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만능 빌런 69화 - 리디북스
(할아부지!)
짧은 단발의 어린아이가 노인의 품에 안기며 얼굴을 부비적거린다.
‘꿈...?’
자신의 어릴 적, 그리고 이바노프의 70대 시절.
돌아오지 않는 과거임을 깨달은 최유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웬일로 어리광을 피우느냐.)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애정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아아... 어렸을 때는 이런 느낌이었구나...’
철이 들 적부터는 항상 무감정한 이바노프였기에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보리스 아저씨가 이거 알려줬어! 봐바!)
(으음?)
어린시절의 최유나가 끙끙거리며 작은 손 위에 얼음 꽃을 피워냈다.
(대따! 히히! 예쁘지?)
(이건...)
‘빙결의 하급 마법...’
관상용이기는 하지만, 꽃잎 하나하나를 만들어야 하기에 마력 컨트롤을 익히기에는 좋은 마법.
(고작 7살에... 허허허.)
그리고, 기초마법을 배우기도 벅찬 나이대의 아이가 할 수 있을 만한 마법은 아니었다.
‘생각났다. 이때 이후부터 보리스 아저씨가 나를 견제하기 시작했지...’
서른 살에 상급 마법을 마스터하여 원로원과 소속 마법사들에게 천재로 불리던 보리스가 자신을 견제하기 시작한 날이 딱 이때부터였을 거다.
(허허... 이걸 어째야 하나...)
(할아부지...?)
작게 미소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걱정스런 감정이 이바노프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렇게 꿈속 시간은 가속하고.
(조, 조금만 쉬어요 할아버지...)
(스승이라 부르거라! 더 집중해! 너는 차기 마탑주가 되어야 해! 다음! 상급 마법 아이스 레인!)
(...네.)
15살. 중급 마법을 마스터하고 칭찬과 격려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심하게 마법을 가르치던 이바노프에게 서운함을 가졌던 날.
(유나! 이렇게 해서는 보리스를 뛰어넘을 수 없다! 더! 더 강해져야 한다!)
(할배... 나 오늘 생일...)
(자연 속 마력의 차가움을 느껴라! 그 모든 것이 너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응...)
18살. 상급 마법을 마스터하고 어느새 보리스보다 뛰어난 진정한 천재, 차기 마탑주로 불리고 있던. 자신의 생일날.
(너도 상급 마법사이니, 네 고향인 한국으로 가서 우리 청색 마탑의 지부를 세우거라.)
(갑자기...?)
(네가 이곳에 있어서 뭘 할 것이냐. 가서 성과를 세우고 돌아오거라! 그러면... 아니, 아무튼 내일 당장 출발하거라!)
(할... 네. 스승님.)
19살, 보리스가 최상급 마법을 마스터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 자신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한국으로 쫓겨나듯 파견됐던 날.
‘이... 이후는...’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었지만, 꿈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오호, 당신이 청색 마탑의 차기 마탑주라고 불리는 최유나 양이군요. 하하하 이렇게 아름다운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지부를 세우러 오셨다고요? 하하! 저도 차기 지사장인 만큼 도움을 드릴 수 있겠군요!)
보리스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정인태를 만나고, 자신의 애인이 되면 아주 쉽게 마탑의 지부를 세울 수 있을 거라는 개소리를 거절하고 지부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쯤.
콰앙!
(뭐, 뭐야!?)
(당신을 국가 주요시설 테러 용의로 체포합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 정인태?)
(하하하! 그러게 말했지 않습니까. 제 여자가 되는 게 일이 쉬워졌을 텐데 말이죠.)
(하! 청색 마탑에서 이 일을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오. 이런. 그쪽과는 이미 얘기가 끝난 일이거든. 청색 마탑주께서 협조해주셔서 일이 쉽게 풀렸어! 하하하!)
(하, 할배가...?)
청색마탑에서 자신을 버렸다는 소리, 그리고 스승. 할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말.
(대신 뭐 목 좋은 땅을 내줘야 하긴 했지만. 우리도 이득이니 상관없지.)
(땅...? 고작... 그런 거 때문에...?)
(크크큭 네년을 보호하는 것보다 우리와 손을 잡는 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나 보더군, 뭐 그쪽도 나름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잖아?)
(그럴... 그럴 리가...)
(자자, 얌전히 가자고. 예쁜 얼굴이 망가지면 곤란하니까.)
(...닥쳐.)
(뭐?)
(다 꺼져어어어어!!!!)
그리고 20살. 러시아, 청색 마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가 이유를 묻기 위해 전력을 다해 G.K와 싸우고. 제압당해 감옥섬에 갇힌 날.
‘싫다...’
그리고.
‘응?’
지지지직...
자신이 감옥섬에 투옥되는 것을 끝으로 심한 노이즈가 생겨나며 장면이 전환되었다.
(보리스!!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것이냐!!)
(스승님께서 잘못하신 겁니다! 저희 청색마탑은 자랑스러운 러시아의 마탑! 고작 그런 고아 년에게! 그것도 외국인에게 마탑주 자리를 내주려고 하시다니요!)
(오해다 이놈아! 그 아이는 재능 때문에 거둔 것일 뿐이야!)
‘할... 배? 아니야, 이건... 누구의 기억...?’
보리스와 이바노프가 말싸움을 벌이는 모습. 그리고 그것을 마치 티비를 보듯 제 3자의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꿈.
(하하하! 그렇게 무감정하게 고아 년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스스로를 속인다고 저 또한 속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뭐라?)
(무려 14년입니다! 그동안 제가 스승님과 그년을 보며 정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당신은 그년을 진짜 가족으로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건...)
(무려 40년이 넘도록 당신에게 봉사하고 배운 나는! 나는 대체 뭐란 말입니까.)
(보리스...)
(원로원도 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선택해야 할 겁니다! 마탑입니까 아니면 그 고아 년입니까!)
(...)
(...하! 이걸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됐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죠!)
(보리스! 이놈아!)
(옛정을 생각해 죽이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끼이익! 쾅!
보리스가 탑주실의 문을 거칠게 닫으며 방을 나서고.
털썩.
이바노프가 힘없이 자신의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내 과오... 구나...)
그리고 꿈속의 시간은 다시 가속하고.
(하다못해... 이것만은... 극빙만은 그 아이에게...)
이쪽을 손으로 붙잡고 중얼거리는 이바노프가 보였다.
(세리나... 아니. 회색 탑주라면 유나의 행방을 알고 있겠지... 쿨럭쿨럭! 시간이 없구나...)
팍!
모든 것이 어두워지며 꿈의 끝이 다가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건... 극빙의 기억이었구나...’
“ㅇ...! ㅊ유ㄴ...!”
‘목소리...?’
“최유나!”
* * *
“일어나라고 이년아!!”
“악!!”
뭔가가 이마를 강타하는 둔탁한 고통에 최유나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여긴...?”
“한번 기절하더니 맛이 갔어?”
소파에 누워 상체만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니 최유나는 그제야 이바노프를 만나기 위해 빌렸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할배! 할배는!?”
“...”
순간적으로 세리나는 표정이 굳어졌지만, 순식간에 표정을 풀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할배는 여전하더라?”
“응?”
“너 기절시키고 그냥 돌아갔어.”
“으응?”
“그렇게 무력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참 말을 안 들어. 하마터면 한판 할 뻔했다니까?”
“...”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는 세리나를 바라보던 최유나가 자세를 바꿔 소파에 앉았다.
“그래... 돌아갔다는 거지?”
“응.”
“어디로?”
“응?”
“어디로 간 거냐고.”
“어어?”
최유나의 물음이 예상외였던 것일까. 잠시 당황하던 세리나가 다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 할배가 어디를 간다고 말하고 가는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최유나의 모습에 세리나가 안심하려던 찰나.
“할배 어디 있어?”
“그렇다니... 뭐!?”
담담하게 말하는 최유나의 말에 다시 당황했다.
“아, 아니 너 기절시키고 그냥 돌아갔다니까?”
“...”
허둥지둥하며 말하는 세리나의 모습에 최유나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할배의 마력이 느껴져.”
“그...”
“내 코어에서 할배의 마력이 느껴진다고.”
“...마력 압박 때문일 거야. 너도 알잖아. 극한의 마력에 노출되면 그 잔재가 남는 거. 속성도 같은 빙결이겠다. 잔재가 좀 오래 남는 거겠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자신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하는 세리나의 모습에 최유나가 마력을 운용하며 방출했다.
우우웅!! 쩌저저적...!
“...뭐 하는 짓이야.”
최유나가 앉아있는 소파가 그대로 얼어붙기 시작하자 세리나가 얼굴을 굳히며 덩달아 마력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좋은 말로 할 때 마력 가라앉...”
최유나를 제압하려던 세리나가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너...”
최유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할배... 우리 할아버지 어딨어...?”
“......”
“제발... 말해줘.”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최유나가 방출하고 있는 마력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주변을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너... 이미...”
그것을 본 세리나는 마력을 갈무리하고 자신의 팔찌를 매만지며 뭔가를 고민했다.
“아... 으! 진짜!”
결국 세리나는 크게 발을 구르고는 뒤를 돌아 다른 소파에 손을 올렸다.
“하아... 약속 지키지 못해서 죄송해요. 이바노프 할아버지.”
화아아악!
그리고 세리나의 팔찌에서 빛이 번쩍이고.
“할배!”
작게 미소를 짓고 있는 이바노프가 나타났다.
“아... 아아아!!! 할배!! 할아버지!!”
그저 자고 있다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의 이바노프.
최유나는 무릎을 꿇고 이미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의 얼굴에 떨리는 손을 대며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할아버지!”
6살에 만나, 20살까지. 14년 동안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를 믿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혹독하게 훈련 시킨 그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감옥섬에 갇히고 8년. 탈옥한 뒤의 1년. 그 긴 시간 동안 그를 원망했다.
“흐아아앙!!”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지금. 최유나는 6살 어린아이로 돌아가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 * *
세리나는 부패하지 않도록 이바노프의 육체를 얼려 놓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최유나를 바라봤다.
“이제 어떻게 하려고.”
“...”
세리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최유나의 퉁퉁 부은 눈에 빛이 돌아왔다.
“복수해야지.”
“...이바노프 할아버지는 원하지 않을 거야.”
“알아.”
블라디미르 드미트리 보리스. G.K와 거래하여 자신을 감옥섬에 가둔 장본인이자 이바노프를 밀어내고 그를 죽게 만든 현 청색 마탑주.
최유나는 그를 떠올리며 표정을 구겼다.
“그래도 절대로 용서 못 해.”
“...4대 마탑이랑 나는 마력 맹약으로 묶여있어. 나는... 못 도와줘.”
“그것도 알아. 도와달라고 안 해.”
하지만, 홀로 마탑을 상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
최유나의 머릿속에 G.K를 떨어뜨린 자신의 보스, 진우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돌아가야겠어.”
최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리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왜?”
“할아버지를 두고 갈 수는 없잖아.”
“어... 근데?”
“아공간 하나만 빌려줘.”
“...”
맡겨놓은 것처럼 당당히 말하는 최유나의 모습에 순간 어이가 없어진 세리나였다.
“대신 속여넘기려고 한 건 넘어갈게.”
“야! 그건 너를 위해서...!”
순간 욱한 세리나였지만, 뭔가 당당한 최유나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그래 다 가져가라!”
그리고 결국은 남은 아공간 팔찌를 꺼내 그녀에게 넘겨줬다.
“고마워. 은혜는 꼭 갚을게.”
“그래 제발!”
“그럼 간다.”
이바노프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곧바로 방을 나서는 최유나를 향해 힘없이 손을 흔든 세리나가 문이 닫히자 턱을 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진우. 그 사람이 잘 잡아줬으면 좋겠네...”
부디 친구가 복수귀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