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만능 빌런 75화 - 리디북스
“나는 빅토르 박... 나는 빅토르 박...”
송조운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부여잡고 빅토르 박이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씨... 내가 어쩌다가...”
사샤노프와 만난 지 고작 이틀. 그렇다. 고작 이틀 만에 송조운은 청색 마탑에 들어오게 된 상황에 멘탈이 흔들리고 있었다.
“심지어 테러라잖아... 이거 어쩔 거야...”
가디언, 그리고 각국의 정부를 제외하면 단일 세력으로서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10개의 세력.
적, 청, 백, 흑의 4대 마탑과 회색 마탑, 그리고 5대 무가.
회색 마탑의 경우 낙오자의 조직이라 하여 공식적으로는 제외한다 치고. 5대 무가는 강해지는 것 외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기에 제외한다 치면, 결국 남는 것은 4대 마탑이다.
“아... 탈옥한 다음부터는 욕 안 하려고 했는데... 욕이 나오려고 한다... 아...”
“욕하셔도 되는데요?”
“허억!? 어, 언제 오셨습니까!?”
청색 마탑에 도착하자마자 송조운을 버려두고 어디론가 향했던 사샤노프가 송조운의 바로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나는 빅토르 박이다...라고 할 때요.”
“한참 전부터지 않습니까...”
사샤노프가 왔는데도 그냥 앉아있을 수는 없었기에 송조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무는 다 보셨습니까?”
“네. 이제 들어가죠.”
“...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럴까.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라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송조운의 표정을 읽은 사샤노프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테러라고 해서 그렇게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에요?”
“그럼 아니겠습니까? 무려 청색 마탑에서 테러를 일으킨다는데...”
“아하하.”
“웃을 일이...”
“테러는 테러지만 물리적인 테러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네?”
사샤노프는 송조운이 지키고 있던 커다란 캐리어를 가리켰다.
“이 안에 폭탄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뭐 그 비슷합니다.”
“후후후. 이 안에는 제가 그동안 연구한 마법 술식이 담겨있어요. 그걸 응용해 만든 물건이랑 같이요.”
“...?”
뜬금없이 마법 술식이 들어있다 말하는 사샤노프를 바라보던 송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송조운도 스타챠 사샤노프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술식 연구자인 루이샤 발라루스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테러 운운하던 사람이 갑자기 술식의 얘기를 하면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설마 술식을 이용한 테러라는 겁니까?”
“정확해요.”
“...”
설마 마법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마탑에서 술식을 이용한 테러를 계획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송조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응?”
“그... 저는 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직 죽고 싶지 않은데요...”
“네?”
“그게...”
그때, 청색 마탑의 안쪽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기초 마법사가 다가왔다.
“여긴 아직도 저 퀘퀘한 로브를 입고 다니네.”
“뭐... 마법사의 상징이라고 하는... 아니, 이게 아니라!”
송조운은 어딘가 도망갈 길은 없는지 주변을 살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보다 기초 마법사가 말을 거는 것이 먼저였다.
“(사샤노프 님. 빅토르 님. 증명의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증명의 자리?”
“(자자, 빅토르 조수, 뭐 하고 있어요? 캐리어 가지고 따라오세요.)”
“...조수?”
송조운은 기초 마법사를 따라가는 사샤노프를 멍하니 바라보다 허둥지둥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그녀를 따라갔다.
* * *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 울려퍼지는 강연장.
“(아 그건 이쪽으로 놔주세요. 그리고 그 USB는 저기 2번 노트북에.)”
“(어... 네...)”
청색 마탑의 마법사란 마법사는 전부 모인 듯한 수많은 인원들 앞에서 송조운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사샤노프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며 강연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샤 님이 증명의 자리를 신청한 게 얼마 만이지?)
(거의 10년 가까이 되지 않았나?)
(9년일세. 최유... 그녀가 한국으로 넘어간 이후로는 없었지.)
(아... 생각해보니 그렇구만.)
(드디어 사샤노프 님이 돌아오시는 건가...)
(하지만 마탑주님이...)
(어허! 전 마탑주님이지.)
(이, 이런 미안하군.)
약간씩 들려오는 대화를 종합해 보자면 사샤노프는 애초부터 청색 마탑에서도 꽤나 인정받는 술식 연구자였던 모양이다.
루이샤 발라루스의 이름이랑은 다른 또 하나의 연구자로 활동하는 거랄까.
“(다 끝났어요?)”
“(아, 네.)”
“(좋아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미소를 지으며 말한 사샤노프가 마이크를 툭툭 치며 능숙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술식 연구 전문 1급 마법사, 스타챠 사샤노프입니다.)”
짝짝짝짝짝.
사샤노프의 자기소개와 함께 우렁찬 박수 소리가 강연장에 가득 울려퍼졌다.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첫 번째 술식의 설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샤노프가 자신에게 손짓하는 것을 발견한 송조운이 노트북을 만져 1번이라 적혀 있는 파일을 열었다.
“(첫 번째 술식은 2년 전 루이샤 발라루스가 발표한 자연 속의 마력 정제, 응집 술식을 보완한 술식으로...)”
사샤노프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강연장에 모인 마법사들의 표정이 활짝 펴진다.
(역시 사샤노프 님이군.)
(이분이 계속해서 활동하셨다면 루이샤 발라루스라는 이름은 지금만 못했겠지.)
(오오. 효율이 1.3배까지 더 나온다고?)
아무래도 청색 마탑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술식은 이상입니다. 아. 질문은 나중에 받도록 하죠.)”
사샤노프의 말에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든 수많은 마법사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두 번째 술식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루이샤 발라루스가 3년 전 발표한 술식. 금속의 마력 전도율 향상을 위한 저항 술식을 보완한 술식으로...)”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넷, 다섯, 그리고 마지막 여섯까지 전부 설명하고 나니 무려 7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상으로 오늘 제가 준비한 술식 여섯 가지의 발표는 끝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번 증명의 자리에서 발표한 술식은 전부 루이샤 발라루스라는 이름으로 본인이 연구 개발한 술식을 보완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짝짝짝짝-!!! 휘이이익-! 휘이익-!
(대단합니다!)
(역시 청색의 자랑 사샤노프 님!!)
(우리의 천재가 돌아왔다!!)
(러시아의 자랑!! 청색의 자랑!!)
(정체도 모를 루이샤 어쩌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발라버려!!)
청색의 마법사들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하긴, 이들의 입장에서는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루이샤 발라루스를 저격한 것처럼 보일 테니... 흥분할 만하겠지.’
실제로는 본인이 만든 술식을 보완한 것뿐이지만 말이다.
강연장 한가득 느껴지는 흥분과 열기에 송조운이 몰래 고개를 저었다.
‘근데 이게 왜 테러라는...’
“(그리고 한 가지 가장 중요한 발표가 남았습니다.)”
“응?”
사샤노프가 당당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강연장이 떠나가라 소리치고 떠들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시끄럽던 강연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지자 사샤노프는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말을 이었다.
“(산속에서 연구만 하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게 되더군요.)”
“...?”
송조운이 의문을 표하는 것처럼 뜬금없는 사샤노프의 말에 청색 마법사들의 얼굴에도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최근 제 조수 빅토르가 가져온 소식에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
(사샤노프 님이 조수를 들였던가...?)
(저 동양인이 누군가 했더니 조수였나.)
(그런데 최근 소식이라고 하면...)
“(우리 자랑스러운 청색 마탑의 탑주가 바뀌었다는 소식이었죠.)”
(역시 그건가.)
(사샤노프 님은 이바노프 님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었으니...)
(이바노프 님이 은거하시고 난 뒤에 사샤노프 님께 향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군.)
점점 술렁이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사샤노프는 한순간에 미소를 지우고 냉기가 철철 흐르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바노프 님을 강제로 내려오게 만들고, 보리스 님, 아니 보리스가 탑주의 자리에 올랐다죠.)”
“(저희 청색의 미래를 길바닥에 버린 그 보리스가 말입니다.)”
“?!?!?”
(무슨!?)
(으음...)
(미래... 그녀를 말하는 건가...)
(사샤노프 님과 보리스 님은 애초부터 사이가...)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겨우 혼란이 진정되었건만...)
사샤노프의 말에 송조운이 기겁을 하며 손을 떨었다.
‘보리스를 끌어내릴 생각인가!?’
그것을 위해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루이샤 발라루스의 업적을 저격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드높인 것이라 판단한 송조운이 이제야 테러라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송조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보리스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하는 발언도 나름대로 효과가 있겠지만, 끌어내리기에는 명분이 부족할 텐데?’
“(뭐 이건 개인적인 원한이긴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원한을 치워놓고 생각하더라도,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음...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는데...)
(아직 보리스 님이 대마법사가 아닌 것?)
(에이, 그건 시간문제잖나.)
웅성웅성거리는 청색 마법사들을 지켜보던 사샤노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정말로 정당한 계승을 이루었다면, 그에게는 저희 청색의 상징. 극빙 또한 계승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중에 그가 극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분이 계신가요?)”
(음...?)
(그러고 보니 보리스 님이 극빙을 가지고 있는 걸 본 적이 없군.)
(당연히 보리스 님이 가지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지팡이도 항상 가지고 다니시던 지팡이고...)
(품속에...?)
(극빙을 품속에 넣고 다니면 죽을텐데?)
(그도 그렇군.)
‘그렇구나! 극빙! 명분이 있었어!’
대외적으로 보리스는 이바노프 본인에게 마탑주 자리를 계승받았다 알려져 있다.
그것이 그가 대마법사가 아님에도 마탑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분이다.
하지만 정당한 계승이라면서 청색 마탑주의 상징인 ‘극빙’은 물려받지 못했다?
당연히 그의 명분인 ‘정당한 계승’이 흔들릴 만한 일이었다.
정말로 정당한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극빙을 물려받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극빙을 계승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바노프 님께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
“(또한 극빙은 저희 청색의 자존심이자 상징입니다. 그가 극빙을 계승하지 못했다면 저는 그를 마탑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기세를 탄 사샤노프가 목소리를 높이며 마무리를 지으려던 찰나.
콰앙!!
강연장의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하하하. 다들 이곳에 모여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마력을 풀풀 풍기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중년의 남자.
“(...마침. 장본인이 도착했군요.)”
“(하하. 사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입니다. 보리스.)”
블라디미르 드미트리 보리스.
현 청색 마탑의 마탑주였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보리스. 지금...)”
“(사샤. 역시 그 머리는 변한 게 없구나. 영상으로 본 것이지만, 역시 대단했다.)”
짝짝짝.
천천히 박수를 치는 보리스.
말투와 몸짓을 보면 온화하기 그지없었지만.
스아아아...
그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극한(劇寒)의 마력에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샤. 오랜만에 돌아와 한다는 말이 이 삼촌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말이라니. 삼촌은 참 슬프구나.)”
“(누가 삼촌입니까! 당신은...!)”
“(하하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삼촌삼촌 하며 따라다닌 녀석이 이거야 원.)”
오싹!
거리가 좀 있음에도 오싹할 정도로 잘 느껴지는 극한의 마력에 강연장 내부의 모든 마법사들이 몸을 떨었다.
짝!
“(자자. 오랜만에 가족 같은 녀석이 돌아와 할 말이 좀 많은데... 동지들이여.)”
보리스는 그런 마법사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리를 좀 비워주지 않겠소?)”
수많은 마법사들이 강연장을 빠져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