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세리나 블로섬(4)
화르르륵-!
나름 4성급 호텔인 재의 호텔이었기에 굉장히 고급스러운 스위트룸에 시뻘건 불길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신기한 점이라고 한다면 굉장한 열기를 띈 불의 벽이지만 스위트룸의 가구들은 전혀 불타지 않고 멀쩡하다 라는 것.
이것은 세리나 블로섬의 불에 대한 제어력이 실한올 조차 원하지 않는다면 태우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며, ‘회색의 대마법사’라는 이명에 걸맞는 S급 각성자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게 최유나일텐데...’
“하! 참 웃기네? 유치!? 좋다고 박수까지 치면서 폴짝폴짝 뛰던게 누군데!”
“그,그걸 어떻...”
“니가 생각했던 별명이 뭐더라? 매직 블루 걸? 핑크 걸?”
“헉!?”
“말하는 김에 물어보는 건데. 내가 블루인 건 그렇다 치고 너는 왜 레드가 아니라 핑크인데?”
“그,그만...!”
어차피 최유나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만 조금은 이쪽이 우위를 가지고 천천히 밝힐 생각이었던 진우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천무진은 아까부터 웃음을 참느라 거의 숨넘어 가기 직전이었고 말이다.
“다,당신이 데빌이었군요. 혹시나 했지만...”
세리나 블로섬 또한 앞의 여성이 최유나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어딜 말을 돌려! 나 안 봐!?”
“이익! 적당히 안해?”
“적당!? 넌 옛날부터...!”
최유나는 세리나 블로섬을 쉽게 놔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피식 웃은 진우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싸우는 것 같지도 않군.’
친우이자 악우,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이었기에 지금의 모습은 싸운다고 하기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일단 언성을 높이고 보는 어린아이 같았다.
***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지나.
“씨익, 씨익.”
“흥이다!”
드디어 진정한 최유나와 세리나 블로섬.
스위트룸의 불길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원래의 고급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얘기를 진행해도 되는건가?”
“...추태를 보였네.”
“...그건 됐고.”
진우의 신호에 천무진이 흥흥 거리고 있는 최유나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간식을 먹였다.
뭔가 아버지와 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이 데빌이고, 저게 유나니까...저분은?”
“천무진. 성기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지.”
“어...죽었던 거 아니었어?”
세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디언 코리아와 재팬의 정보 조작이다. 누명이라고 하는게 빠르겠지.”
“흐음...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세리나가 진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한국에는 관심이 많았어서 여러 가지로 알아봤지만, 그런 정보는 없었는데.”
“많았어서?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지금은 뭐...”
세리나가 슬쩍 최유나를 바라봤다.
“친구의 나라 정도?”
“그렇군.”
대략적인 사정을 눈치챈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음을 지은 세리나가 다시 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나름대로 유나를 꺼내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수단을 찾아보긴 했는데. 가디언 코리아가 참 열심히 막더라고.”
“그렇겠지. 최유나는 정인태의 치부와 관련된 사람이니까.”
“정인태? 가디언 코리아의 지사장?”
“그래.”
“...자세히 말해줘.”
최유나가 감옥섬에 투옥된 내막은 몰랐는지 세리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진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지만 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얘기는 최유나한테 들어라. 지금은 급한 일이 있다.”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
“그래.”
“...좋아. 그 건은 유나한테 물어볼게.”
세리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표정을 풀었다.
“그래서? 나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일단 그 전에.”
진우가 슬쩍 시선을 돌려 최유나와 함께 뭔가를 먹고 있는 천무진을 바라봤다.
“혹시 뇌 활동을 정지시키는 독, 혹은 병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근 12년 사이에 생긴 걸거다.”
“12년 사이에 생긴 독이나 병이라...”
진우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던 세리나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들어본 적 없어.”
“그런가.”
온갖 정보가 모이는 회색 마탑의 주인이 모른다면 가디언에서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일 것이 확실했기에 진우의 얼굴에 살짝 실망이 드러났다.
“후. 그럼 본론이다만.”
“아!”
그때. 세리나가 진우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독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증상은 들어본 적이 있어.”
“비슷한 증상?”
“어. 뇌 활동이 점점 느려지면서 마지막에는 완전히 중지되는 증상.”
자신이 말한 독의 증상 그대로였기에 진우의 눈이 살짝 빛났다.
“자세히.”
“7년 쯤 전에 미국의 한 병원에서 희귀한 초능력을 가진 아기를 발견했다고 해.”
“아기?”
“응. 편의상 [브레인 브레이크]라고 부르는 능력인데 알다시피 지각능력이 떨어지는 아기들은 능력을 막 사용할 때가 있잖아?”
“그렇지.”
“그것 때문에 아기의 능력에 노출된 부모가 급격한 치매 증상을 보였어. 그걸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아기의 초능력에 의해서 생긴 증상이라는게 밝혀졌고.”
“음...”
초능력에 대한 연구가 꽤 많이 진행된 지금, 마력 구속구와 같이 능력을 제한하는 도구가 그런 일을 막아주고 있긴 하지만, 어디든지 구멍은 있는 법.
전 세계적으로 따지자면 이러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음... 아기는 그대로 병원에 맡겨졌고 그 이후로는 딱히 들은 건 없네. 아. 그 부모는 완전히 치료됐다는 건 들었던 거 같아.”
“음... 병원의 이름은?”
“뭐였더라...”
상당히 오래된 일이었기에 기억을 되짚는 세리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세이버 병원? 세이...세이 뭐였는데?”
“...세이비어?”
“아! 맞아! 세이비어 병원이었어. 6년쯤 전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들었지만.”
“세이비어라...”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천무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지며 진우에게 말을 걸었다.
“보스. 설마.”
“아마 그놈들이 맞을 것 같다.”
“미친 테러리스트놈들이...!”
민간에서는 완전히 지워져 지금에 와서는 가디언의 최상부, 혹은 각국 정부의 최상부만이 알고 있는 이름.
약 40여년 전, 인간은 바이러스, 초능력자는 그 백신이라는 광기로 인해 만들어진 차별주의자들의 테러 집단.
Savior of end.
종말의 구원자.
만들어지고 고작 5년여 만에 전 세계를 위협하는 조직으로 성장하고 가디언이라는 범국가적 조직이 생겨나게 한 원흉.
그리고.
“내가 일본에서 부순게 그들의 총본부였지.”
천무진이 감옥섬에 투옥되게 만든 원흉이기도 했다.
“그렇군. 그놈들이라면 내 가족에게 그딴 짓을 벌이는 것도... 가능하겠어.”
어느새 진우의 뒤로 다가온 천무진이 끔찍한 살기를 흘리며 SOE의 이름을 되뇌었다.
“SOE 놈들이라면 동기도 확실하겠지...”
그들의 촌본부를 부순 가디언의 가장 앞에 섰던 것이 천무진이었으니 SOE가 천무진의 가족에게 복수할만한 동기로는 충분했다.
“응? SOE가 왜 나와?”
진우와 천무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리나가 당황하며 물었고, 진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천무진의 가족의 일을 설명했다.
“진짜 그놈들이라고!?”
“그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놈들의 정식 명칭은 Savior of end. 줄여서 SOE다.”
“그리고 그 병원이 SOE에서 운영했던 곳일 가능성이 높다고...”
“세이비어라는 병원의 이름. 천무진의 가족이 중독된 독과 같은 증상의 초능력을 확보했다는 네 말. 심증으로는 충분하지. 그놈들이라면 천무진에 대한 복수심도 충분할테고.”
천무진은 대외적으로는 죽었다 알려졌기에 향할 곳 없는 복수심이 그의 가족에게 향했다고 보면 앞뒤가 맞았다.
“일단 그 병원의 정보를 부탁해도 괜찮나?”
“음...”
세리나는 슬쩍 웃으며 진우를 바라봤다.
“원래라면 회색 마탑의 사전에 공짜는 없지만...”
뭔가 행복한 표정으로 스위트룸에 배치된 간식들을 먹고 있는 최유나를 바라보고는 세리나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값을 받았다고 쳐줄게.”
“고맙군.”
“정말로 고맙다.”
진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고, 천무진은 꽤나 깊게 허리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것을 보던 세리나가 다시 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보니까 원래의 목적은 뭐였어?”
“공간 확장 케이스와 몇가지 교란용 도구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유나를 구해준 걸로 퉁치려고 했고?”
“아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진우의 모습에 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최유나는 내 필요에 의해 구한거다. 그것에 대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어.”
“흐음~ 그럼 값은 그냥 돈으로?”
“아니. 아직은 자금이 넉넉지 않아서. 대신. 한가지 정보를 주고 값을 치를 생각이었다.”
“정보?”
가디언과 일부 정부의 정보 조직을 제외하면 회색 마탑의 정보력은 꽤나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회색 마탑의 주인을 앞에 두고 정보로 값을 치르겠다는 진우의 모습에 비웃기는커녕, 세리나 블로섬의 표정에는 굉장한 흥미가 떠올랐다.
“무슨 정보? 참고로 우리는 질 낮은 정보는 취급안하는거 알지?”
“아! 으이 어흐 우히하히하!”
(야! 우리 보스 무시하지마!)
“...쟤는 일단 무시하고. 아무튼.”
입 한가득 달콤한 간식들을 우겨넣고 소리치는 최유나의 모습에 가볍게 실소한 세리나가 진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음... 듣고나면 물러나지 못할거다.”
“헤에, 세게 나오네?”
씨익 웃은 세리나가 어디한번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진우의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런 세리나의 모습에 진우가 손가락 세 개를 들며 말했다.
“회색 마탑에는 셋의 파벌이 존재하지.”
“...갑자기 불쾌한 얘기를 꺼내네?”
“일단 들어봐라.”
“...”
진우의 말에 살짝 표정을 찡그린 세리나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계속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세개의 파벌 중, 하나는 세리나 블로섬. 당신의 파벌. 가장 강하고, 큰 파벌.”
진우가 허공에 그림자를 이용한 그림을 그리며 계속해서 설명했다.
“다른 하나는 당신이 탑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 탑주 후보, 설리번 그레이의 파벌. 당신의 파벌과 대립하는 파벌로 벌써 수년 동안 서로를 견제하고 있고.”
“...잘 아네.”
조금 불편해 하면서도 말을 끊지는 않는 세리나의 모습에 진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탑주, 스티브 레이몬드의 파벌. 당신의 파벌과 설리번 그레이의 파벌을 중재하는 역할로 알려져 있는 일종의 중립 파벌.”
세리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진우가 자신이 허공에 그려놓은 세 개의 파벌 그림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했다.
“내가 줄 정보는 세 개의 파벌 중, 중립 파벌에 대한 정보다.”
“부탑주의?”
그림자로 만들어진 그림은 천천히 움직이며 세 개의 파벌 외, 네 개째의 무언가를 그려냈다.
그려진 것은 지구본의 중앙에 화려한 은빛 방패가 새겨진 하나의 문장 문장.
“저건...”
“스티브 레이몬드의 중립 파벌의 뒤에는 가디언이 있다.”
“...뭐?”
가디언 총본부를 뜻하는 문장이 스티븐 레이몬드의 중립 파벌과 겹쳐졌다.
“...”
아무 말 없이 허공에 그려진 그림을 보던 세리나가 시선을 내려 진우를 쳐다봤다.
“거짓말.”
“내가 정보의 진위를 증명해야 할 필요성은 없지. 이건 거래가 아니니까.”
“...”
“그러게 물러나지 못 할거라 말했다만?”
여유롭게 말하는 진우의 모습에 예의 무감정한 얼굴로 돌아온 세리나가 입을 열었다.
“동등한 거래라면 진위를 증명해준다는 말인가?”
“그렇지.”
“...필요한 건?”
“지금 당장은 없군. 굳이 따지자면 동등한 입장에서의 적극적인 협력?”
“...”
‘데빌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구나...’
씨익 웃는 저 얼굴이 진짜 얼굴이 아님을 알면서도 일단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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