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망설임(1)
모든 것이 상정 외의 상황이다.
진우의 명으로 루비가 이은선의 곁에 붙어있긴 했지만, 애초에 루비는 훈련을 고작 2주 정도 받은게 전부인 말하자면 초짜다.
가족에게 그런 루비 하나만을 붙혀놓은 이유는 단순했다.
첫째로 믿을 만한 자가 없었기에.
최유나와 천무진은 얼굴이 알려져 있다.
진우의 능력으로 얼굴을 바꾼다고 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자가 있는 이상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고 템페스트나 회색 마탑은 가족을 맡길만한 동료하고 할 수 없다.
둘째로 신명하가 이렇게까지 멍청한 짓을 벌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디언 코리아 정보부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아인 연합마을과의 연결을 끊어내 압박을 주긴 했지만 진우가 판단한 정보부의 저력은 아직 남아있는 만큼 이렇게 비열하게, 그리고 급하게 움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대가가 가족의 일상을 부수게 되었지...’
자신과 엮인 이상, 이은선과 지은이는 이제 당연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이은선이 알게 된 이상 이은선은 진우가 버림받은 이유, 그리고 연관된 자들을 찾기 위해 위험한 선을 넘으려 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여자니까.’
무엇보다 신명하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이상 그냥 둘 수 없었다.
“후우...”
진우는 천천히 녹아내리는 얼음 장벽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오빠. 약속 잊지마.”
그런 진우를 바라보던 이은선의 말에 진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이윽고 얼음 장벽이 완전히 녹아내리고.
“보스!”
“데빌!”
맹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최유나와 노범천이 진우를 쳐다봤다.
‘이미 한계를 넘었다. 서있는게 고작이야. 전투는 피해야 해.’
노범천은 당장이라도 진우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흉흉한 기세.
진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살짝 뒤쪽에 있는 천무진을 바라봤다.
“...!”
진우의 시선을 받은 천무진이 상대하던 특수 대응팀과 테러 진압대의 대원들을 뿌리치고 진우의 뒤에 시립했다.
“전원 멈춰라.”
그리고. 진우의 변조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큭...목소리 변조도 아슬아슬한가...’
마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변음(變音)]이었지만 한계에 다다른 진우는 [변음]을 사용하는 것조차 버거운 것을 느꼈다.
“데빌...”
“윤무길.”
그때. 최유나와 대치하고 있던 노범천의 뒤로 윤무길이 맹강모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와서 멈추라고 해도 의미없는 일이다. 넌 선을 넘었어.”
그의 말에 진우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언제는 선을 넘은 적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감옥섬, 그리고 GK은행만으로도 가디언은 나를 죽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텐데.”
“...”
진우의 말대로였기에 윤무길은 말문이 막혔다.
진우는 그런 윤무길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이대로 가다가는 피해가 늘어날 뿐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너를 잡는게 이득이다.”
“죽어가는 부하들은 버려두고 말이냐?”
“큭...!”
진우의 말대로 지금 전장이 된 이곳에는 수 많은 자들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살아있다. 적절하게 조치하면 다시 복귀할 수도 있겠지. 그런 자들을 버리고 끝을 보자는 거냐.”
“...”
윤무길이 진우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자, 노범천이 크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윤무길! 더 들을 것도 없다!! 저놈은 이곳에서 잡아야한다!”
“...”
“아니! 한번 털린 감옥섬에 보내는 것도 의미없는 일! 죽여야 후환이 없다!”
“...”
“윤무길!”
노범천은 최유나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진우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인질이 남아있다.”
“...!”
진우의 뒤에 지은이를 안고 가만히 서 있던 이은선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 그림자로 만들어진 문양이 그려진 이은선의 모습에 윤무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분께 무슨 짓을 한거냐!!”
“네놈이 상대한 검은 병사와 다를 건 없지.”
“비겁한 새끼가...!”
사실 이은선이 걸음을 옮긴 것은 그녀 스스로의 의지였지만, 윤무길이 그것을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그분은 일반인이다!”
“나는 빌런이다. 윤무길. 그게 어쨌다는 거냐.”
“이익...!”
“그리고 일반인을 희생시켜려 한 건 너희다. 이제와서 무슨 궤변이냐.”
“그,그건...”
노범천의 단독 행동이기는 하나 지금 특수 대응팀과 테러 진압대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그 책임 또한 공유한다는 것.
때문에 윤무길은 차마 반론할 수 없었다.
“뭘...원하는 거냐.”
“윤무기이일!!!”
“어딜!”
노범천이 소리를 지르며 윤무길과 진우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최유나가 먹아섰다.
“네년!! 비켜라!!”
“할배는 짜져있어! 대장끼리 얘기하는 거에 끼는거 아니야!”
“나도 대장이다!!!”
콰아앙!!!
노범천의 방패가 최유나의 빙결 마법과 충돌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한편. 그쪽은 완전히 무시한 진우가 이를 악물고 있는 윤무길을 향해 말했다.
“첫째. 우리를 막지 마라. 조용히 떠나주마.”
“...이런 난리를 피워놓고 그딴 소리를...”
“둘째. 이 여자와 아이는 내가 데려간다.”
“...뭐?”
윤무길은 눈을 크게 뜨며 표정을 구겼다.
“그걸 용납할 것 같나!!”
“내 능력은 이미 잘 알겠지.”
윤무길이 분노하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진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으으으...”
그러자 가만히 있던 이은선이 신음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 여자의 팔, 다리, 심지어 목이라도. 언제든지 부러뜨릴 수 있다. 움직이지 마라.”
“이이익...!!”
스스로의 움직임에 팔다리가 부러져나가던 대원들이 떠오른 윤무길이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분과 아이를 대체 왜...!”
“가치가 있으니까.”
“...가치?”
“전 정보총괄 서진우의 아내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둘을 원하는 자들은 많다. 원한이라는게 그렇지.”
“거래의 도구로 삼을 생각이냐!!”
“그래.”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진우였다.
“어차피 너희는 둘을 지키려는 생각도 없었으니 상관 없지 않나?”
“상관없을 리가 없지않나!!!”
“그럼 진작에 보호했어야지.”
“...”
왠지 모르게 진심이 담긴 진우의 말에 또한번 윤무길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켈베로, 이그나이트, 인설트. 모두 서진우의 활약으로 해체 된 조직이지. 그 잔당이라면 원한에 가득 차 있겠지. 좋은 거래품이 될 거다.”
“비겁한...!”
스스로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지금은 독하게 말해 이은선과 지은이가 빌런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선량한 피해자. 라는 인식을 심어야 했다.
“그딴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지 않나...!”
“그렇겠지.”
가면 아래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은 진우가 조용히 주변을 바라봤다.
“사망자도 있지만... 부상자의 수가 더 많군. 조치가 느려질수록 사망자가 더 많아지고. 운이 좋다고 해도 불구가 늘어나겠지.”
“크윽...”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무길을 바라봤다.
“이 많은 수의 동료를 버릴 셈인가.”
“빌어먹을...”
“일반인의 희생을 강요하더니 이번에는 동료의 희생을 강요하는 건가.”
“빌어먹을...!”
고뇌하는 윤무길의 모습을 보며 진우가 몰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천상의 목소리]까지 사용하니 죽을 맛이군.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아.’
얼음 장벽 속에서 아주 약간 회복하긴 했지만, 안 그래도 상당한 마력을 소모하는 [천상의 목소리]는 진우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부추기면...’
그리고 진우가 다시한번 무리하게 [천상의 목소리]를 사용하려는 그때.
“보스!!!”
“...송조운?”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복면을 쓴 수십의 인원과 함께 송조운이 나타났다.
“하... 드디어 왔군. 늦잖아...”
가디언과 경찰이 통제하고 있는 곳을 뚫고 지나온 건지,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복면의 무리가 빠르게 움직여 특수 대응팀과 테러 진압대를 포위했다.
“이,이게...! 서울 본부에서는 뭘 하고 있는...!”
“가디언 코리아 서울 본부 말씀이신가요?”
윤무길이 당황하며 소리치는 그때. 송조운이 포위망의 사이에서 나와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지금 G.K 서울 본부는 많이 바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
“템페스트의 정예가 GK제약. GK은행 등. 꽤 많은 장소를 습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템,템페스트!?”
송조운은 얼굴에 쓴 반가면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테러 진압대의 삼분의 일. 그리고 특수 대응 2팀이 이곳에 묶여있어서 참으로 잘된 일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서,설마 전부 계획된 일이라고...?”
“오오, 당연히 아닙니다.”
키득거리며 웃음을 지은 송조운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감히 우리 이클립스의 보스를 미끼로 삼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일 뿐이죠.”
송조운은 슬쩍 진우를 바라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 그러고보니 슬슬 템페스트뿐만이 아니라 다른 조직도 움직이겠군요!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빌런’이라고 하지 못할테니 말입니다.”
“네놈...!”
“음?”
그때. 최유나를 떨쳐낸 노범찬이 으르렁 거리며 송조운을 노려봤다.
“오, 노범찬 대장님 아니십니까.”
능글거리며 말을 거는 송조운의 모습에 노범찬이 분을 터뜨리며 그에게 달려들기 직전. 송조운이 소리쳤다.
“대장님도 이곳에 이렇게 얌전히 있을 때는 아닙니다만!”
“뭐라?”
“습격을 받고 있는 건 G.K 관련 시설뿐이 아니라는 겁니다.”
“...설마...!”
“G.K의 뒤나 빨고 있는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
“테러 진압대의 삼분의 일이 이곳에 있으니 평소보다 구멍이 많겠죠?”
“이익!!!”
분노를 터뜨리는 노범찬의 모습에 송조운이 조용히 무전기를 들었다.
“후퇴하는 자들은 길을 열어주세요. 그냥 보내겠습니다..”
((예.))
한걸음 뒤로 물러나 포위망을 느슨하게 만든 복면인들을 보며 노범찬과 윤무길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젠장.”
“후우...”
이내 욕설과 한숨을 내쉰 두 사람이 소리쳤다.
“부상자를 챙겨라! 간단한 응급처치 후 바로 이동한다!”
“살아있는 놈을 챙겨! 뼈가 부서진 것뿐이니 치료는 나중이다! 빠르게 이동한다!”
둘의 명령에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동료를 챙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송조운이 다시 무전기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
“절대로 공격하지 마세요. 저희는 저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 움직입니다.”
((예.))
지금 공격하면 특수 대응팀이던 테러 진압대던 끝까지 항전할 것이 분명했기에 혹시 모르는 마음에 한 번 더 강조한 송조운이 무전기를 내리며 중앙에 위치한 진우를 바라봤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어느새 진우의 옆으로 이동한 천무진과 최유나.
특수 대응팀과 테러 진압대가 후퇴의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을 터.
송조운은 짧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혹시나 했지만... 진짜로 가족을 위해 가디언과 정면으로 붙어버릴 줄은...”
적의 목적은 납치.
사살이 아닌 이상 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늦으면 큰일이겠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움직이고 봤단 말이지... 가족이 대상이면 그 보스도 생각이 멈춰 버리는 건가... 일단 나한테 연락했다는게 다행이군.”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패가 템페스트뿐이었기에 템페스트가 준비하고 있던 중국 지부 계획이 엉망이 되었지만, 금새 털어버린 송조운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보스의 유일한 약점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 이제 보스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득인가. 계획은 다시 세우면 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송조운이 어느새 부상자를 전부 챙겨 자신들을 경계하며 후퇴하는 특수 대응팀과 테러 진압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덕분에 보스가 망설이고 있던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감사를 표하죠.”
기나긴 하루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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