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의심을 심다(2)
“음...”
지리산 안쪽 그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의 벙커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던 윤무길이 읽고있던 책을 내려놨다.
“빌어먹을 믿을 만한 곳에서 기다리라고 했으면 시간을 정해놔야 할 것 아니야...”
일전에 자신의 부하인 여서림이 전해준 데빌의 전언에 이곳에서 데빌을 기다린지 벌써 3일.
아깝고도 아까운 휴가에 연차까지 몰아썼기에 시간은 아직 꽤 남아있었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놈이 죽어버린 이후로 내부도 상당히 소란스럽고. 빌런놈들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지...”
최근 아시아쪽 빌런 조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가디언의 인물이 아니더라도 체감될 정도다.
당장 최근 한달 동안 빌런 조직의 짓으로 보이는 은행 강도만 7건. 단순 강도가 42건. 테러가 13건. 인질극이 9건.
‘그’가 살아있을 때는 이것에 10%도 안되는 범죄가 일어났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그’의 부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신명하 그놈은 카리스마가 없어. 일 처리는 깔끔할지 몰라도 그건 개인적인 일을 할 때고... 쯧, 한동안은 어쩔 수 없는 건가.”
가볍게 혀를 찬 윤무길이 다시 책을 들어 읽기 시작하려 할 때.
“음?”
그의 능력 [생명 감지]에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온 건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준비해놓은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며 벙커의 입구를 바라봤다.
“믿을 만한곳. 즉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했으면 들어올 방법도 알고 있겠지. 어디 한번 와봐라. 일단 실력 좀 보자!”
투기를 내뿜으며 데빌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그때.
쿵쿵쿵!
“...?”
벙커의 두꺼운 철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뭔...”
윤무길은 반사적으로 벙커의 입구를 비추는 감시카메라 화면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검은 악마의 가면을 쓰고 있는. 코드네임 데빌로 보이는 한 명의 사내가 감시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허.”
-윤무길 벙커 안에 있는 건 알고 있다. 문을 열어라.
그리고 감시카메라 화면의 스피커에서 여유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씨, 이럼 허무하잖아.”
뭔가 혼자 들떠있던 것 같이 약간의 창피함이 느껴지는 윤무길이었다.
***
진우는 어딘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윤무길을 바라봤다..
정돈되지 않아 지저분해 보이는 수염과 머리 때문에 산적같이 보이면서도 사자와도 같은 기세를 가진 사내.
‘특수 대응팀 제 3대 대장. 불사의 광전사 윤무길.’
하지만 겉보기와는 다르게 신중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이렇게 벙커를 준비해 놓는 것도 그렇고 특수 대응팀을 천천히 가디언 코리아의 상부와 떨어뜨려 놓는 것도 그렇다.
‘이쪽이 빌런인 이상 아군이 되진 않겠지만... 최소한 특수 대응팀과는 적대하지 않아야 한다.’
특수 대응팀은 빌런 제압의 전문가들.
전투 계열 능력자들 중에서도 철저하게 실력자들만을 뽑아가는 것이 가디언 특수 대응팀이다.
저번 GK 은행에서 금고를 빼올때도 진우가 아니었다면 천무진과 최유나는 계속해서 시간을 끌리다가 붙잡혔을 가능성이 높을 정도로 위험한 자들.
때문에 진우는 특수 대응팀의 대장인 윤무길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때, 참다못한 윤무길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조용히 있을거지? 접촉한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
“그 말대로다.”
‘머리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돌려말하는 것을 싫어했었지.’
진우는 윤무길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질문이 있다.”
“질문?”
“그래.”
질문이라는 말에 윤무길이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한번 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은 대부분 내 예상일 뿐이다.”
“됐으니까 해보라고. 나 바쁜 사람이거든?”
“...”
윤무길이 3일간 기다렸다는 것을 모르는 진우는 생각보다 성격이 조금 더럽다고 생각했다.
“가디언에는 총 5개의 파벌이 있다.”
“그게 뭐 비밀이라고... 5개? 4개가 아니라?”
“정인태 지사장의 파벌, 가디언 차이나, 그리고 재팬의 파벌, 특수 대응팀의 파벌. 마지막으로 총본부 파벌.”
“아, 총본부가 있었지.”
총본부 파벌은 따지자면 출세하여 가디언 총본부로 가고 싶은 자들이 모인 모임 같은 느낌이었기에 윤무길의 머릿속에서 빠져있었다.
애초에 다른 파벌에 있으면서 총본부 파벌에 있는 자들도 많으니 말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가디언 차이나와 재팬 쪽의 움직임이 상당히 기묘해졌을거다.”
“...”
“그놈들의 움직임을 막던 자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너... 그놈. 서진우를 아는 놈이냐?”
“...특히 차이나 쪽은 상당히 거칠게 나올...”
“그놈 아냐고 물었잖아!”
뻔하게 말을 돌리려는 진우의 모습에 윤무길이 소리치며 진우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콰악!
순식간에 움직인 진우의 그림자가 그런 윤무길의 손을 막았다.
하지만, 윤무길은 그런 그림자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진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당장이라도 널 죽일 수도 있다.”
“...어째서지?”
“서진우. 그놈이 가디언 차이나랑 재팬을 막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세 명만 알고 있어. 지금의 정보 총괄도 모르는 사실이지.”
“...신명하를 말하는 거군.”
“그걸 네가 알고 있는데 이걸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살기어린 윤무길의 눈을 본 진우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나를 서진우를 살해한 빌런으로 의심하는 건가.”
“아니면 G.K 상부 쪽의 인물이겠지.”
점점 붉어지는 윤무길의 양쪽 눈에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한 진우가 적당히 앉으라 손짓하며 그림자를 없앴다.
“내가 알기로는 내...아니. 서진우가 가이언 차이나와 재팬을 막고 있던게 딱히 극비 사항이거나 그러진 않았을텐데?”
“흥, 대부분은 가디언 차이나와 재팬이 우리 쪽에 손을 대고 있지 않은 이유를 정인태를 비롯한 상부의 정치적 능력이라 알고 있지.”
“과연. 공적 가로채기였나.”
정보총괄 시절, 공적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던 진우였기에 자신의 할 일만을 할뿐, 다른 것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총본부 정보 총괄에 오르기도 했다. 정치적인 견제, 그리고 반골 성향 때문에 금방 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G.C,랑 G.J를 견제하고 있던게 서진우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나조차 따로 조사하다 알아낸 내용이니까.”
그것을 알아낸 직후 서진우가 죽어버려 친분을 쌓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윤무길은 마음속 어디선가 서진우라는 인물을 인정하고 약간은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네놈이 서진우를 죽인 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고오오오...
윤무길의 양쪽 눈이 완전한 붉은색으로 변하고, 전신에서 강력한 마력이 넘실거렸다.
“갈가리 찢어 죽여주마.”
“...”
자신을 위해 자신을 찢어 죽인다는 말에 뭔가 묘한 느낌을 받은 진우가 낮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서진우를 죽인 자들은 가디언 코리아의 상부다. 어쩌면 총본부가 끼어있을 수도 있지.”
“...뭐?”
정말 뜬금없는 말. 그럼에도 충격적인 내용에 윤무길이 입을 살짝 벌리며 의문을 표했다.
“빌런 조직에 의한 테러로 서진우가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생각해 봐라. 가디언 코리아의 정보부를 완전히 장악한 서진우가 자신을 죽일 만한 빌런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는게 말이 되나?”
“...”
“가디언 차이나와 재팬의 정보를 이용해 이리저리 흔들며 가디언 코리아에 눈독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고작 한국의 빌런 조직에 당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꼴이었기에 진우는 말을 하면서도 뭔가 낯간지럽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일단은 윤무길을 설득해야 했기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진우를 테러했다는 조직이 ‘크라운 버니’ 였던가?”
“...맞아.”
“‘크라운 버니’는 고작 중견 사이즈의 조직. S급도 없고 A+급이 최대인 조직이다. 그런 조직에게 가디언 코리아의 정보 총괄이 당했다고 진심으로 믿는건가?”
“...”
진우의 말에 윤무길이 기세를 가라앉히며 생각에 빠졌다.
‘왜 의심하지 않았지? 데빌의 말대로 서진우 정보 총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G.C와 G.J를 흔드는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고작 중견 조직에 당했다는게 말이 되나?’
그리고 가디언 코리아의 발표로는 ‘크라운 버니’는 그 자리에서 전부 사살되었다고 했다는 것을 기억한 윤무길은 잠시 특수 대응팀의 지난 일정을 되짚었다.
‘분명 그날 특수 대응팀은 북한 쪽에서 내려올지도 모르는 부랑자의 경계를 맡았다. 원래라면 그런 일은 군대가 해야하는 일이라 의아했었긴 했지만. 실제로 부랑자 몇몇이 내려오기도 했고 의심하지 않았것만...’
흔들리는 윤무길의 눈동자를 본 진우가 황금빛 눈을 빛냈다.
“짚히는 곳이 있는 모양이군.”
“...”
“이제 내가 서진우를 죽인자들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했을테니 얘기를 계속 진행하지.”
“그전에 한가지.”
“음?”
윤무길은 진우의 황금빛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의 얘기가 전부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다.”
“하아. 얘기의 앞뒤를 잘 맞춰보면 증거 따위는...”
“제 3자가 말하는 내용 치고는 너무 앞뒤가 잘맞는게 문제지.”
“...”
진우는 명백한 당사자였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윤무길은 진우를 제 3자인 빌런 ‘데빌’로 알고 있었기에 당연한 의문이었다.
“이거 정보를 너무 쉽게 주는 기분인데...”
고개를 저으며 작게 중얼거린 진우가 다시 윤무길을 바라봤다.
“선이 닿아있는 암부의 인원 정도는 있겠지? 최근에 암부에 들어간 인원 중 목덜미에 왕관을 쓴 토끼 문신이 있는 자가 있을거다. 그자를 심문해봐라.”
“문신?”
“‘크라운 버니’의 조직원이라는 상징이다. 분명히 암부에도 몇 명 정도는 들어갔겠지.”
“그게 대체 무슨...”
“애초에 ‘크라운 버니’는 가디언에서 이럴 때를 대비해 만든 위장 조직이다. 아까운 인원을 죽이진 않았을테니 조사해봐라.”
“...”
계속해서 나오는 충격적인 내용의 말에 윤무길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가디언 코리아는...아니, 가디언은 대체 어디까지 썩어버린거지...?’
윤무길이 이내 힘없이 고개를 숙이자 진우는 짧게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똑똑하다 들었는데 그건 정치적인 쪽의 얘기였나.”
“...”
“이제 본론을 얘기하지.”
말로서 사람을 쥐고 흔드는 그야말로 악마의 모습에 윤무길은 ‘데빌’이라는 코드네임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 사내라 생각했다.
***
“보스~”
진우가 벙커에서 나오는 것을 본 최유나가 손을 흔들며 모습을 드러냈다.
“얘기는 잘 끝났어?”
“대충은.”
“대충?”
진우가 벙커를 뒤돌아 보며 묘한 표정을 짓자 최유나가 고개를 갸옷거렸다.
“생각보다 별로였어?”
“생각한 그대로였다. 성격은 조금 급한 것 같았지만...”
“그럼?”
진우는 넋이 나간듯한 윤무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사고가 둔해. 아무래도 보험을 하나 정도는 들어놔야 할 것 같다.”
“보험?”
“일단 천무진과 합류하자. 얘기는 그 다음이다.”
“오케이~”
그렇게 진우와 최유나가 지리산에서 모습을 감추고 한참 뒤.
“미치겠군.”
생각을 정리한 윤무길이 벙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데빌...데빌이라...”
어떻게 데빌이 가디언의 내부사정을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만약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윤무길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
“아니, 최악의 휴가였지.”
“......”
“아니. 남은 휴가는 버릴 생각이다. 해야할 일이 생겼다.”
“......”
“도움? 아. 그래 도움이 필요하긴 해. 한가지 조사를 부탁하고 싶다.”
“......”
“아니. 외부가 아니라...”
윤무길의 눈이 붉게 변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G.K의 내부, 정보부와 암부를 조사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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