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소경도(1)
SOE. Savior Of End.
스스로를 종말의 구원자라 부르는 차별주의자 집단.
각성자를 세계의 귀족으로 만들고자 움직이면서도 초능력의 원리를 밝히기 위해 각성자의 인체실험을 하는 이중적인 집단.
“지인아...”
투명한 얼음의 캡슐 속에 동결되어 있는 천지인을 바라보는 천무진을 보며 진우가 말했다.
“완전 동결 마법이 성공해서 당장 천지인이 죽을 걱정은 덜었지만, 이대로 오래 놔두는 것도 좋진 않겠지.”
“보스.”
천무진의 충성을 완벽하게 받기 위함도 있지만, 진우도 딸이 있는 만큼 천무진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었기에 천지인을 이대로 방치해 둘 생각은 없었다.
“세이비어 병원에 있던 의사들은 전원 신분을 바꿔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이 여수에서 소경도라는 작은 섬에서 무료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정보다.”
세리나 블로섬에게 받은 정보로 인해 단서도 잡은 만큼 진우는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움직이고자 했다.
“소경도로 가서 그놈을 잡아오면 되나?”
“음...그게 문제란 말이지.”
당장이라도 여수로 출발할 것 같이 기세를 뿜어대던 천무진이 진우의 말에 멈칫했다.
“문제?”
“작은 진료소. 말 그대로 별 것 없는 마을에서 노인분들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곳이라고 하는군.”
“...그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글쎄...”
만약 의사가 SOE의 멤버라면 극단적인 차별 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더라도 인체실험에 가담한 악인이라는 것은 변치않는 사실.
“그런 자가 노인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뭔가 뒤가 구려.”
“확실히...”
진우의 말대로 악명 높은 SOE의 멤버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라는 것은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음... 무작정 가서 잡아오는 것보다는 정보를 조금이라도 획득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게 좋겠지.
그렇게 말한 진우는 천무진을 바라봤다.
“음?”
“연기는 좀 하나?”
“...연기?”
***
여수. 그 아래에 위치한 작은 섬. 소경도.
“흘흘. 오늘도 날씨가 좋구려.”
“그러게요. 고춧가루가 바짝 잘 마르겠어요.”
딱히 뭔가가 있지도 않고 주민이 많은 것도 아닌 그저 자그마한 섬.
“아이고 김 선상님~”
“아 어르신. 잘 지내고 계시죠?”
“아이고~ 고럼요 고럼요. 나가 허리가 아팠는데 김 선상님한테 진료받고 나니까 아픈게 그짓말 같더라니까요~”
“하하하, 그거 다행입니다.”
“아! 이것 좀 가져다 드셔요. 아주 잘 익어서 맛있을거에요.”
이곳의 유일한 젊은이이자 의사인 김우준이 노인이 건네는 고구마를 받아들며 사람 좋게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무료로 진료를 봐주고 있지만 국가 보조품으로 들어오는 의료품에 모자름은 없었고 섬의 주민들이 항상 챙겨주어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었다.
‘정말...그 지옥에서의 일들이 전부 꿈만 같아.’
그렇기에 김우준은 지금의 삶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때. 고구마를 건넨 노인이 김우준을 보며 말했다.
“아 그려그려. 그러고 보니까 오늘 이사오는 사람이 있는거 알아요?”
“이사요?”
작은 섬이기에 오히려 소문은 빨리 퍼진다.
특히 누군가가 이사를 온다는 소리는 주민이 늘어난다는 소리였기에 마을회관에서는 굉장히 핫한 주제였다.
“듣자허니...머더라...서울에 올라갔던 양반이 은퇴하고 조용히 쉴자리를 찾아온다고 혔던거 같은디...”
“그려? 나는 여가 고향이라고 들었는디?”
노인들은 순식간에 핫한 주제인 누군가의 이사를 가지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주민분이 한분 느는 건가? 좋은 분이면 좋겠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었기에 소경도의 주민들은 물론 김우준도 딱히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푸핳핳핳핳!”
“웃지마라.”
“연기.”
“......웃지 말거라...”
“풉...크...꺄핳하핳핳!!”
어설프게 나이든 말투를 흉내내는 천무진의 모습에 최유나가 바닥을 구르며 폭소했다.
“변장은 완벽하니 연기만 잘하면 된다.”
주름진 얼굴, 구부정한 허리. 골격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기에 여전히 장대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천무진의 모습은 누가봐도 80대 노인의 그것이었다.
“[성질 변화]를 이렇게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네 마력이 다하지 않는 이상 풀리진 않을거다.”
환상 계열 능력을 사용하면 에벌랜드의 류중현처럼 환상 계열 능력자에게 간파될 수도 있었기에 굳이 천무진의 그림자를 덕지덕지 붙여 [성질 변화]로 피부처럼 만든 가짜 얼굴이었다.
“근데 왜 나지?”
“연기.”
“......왜 나요.”
“이 중에 은신 능력을 가진 건 나뿐이니까 나는 따로 움직여야 하고. 최유나는...”
“아하하핳하하핳! 아. 배 아파! 광대뼈가 아파...”
“...잘할 것 같진 않군.”
“...”
차마 진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던 천무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진우는 회색 마탑에서 준비해준 배를 둘러봤다.
찬란한 금박의 선실.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보석까지 박혀있는 샹들리에. 그야말로 돈을 쳐바른 듯한 모습의 선실에 진우가 이마를 집었다.
“당장 준비할 수 있는 배가 이런 것 뿐이라니...”
선실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외부의 모습 또한 굉장한 졸부가 타고 있을 법한 외형이었기에 조용히 섬에 도착하고 싶었던 진우로서는 머리가 아파올 수 밖에 없었다.
“급하게 움직인 게 잘못이었나.”
진우는 죽은 사람. 최유나와 천무진은 흉악한 빌런.
회색 마탑. 정확하게는 세리나의 도움으로 천무진이 변장한 노인의 신분을 구하기는 했지만, 거금을 들여 배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세리나가 준비해준 이 번쩍번쩍한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말이다.
진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송조운이 더 힘을 내줘야겠어. 내가 말한대로 했으면 슬슬 터는 닦아놨겠지.”
송조운을 더욱 빡세게 굴리고자 마음먹은 진우가 눈이 아파오는 선실을 나와 갑판으로 나섰다.
“슬슬 도착이군.”
인천에서 출발해 빙 돌아왔기에 한참 걸렸지만 드디어 여수의 작은 섬. 소경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가는건가?”
“그래.”
어느새 진우를 따라나온 천무진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말했다.
“끄응. 허리가 아프군. 노인 체험도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야.”
“네 딸을 위해서다.”
“알고 있다.”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피식 웃은 진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소경도를 바라봤다.
“도착하고 나서는 보는 눈이 없어도 연기를 계속해. SOE의 눈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알았다.”
배를 타오고면서 진우의 작전에 대해 꽤 자세한 설명을 들었기에 천무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며 천무진에게 말했다.
“그럼 고생해라. 최유나 컨트롤 잘하고.”
“...노력해보지.”
그리고 진우가 완전히 투명해지고, 뭔가가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진우의 기척이 사라졌다.
갑판에 홀로 남은 천무진이 다시 허리를 굽히며 눈을 빛냈다.
“조금만 참아라 지인아...아빠가 낫게 해주마...”
***
“음...”
소경도의 상공.
[투명화]를 사용한 진우가 허공에 떠서 소경도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 다를건 없는 것 같은데... 아니. SOE가 상대니까 뭔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어.”
세이비어 오브 앤드의 악행은 굉장히 유명하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세계 곳곳의 은행 털이.
각성자와 일반인을 구분하지 않은 극악한 인체 실험.
목적을 모르겠는 전 세계를 향한 무분별한 테러.
일반인을 납치해 노예처럼 ‘사용’하는 정신나간 행동까지.
12년전 천무진을 포함한 가디언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해 조직 자체가 와해 되었다고는 하나 그 흔적을 잡은 지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찾았다.”
그때 진우가 사용한 [천리안]에 노인들뿐인 소경도 주민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사람이 걸렸다.
“대충 40대에 옅은 갈색 머리. 키는 170중반 정도. 저자가 세이비어 병원의 의사, 김우준이군.”
진우의 날카로운 눈이 주민들과 하하호호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우준의 주변을 살폈지만, 주민으로 보이는 노인을 제외하면 별다른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았다.
“노인들이 SOE의 멤버일 가능성은...”
때문에 진우는 주민들이 포섭, 혹은 위장된 SOE의 멤버일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방비하군.”
말그대로 그저 노인들로 보였기에 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떠올린 가능성을 버렸다.
그리고 그때 소경도의 작은 선착장에 도착한 번쩍번쩍한 한척의 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엄청 눈에 띄는군.”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무난한 배를 구해달라고 했어야 했나 살짝 후회하는 진우였다.
***
“허허...”
소경도의 작은 선착장을 관리하는 관리자. 주민들에게는 항구 영감이라 불리는 노인이 방금 막 들어온 한 척의 배를 바라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돈이 얼마나 남아돌면 이런 배를 만들었을꼬...”
뭘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쩍번쩍한 선체에 화려한 무늬가 인상적인 배였다.
“응?”
그리고 그 휘황찬란한 배에서 한 명의 노인이 젊은 여성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후우우...여기가 소경도인가?”
“어...그렇소만...”
항구 영감의 앞에서 체력이 부족한 듯 숨을 흘리며 말한 거구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기가 참 좋구만.”
“허허, 뭐 공기 말고는 자랑할만한 게 바다 밖에 없는 섬이긴 하지요.”
그제야 이 거구의 노인이 오늘 섬에 이사오기로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항구 영감이 그를 환영했다.
“난 이경호라고 합니다. 오늘 이사오기로 한 분 맞소?”
“맞ㄷ... 맞소.”
“아이고 오시는 분이 이렇게 성공한 사람인 줄은 몰랐구만.”
“...아. 사,사업을 좀 하다 은퇴해서 그렇소.”
뭔가 찝찝하다는 눈으로 자신이 타고 온 배를 바라본 거구의 노인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항구 영감 이경호의 눈에 옆에서 노인을 부축하고 있는 젊은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분은 손녀요?”
“아. 맞소. 굳이 따라오겠다고 난리를 쳐서 같이 온거요.”
“허허, 그렇구만. 참하게 생겨서 효심도 남다른 아가씨네그려.”
잠시 부럽다는 눈으로 거구의 노인과 그 손녀를 바라봤던 이경호 노인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선박 등록은 해야지. 자 이쪽으로 오시구려. 아, 그러고보니 이름도 못들었네.”
“난...”
잠시 멈칫한 거구의 노인, 천무진이 자신의 가명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천무성이오.”
“허허, 멋진 이름이구려.”
“...고맙소.”
천무성은 자신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을 따서 만든 천무진의 아들. 죽은 장남의 이름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선박 등록을 위해 작게 마련되어 있는 선착장 사무실로 들어간 이경호의 모습을 확인한 천무진이 조용히 이를 갈았다.
‘이 이름을 걸고. 네 놈들을 전부 쳐죽이겠다 SOE.’
천무진의 마음에 맞추듯 흘러나오는 살기에 천무진을 부축하고 있던 최유나가 천무진을 툭툭 쳤다.
“아재. 표정 풀어요.”
“...후우. 미안하군.”
진우가 두 사람에게 준 미션은 소경도의 마을의 주민들에게 최근 들어 섬에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그리고 세이비어 병원의 의사 김우준에 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얻는 것.
“지인이를 생각해서 참아요.”
“그래. 그래야지.”
지금처럼 살기를 흘려대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SOE의 눈에 들킬 수도 있고 주민들이 이상함을 눈치챌 수도 있었기에 천무진은 최유나의 말에 수긍했다.
“아.”
“음?”
“지금은 아재가 아니라 할배구나.”
“......허허...”
조금 짜증나도 참아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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