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만능 빌런 58화 - 리디북스
4일 뒤, 보라색 액체가 담긴 네 개의 작은 유리병을 받은 천무진이 그것을 견고한 가방에 넣고 소중하게 끌어안고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영감님.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허허허, 이거야 원.)”
이미 수십 번도 더 받은 감사 인사였기에 찰리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자, 얼른 가서 딸에게 투약하게. 정맥에 주사하면 한 시간 내에는 약효가 돌 걸세.)”
진우가 찰리의 말을 통역해주고, 그것을 들은 천무진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진우는 그런 천무진을 뒤로하고 최유나에게 다가갔다.
“천무진은 당분간 은거지에 머물면서 가족을 살피라고 하고, 너는...”
“청색 마탑을 끌어들일 방법을 찾으라고? 알았어, 알았어. 수십 번은 더 들었다구.”
“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최유나가 천무진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아재! 얼른 가자고! 세리나가 빌려준 비행기가 가버리면 하루 더 기다려야 한다!?”
“아! 안 되지! 그건 안 되지!”
세 사람이 타고 온 세리나의 전용기가 가버린다는 말에 천무진은 고개를 번쩍 들고는 가방을 안은 채로 차량의 운전석에 앉았다.
“빠르기도 해라. 자 가방은 주고... 안 줘? 그걸 안고 운전할 거야? 빨리 안 내놔?”
“끄으응...”
조수석에 앉은 최유나가 반쯤 억지로 가방을 뺏고는 창문을 내려 진우를 바라봤다.
“보스. 진짜 혼자 남아도 괜찮은 거야?”
“그래. 필요한 일이니까.”
“흐음... 알았어. 그럼 우리 먼저 돌아가 있을게.”
“그래.”
“아재, 출발~!”
“12년 만에 운전하는 건데 괜찮겠지...?”
“어? 뭐라고?”
부우웅!
천무진과 최유나가 탄 차량이 찰리의 연구소를 떠나고, 연구소의 앞에는 진우와 찰리만이 남았다.
“(자자, 그럼 우리도 들어가서 즐거운 실험... 흠흠, 검사를 시작해 보세!)”
“(...신나 보이는군.)”
“(기분 탓일세! 허허허헣!)”
* * *
콰앙!! 콰아아아앙!! 콰드드드득!!!
가디언 코리아 본사에 붙어 있는 1급 요원들을 위한 훈련실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퍼지며 사방의 벽이 우그러들었다.
“...”
정작 훈련실 내부에 있는 사람은 훈련실의 중앙에 서서 눈을 감고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때, 우그러든 훈련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유차빈이 들어왔다.
“이러다가 훈련실 하나 폐기하겠습니다.”
“...후우...”
유차빈의 말에 훈련실 중앙에 서있던 정인태가 눈을 떴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국민들은 여전히 저희에게 의심을 보내고 있고, 정치권 인사들과 기업들도 하나씩 등을 돌리는...”
콰드드드득!!!
움찔!
유차빈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의 벽이 완전히 구겨지며 굉음이 울렸다.
“...저에게 화풀이를 하신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렇겠지.”
쿠구구궁!!
훈련실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네가 데빌의 조건을 받아들인 이유는 이해한다. 어쩔 수 없었겠지. 그게 최선이었겠지.”
“...”
콰지지직!!
견고한 방어 술식이 그려진 콘크리트가 덩어리째 뜯어져 벽면에 구멍이 뚫렸다.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었으니 이 정도로 수습한 것도 대단한 수완이지. 알고는 있다.”
콰드드드득!!
벽에서 뜯어져 나온 콘크리트 덩어리가 잘게 부서지며 가루가 되었다.
‘...어마어마한 능력...’
일련의 과정을 전부 지켜본 유차빈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이게 오로지 힘만으로 G.K 지사장의 위치에 오른 자의 힘...’
몸을 돌려 자신에게 걸어오는 정인태의 모습에 유차빈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유차빈의 앞에 선 정인태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유차빈 비서실장.”
“...예.”
분노, 오로지 그 하나만의 감정이 이글거리는 정인태의 눈은 사람의 그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빼앗긴 맹수의 눈이었다.
“다 이해한다. 이번에는 내 패배라는 것을 인정해.”
정인태의 앞에 선 그녀는 자신이 마치 맹수 앞의 작은 먹잇감이 된 기분에 몸이 떨려왔다.
“그러니...”
정인태는 그런 유차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을 이었다.
“우석훈, 도석환, 그리고 데빌, 그 셋을 찢어 죽여버릴 수 있는 자리를 최대한 빨리 준비해.”
“......”
사실 국민이 의심을 보내고, 정부가 견제하며, 기업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자신이 찢겨나갈 것 같은 기분에 유차빈은 그 사실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믿는다.”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어깨를 툭툭 치고 훈련실을 나가는 정인태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털썩.
유차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아아... 믿기는 개뿔이...”
울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 * *
“(음? 오! 오? 이건? 아, 아니군. 그럼 이건 어떠냐!)”
“...”
천무진과 최유나를 한국에 돌려보내고 이틀째.
자신의 피를 가지고 별짓을 다 하는 찰리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찰리. 뭔가 알아낸 건 있나?)”
“(호오오, 이것도 버텨내나? 그럼 이건? 에잇! 이건 어떠냐?)”
“(...미치겠군.)”
처음 보는 장난감을 이리저리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불러도 반응도 하지 않는 찰리 때문에 진우는 딱히 할 게 없었다.
“후우...”
결국 진우는 적당히 자리에 앉아 여기저기 널려 있는 종이를 끌어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발화 능력자의 채액은 일반인, 혹은 타 능력자에 비해 끓는점이 0.92도 낮다. 매우 흥미롭다. 또 전류계 능력자의 채액이 다른 이들에 비해 전도율이 0.31% 높다는...)
“...이 정도면 그냥 오차 아닌가...?”
(환상계 능력자는 더 현실적인 꿈을 꾸는 비율—. 꿈속으로 들어가는 장치를 의뢰해볼까. 아니면—.)
(나트륨과 아미노산을 비롯한 인체에 필수 요소들을 더욱 투여하면 육체 능력자의—.)
시간 때우기로 이것저것을 읽던 진우에게 한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능력 축출을 따르지 않은 능력 강화, 혹은 인공 초능력자 프로젝트 의뢰.)
“...이건...”
연구 일지, 아니 연구 기록? 같았던 다른 종이들과는 다르게 의뢰의 형식으로 적혀 있는 글을 읽던 진우가 눈을 빛냈다.
(—따라서 모든 연구 비용은 전액...)
“다음 장이 있었군.”
진우는 내용이 끊긴 것에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
사방에 널려진 종이, 도구, 상자 속에서 이 의뢰서의 다음 장을 찾기에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진우는 결국 아직도 자신의 피를 가지고 난리를 치고 있는 찰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으엉? 뭔가. 지금 딱 좋을 때인데!)”
“(이거. 어디서 의뢰했는지 기억하나?)”
“(엉?)”
진우가 내민 종이를 바라본 찰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귀찮게... 인공 초능... 이건. 52구역...헉!?)”
“(52구역? 51구역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연구를 이어가고 싶어 대충 대답하던 찰리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다물고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마, 말을 잘못했군. 51구역이었던가? 51구역이 맞네. 음.)”
“...”
뭔가 의심쩍은 찰리의 행동에 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51구역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나...?)”
“(아, 아닐세! 52구역은 내가 말을 잘못한 곳이고, 51구역이 맞...)”
“(아, 그러고 보니 총본부에 있을 때 소문은 들어본 적 있다. 가디언이 생겨난 이후 미국에서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대규모 초능력 연구 시설을 만들었다는...)”
“(아, 아닐세! 그건 헛소문...)”
“(그게 52구역인가.)”
“(......)”
찰리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입을 다물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진우의 눈초리에 결국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에잉,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맞네. 초능력뿐만이 아니라, 마법과 무공을 비밀리에 연구하는 곳이 52구역이지.)”
“(...그렇게 쉽게 얘기해도 되는 건가?)”
“(뭐 어떤가 어차피 가디언 총본부에서는 눈치채고 있을 테고, 자네는 총본부의 정보부 부총괄이니 자네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겠지.)”
“(...)”
진우는 찰리가 자신을 아직도 가디언 소속이라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찰리, 뉴스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엉? 뉴스? 헹, 어차피 연구소에만 처박혀 있는 노인일 뿐인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서 어쩌겠나.)”
“(...그렇군.)”
“(가끔 연구 성과를 발표할 때 말고는 나가지도 않는다네. 한 2년 전에 나간 게 마지막이었지 아마?)”
“(...)”
어쩐지 자신을 알고 있다 해도 빌런인 자신을 너무 쉽게 안으로 들인다고 생각한 진우였다.
“(아무튼 그건 52구역에서 3년? 쯤 전에 의뢰한 거네. 한동안 연구해 보긴 했는데 단순 약물로는 불가능해서 중단됐지.)”
“(그렇군.)”
“(그런데 이건 왜?)”
“(한 가지 재미있는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재미있는 거?)”
진우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찰리를 바라봤다.
“(일단 연구를 계속해라,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하지.)”
“(...?)”
진우는 몸을 돌려 다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잉, 궁금하게.)”
그런 진우를 바라보던 찰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내 관심을 끊고는 다시 진우의 피를 바라봤다
“(아이고 많이 기다렸지? 자자, 이번에는 마력 투사를 해봅시다~)”
그런 찰리를 바라보던 진우는 머릿속으로 52구역에 대해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후우우...”
천무진이 굉장히 떨리는 손으로 보라색 액체가 든 주사기를 붙잡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재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줘야 하는 거야?”
“조, 조금만 더... 쓰으읍. 후우우...”
“누가 보면 애라도 낳고 있는 줄 알겠네.”
계속해서 심호흡을 이어가는 천무진을 보며 투덜거리던 최유나가 시선을 돌려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바라봤다.
“너도 고생이 많다.”
은은한 냉기가 느껴지는 투명한 얼음 속에는 날개뼈 부근까지 내려오는 흑발과 오밀조밀한 얼굴이 예쁘면서도 어딘가 천무진을 닮은 여자, 천지인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아재 얼굴 느낌이 나면서도 청순하게 생길 수가 있지?”
최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지인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려 천무진을 바라봤다.
“쓰으으... 후우우... 쓰으읍, 후우우...”
아직도 심호흡을 하고 있는 천무진을 보던 최유나의 이마에 핏줄이 올랐다.
“날 새겠네! 녹인다!?”
“으어?! 자, 잠시만!!”
최유나는 완전 동결 내부에 있는 자신의 마력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투명한 얼음은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으어! 어, 어떻게!? 지, 지금 투약하면 되나!?”
“아직 다 안 녹았어! 좀 기다려!”
“으어어엉.”
이내 얼음이 완전히 녹아내리고,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천지인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천천히 생명 활동이 돌아올 거야. 혈색이 돌아오면 그때 투약하면 돼.”
“어, 어어..”
“체온도 올라가야 하니까 아재 능력으로 온도 좀 높여 주고. 조금 많이 따뜻한 정도로.”
“아, 알았다.”
천지인을 안아 든 천무진이 [광휘]를 사용해 주변의 온도를 조금 끌어올리며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지인아...’
자신이 감옥섬에 갇힌 동안 어미를 잃고 오빠를 잃고 홀로 동생인 천예성을 보살피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마지막에 와서는 독에 중독되어 혼수상태에 빠진 불쌍한 자신의 딸.
“슬슬 됐겠다. 투약해 아재.”
“그래...”
‘지인아... 아빠가, 아빠가 속죄할 수 있도록...제발 건강하게 일어나다오....’
천무진이 조심스럽게 주사기를 들어 올려 천지인의 팔에 해독제를 투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