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태풍의 눈(1)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싸지른 똥은 치워야지.’
가디언 코리아의 대대적인 빌런 토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망설이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보스. 부랑자 쪽에서 요구사항이...”
“그건 기각이다. 마약은 구해주지 마.”
“하지만 저들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대신...”
사건이 일어난지 거의 일개월.
진우는 송조운과 함께 한국 내의 정보망을 다듬는 것에 온 힘을 다 쓰고 있었다.
“이걸로 전체적인 조율은 끝났습니다.”
“후우... G.K는?”
“여전합니다. 순찰을 늘렸고, 훈련도 늘렸고, 각종 소모품 구매에 시도때도 없이 정부쪽과 회의.”
“당장 움직일 기미가 안보이면 그걸로 됐어.”
지은이가 가져다준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며 진우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송조운이 뭔가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도민경에게 회색 마탑에 물자를 구매하라고 지시하셨죠?”
“지시...라고 하기보다는 그렇게 하라고 제안을 한거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지시나 다름 없지만...뭐 아무튼 거기서 G.K의 비서실장을 봤다고 합니다.”
“회색마탑에서?”
“네. 세리나 블로섬과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하는 군요.”
“음...”
왜 가디언 코리아에서 세리아 블로섬. 회색 마탑주를 만나려고 기다리기까지 할까? 비서실장씩이나 되는 사람을 보내서 말이다.
“G.K의 비서실장은...유차빈이었나?”
“네. 젊은 나이에 비서실장까지 올라간 사람이라 꽤 유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유차빈...”
약 3년전 진우가 가디언 총본부 정보부 부총괄의 자리에 올라갔을 때 비서실장이 된 여자.
총본부에서 상부에 들이박고 다시 가디언 코리아의 정보 총괄 자리에 내려왔을 때 그녀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다.
‘필요한 정보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써놓은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던 여자였지...’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깔끔한 과거를 가진 여자라는 것만을 확인한 것 말고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에는 여러모로 바빠 별다른 접점이 없이 진우는 가디언 코리아에 배신을 당했고 말이다.
“아무튼. 이상하긴 하군.”
“그렇죠. 일단 회색 마탑에 특이사항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요청해 놓긴 했습니다.”
“그래. 일단은 그걸로 됐겠지.”
진우는 한 장의 서류를 들어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다른 데 신경쓸 여유는 없으니까.”
“...근데 진짜 합니까?”
“해야지. G.K의 힘을 깎아내야 편하게 SOE를 쫒을 수 있을 테니까.”
천무진의 딸. 천지인은 아직도 완전 동결 상태.
최유나가 주기적으로 마력을 공급하고 있기에 당장은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하긴. 최근 무진님의 상태가 좀 그렇긴 하죠.”
“...역시 나 때문이겠지?”
“뭐...그 이유도 있긴 하겠죠.”
이은선과 지은이를 데려오고 나서 대략 한 달.
천무진은 진우의 가족, 특히 딸인 지은이를 볼 때마다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천무진이 마음의 병을 얻을 것 같은 느낌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을 지경.
“어차피 정부와 가디언은 갈라서야 해. 그래야 서로 썩은 부위를 정리할 수 있을거다.”
“그건 이해 합니다만...”
송조운은 진우가 들고 있는 서류. 그 중에서도 한 건물의 도면이 그려져 있는 서류를 힐끗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청와대는 아니죠...”
그렇다. 진우가 들고 있는 서류는 대통령 경호단의 인명록.
청와대의 도면. 청와대 경비 구조 등이 정리되어 있는 문서.
진우는 청와대로 잠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것이다.
“대통령을 조용히 만날 방법이 없는 이상 이게 최선이다.”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해본다니까요?”
“시간이 부족하잖나.”
“...그건 그렇지만...”
진우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송조운을 바라보며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놨다.
“네가 한가지 착각하고 있는게 있다.”
“네?”
“잠입 계획을 짜고 있다 해서 지금 당장 청와대에 잠입한다는게 아니야. 그건 그냥 자살행위지.”
“그럼...?”
“말했잖나. G.K는 분명 대규모 빌런 토벌을 행할 거라고. 그놈들은 분명 자신들의 전력을 아끼기 위해 정부에 손을 벌리겠지.”
“...그럼 정부는 있는 전력 없는 전력 전부 끌어모아야 하겠네요.”
“필연적으로 청와대의 경비 인원도 줄겠지. 정부는 지켜야 할 게 많거든.”
송조운은 진우의 말에 떨떠름 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사전에 토벌을 막을 수는 없겠군요.”
“못 막는 것도 있고. 안 막는 것도 있지.”
진우는 진지한 눈빛으로 책상에 늘여놓은 서류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토벌이 시작되자마자 끝나게 할 수는 있어. 그리고... 잘하면 G.C와 G.J도 한국에서 끌어낼 수 있겠지.”
“...전체적인 그림은 이해했습니다. 저도 노력해보죠.”
“그래. 부탁한다.”
***
“아직도 있어?”
“아직도 있습니다.”
세리나가 담담하게 말하는 자신의 비서의 말에 낮게 한숨을 쉬었다.
“총본부의 눈을 격리시키고 있는게 들킨 건 아니지?”
“그랬으면 G.K가 아니라 총본부에서 사람이 왔을겁니다.”
“그렇지?”
부탑주, 스티브 레이몬드의 중립 세력. 그 뒤에 있는 가디언 총본부의 눈을 은밀하게 격리시키는 도중 찾아온 가디언 코리아의 유차빈이 달가울 리가 없는 상황.
“대체 목적이 뭐야?”
“탑주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아... 내가 지금 가디언의 사람을 쉽게 만나면 안되는 상황인데...”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고는 있다 해도 무려 부탑주의 세력을 건드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디언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설리번이 내가 가디언이랑 손을 잡았다고 몰아갈 수도 있으니...”
“강제로 쫓아낼까요?”
“하아... 일단 쫓아내지는 마. 괜히 G.K를 적대한다고 오해받아도 귀찮아.”
“알겠습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상황에 세리나는 머리가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까 아버님은 탈모가 있었는데... 관리를 해야하나..?’
그때.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세리나의 비서가 양해를 구하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탑주님.”
“응? 왜?”
문자를 확인한 비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메모리얼 버탈리언이 마탑에 들어왔다고...”
“...누구?”
“메모리얼 버탈리언...”
“에엑!?”
세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악했다.
***
벌써 일주일.
마침 세리나 블로섬이 회색 마탑 한국 지부에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유차빈이 세리나 블로섬의 접견을 기다린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급한 일은 전부 처리하고 왔지만... 이 이상은 아무래도 무리일려나...”
슬슬 토벌 계획이 구체화 되는 중이니 비서실장인 자신이 필요할 때다.
“윌리엄 블로섬의 위치까지는 아니라도 데빌에 관한 작은 단서라도 얻었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결국 세리나 블로섬은 만나지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되었다.
“슬슬 시선도 따갑고... 나중에 다시 와야겠네.”
유차빈은 결국 한숨을 쉬고는 물던 호텔에서 나와 회색 마탑의 출구로 향했다.
“...?”
그리고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일련의 무리가 유차빈의 앞을 막았다.
“...위령대?”
로브에 그려진 가시나무가 휘감긴 방패의 문양은 가디언 총본부의 은밀 기동대, 위령대(慰靈隊) 혹은 메모리얼 버탈리언(memorial battalion)이라 불리는 특수 대대의 상징.
그들을 알아본 유차빈이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위령대가 저에게 무슨 볼일이죠? 그것도 회색 마탑에서 말이죠.”
유차빈의 물음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후드를 벗고.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흔한 얼굴의 금발 외국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입을 열었다.
“위령대 부대장. 1급 요원. 마튼 권입니다.”
“...가디언 코리아 비서실장 유차빈이에요.”
유차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마튼이 품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정인태 지사장의 파견 요청으로 2급 요원 열 다섯과 함께 파견을 나왔습니다. 유차빈 비서실장님의 휘하에서 움직이라는 명입니다.”
“지사장님이?”
비서실장인 자신도 전혀 모르는 파견 요청, 그리고 자신에게 이들을 맡겼다는 것은 넘어간다 해도.
“왜 여기서...?”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아니...”
회색 마탑은 중립 세력이긴 하지만 가디언의 아군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곳. 때문에 이들이 왜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이해가 안 가는 유차빈이었다.
심지어 출구가 가까운 곳이라 상당히 많은 이들이 자신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아무튼 일단 서울 본부로 가죠. 얘기는 그 이후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떠나는 위령대와 유차빈을 은밀하게 살펴보던 세리나와 그녀의 비서는.
“...우리 때문에 온건 아닌가보네?”
“저 위령대는 처음 봤습니다.”
위령대의 이름은 빌런 사회에 있어 공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위령. 혼을 위로한다. 추모한다. 라는 이름과는 반대로, 걸리면 영혼도 남기지 못한다는 소문을 가진 가디언 총본부의 특수대대.
“스티브. 그 노인네가 부른 줄 알았네...”
조직 부수기 대대. 라는 별명도 있는 자들이라 회색 마탑의 세력 싸움에 끼어드는 줄 알았던 세리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세리나를 본 비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대마법사인 탑주님도 저들을 상대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상대할 수는 있겠지.”
“그럼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두려워? 아아. 오해했구나?”
“네?”
세리나는 피식 웃으며 출구를 빠져나가는 유차빈과 위령대의 인원을 보며 말했다.
“정면에서 붙으면 나 혼자서도 위령대 전부를 처리할 수 있어. 대마법사란 그런 존재니까.”
“그럼...”
“근데 그건 말 그대로 정면에서 붙었을 때 얘기고.”
위령대와 유차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세리나가 등을 돌려 사무실을 향해 걸으며 말을 이었다.
“위령대 놈들은 절대로 나랑 붙으려고 하질 않아. 철저하게 내 기반을 부수려고 하겠지.”
나 같은 경우에는 암시장이겠지? 라고 덧붙인 세리나가 뺨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위령대 놈들이 그래서 조직 부수기 대대라는 별명을 가진거야. 상대하지 못할 사람은 상대하지 않으면서 관련된 조직은 확실하게 부수거든.”
“...가디언 총본부 직속이면서 그런 비겁한 일을...”
“저놈들 깡통 속에는 정의 같은 건 없어. 그냥 명령을 따를 뿐이지.”
문득 걸음을 멈춘 세리나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데빌씨에게 줄 정보가 생겼네?”
“네?”
“우리 때문에 온게 아니면 저놈들이 한국까지 왜 왔겠어.”
“아...그렇네요. 요즘 가디언 코리아가 흉흉하긴 하죠.”
“그래. 우리 데빌씨가 저지른 그 사건에 대한 보복이겠지.”
아직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지만 가디언 코리아는 반드시 보복과 명예 회복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거기에 위령대까지 파견했다는 것은 총본부에서도 이 일을 관심있게 보고있다는 증거.
“그럼 위령대가 들어왔다는 정보로 뭘 뜯어낼 수 있을까~?”
“...”
그 데빌이 위령대가 한국에 들어온걸 모를 것 같진 않은 느낌이 든 비서였지만.
“흥~흥~”
“...”
왠지 모르게 신난 세리나를 보며 일단은 조용히 있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