 그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바노프 님이 극빙을 만드실 당시, 그분은 대마법사가 아니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만약 극빙에 사용자의 수준에 따라 능력이 제한되고 모습이 변화하는 기믹이 있었다면 이바노프 님이 그것을 모르시고 있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건...!)”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힌 보리스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대강연실을 채우고 있는 청색의 마법사들을 살폈다.
(이바노프 님이 대마법사가 되시기 전에 극빙을 만들었다고?)
(그러고 보니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군. 거의 본능에 따라 마력을 움직이셔서 극빙을 만드셨다고.)
(그렇다면 이바노프 님이 보리스 님이 말한 것처럼 극빙의 수준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 모르고 있으셨을 리는 없겠군.)
(그냥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지 않나?)
(청색의 보물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것도 언젠가 다른 이에게 물려줄 물건의 설명을 그 이바노프 님이 대충 하셨을 것 같진 않다만.)
(그렇다면...)
좋지 않았다. 로브를 입은 여성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의문을 품고 의심의 직전까지 와 있었다.
“(이익...!)”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이대로 가면 극빙, 빙정이 가짜라는 것이 들킬지도 몰랐다.
보리스는 이를 악물며 빠르게 자신의 추종자들을 향해 시선을 던지자 대강연실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자신을 지지하는 마법사들이 보리스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음... 한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은 옳지 못하겠지. 말하게.)”
마침 증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의문을 던진 여성이 있었기에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극빙은 알려진 정보보다는 저희가 모르고 있는 정보가 훨씬 많습니다. 애초에 저는 그... 저 여성분이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이바노프 님이 청색의 설립 때 극빙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젊은 마법사의 말에 나이가 좀 있거나 청색에 들어온 지 오래된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주변을 살핀 젊은 마법사가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이바노프 님도 극빙을 만드신 지 그리 오래되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 설명회 이후에 극빙에 대해 알게 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젊은 마법사의 질문은 엄밀히 말해 보리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를 마법사들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보리스가 아닌 로브의 여성, 최유나를 향했다.
“(그 가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최유나는 그런 마법사들의 시선에도 그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청색의 설립 당시가 이바노프 님이 극빙을 만드신 지 얼마 안 되신 것은 맞아요.)”
“(그렇다면 역시 그 이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바노프 님이 극빙에 대해 모르고 있으셨을 리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다는 증거를...!)”
조금 언성을 높이는 젊은 마법사를 똑바로 바라본 최유나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바노프 님이 자신이 살던 고향의 작은 마을에서 극빙을 만드셨다는 것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실 거예요.)”
(그야 유명한 얘기니...)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색의 마법사들도 다 알고 있을걸...?)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최유나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바노프 님께서 왜 극빙을 만드셨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왜?)
(그야 마법적인 성취를 위해...)
(그러고 보니 직접 이유를 얘기하신 적은...)
까득!
슬슬 자신이 누군지 감을 잡은 듯한 보리스가 이를 가는 소리가 최유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 이유는 청색 마탑이 있는 이 추운 지방에서도 그분의 고향 마을은 밖을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네년...!)”
“(오랜만에 고향에 찾아간 이바노프 님이 어린아이가 밖에서 뛰어놀지도 못할 정도의 추위에 마음 아파하시며 그 추위를! 냉기를 압축시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극빙이란 말입니다!)”
어느새 흉악하게 얼굴을 찌푸린 보리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몸을 떨었지만, 이 많은 마법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움직여도 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향 마을의 어린아이는 이바노프 님의 모습에 동경하여 마법사가 되었고 청색 마탑에 들어오게 되었죠.)”
하지만 그는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재능이 있었고, 이바노프 님의 눈에 들어 직계 제자가 된 어린아이는 시간이 흘러 이바노프 님의 다른 제자와 함께 극빙에 대한 설명을 들어왔습니다! 우연히 만들어진 극빙이지만 제자에게 물려줘야 하기에 이미 옛날 옛적에 연구가 끝났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이제는 마법사들도 이것이 단순한 추측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증거? 증거는 저기 있는 보리스! 그 자신입니다! 이바노프 님이 만드신 극빙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아티팩트! 사용자의 수준에 따라 변화하는 기능 따위는 없다는 것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마법사들의 시선이 잔뜩 구겨진 표정을 하고 있는 보리스에게 향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리스 아저씨.)”
펄럭!
최유나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역시!)
(유나 님!)
(청색의 미래!)
(오오오!!)
20살의 시절과 거의 변한 것이 없는 그녀였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마법사들이 감격하며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유나...)”
보리스는 까드득 하며 이를 갈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던 사샤노프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빌어먹을 년들이... 감히...!)”
자신이 속았다는 것에 분노하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최유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보리스였지만.
“(유나 님! 탈옥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잘 지내... 아, 아니!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정말로 잘 오셨습니다!)”
지금 당장 그녀를 공격하는 것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기에 일단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죄인이 왜 찾아온 것이냐.)”
겨우 분노를 가라앉히고 입을 연 보리스의 말에 최유나는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가요?)”
“(뭐?)”
“(죄인?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나를 가디언 코리아를 통해 가짜 죄인으로 만들어 치워버린 사람이?)”
“(하! 한국에서 난동을 부린 주제에 죄인이 아니라고? 네년은 빌런이다! 청색의 수치란 말이다!)”
스스로의 경지 상승에 매달리는 마법사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보리스가 최유나의 재능을 질투하여 모종의 수단으로 한국으로 보내고 G.K를 통해 빌런으로 낙인찍어 버린 것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특히 최유나를 아는 자들은 더더욱 말이다.
“(감히 빌런이 청색에 그 더러운 발을 들여!?)”
그렇기에 보리스의 저 말들이 전부 가짜라는 것 또한 알고 있지만.
“(뭣들 하느냐!! 마침 이 정도의 전력이 모였다! 빌런을 잡아라!!)”
그렇다고 저 말을 쉽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보리스는 청색 마탑 원로원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청색의 탑주로서 명한다!! 저년을 죽여!!)”
무엇보다 현 마탑주였으니까 말이다.
“(쳐라!)”
망설이는 대부분의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최유나를 알지 못하고, 그녀가 감옥섬에 갇힌 이후 마탑에 들어온 젊은 마법사들.
“(아이스 스피어!)”
“(프로스트 노바!)”
“(아이시클 랜스!)”
수많은 빙결계 마법들이 최유나를 향하고.
“(그러고 보니까 보리스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극빙이 왜 가짜인지 증명하질 않았네요.)”
스으으으으...!
최유나의 손 위에 생겨난 찬란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구체로 빨려 들어갔다.
“(그, 그건!!!)”
“(이유는 간단해.)”
쩌저저저적!!!
그리고 최유나를 공격했던 젊은 마법사들의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할배의 극빙은 내가 물려받았으니까.)”
대강연실 전체가 소리조차 얼어붙을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