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이클립스(1)
‘빌런’이라고 하면 보통 악인(惡人)과 같은 범죄자를 생각한다.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빌런은 자신의 이득, 강함, 쾌락과 같은 것을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족속 들이니까.
하지만, 그런 자들만 모여 ‘템페스트’와 같은 거대 조직을 꾸릴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였다.
“대화입니까?”
“네. 최근 가장 핫한 ‘빌런’이시니까요. 이제는 저희 동맹인 ‘이클립스’의 보스이시기도 하고.”
템페스트는 단순한 빌런 조직이라고 하기보다는 반정부 단체에 가깝다. 최근에는 정부와 가디언이 같다고 보는 자들도 많으니, 더 나아가 반 가디언 단체라고 해도 좋을거다.
하지만, 템페스트는 결코 가디언과 정면에서 대립하지는 않는다.
“그 가디언에 싸움을 건 사람이기도 하고요.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꽤 멋지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디언이 더 강하니까.
“도민경님은 가디언을 싫어하시는 겁니까?”
“가디언을 좋아하는 빌런도 있을까요? 저는 일단은 템페스트의 ‘아가씨’니까요.”
“음...”
그런데, 지금 진우의 눈앞에 있는 여성, 도민경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민준은...’
진우는 슬쩍 눈을 돌려 도석환의 곁에 있는 도민준을 바라봤다.
그것을 본 도민경이 진우의 시야를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민준이는 오지 않을 거에요.”
“...”
“민준이는 야망이 없거든요. 안전 제일 주의라고 해야하나?”
도민경은 진우의 앞자리에 털썩하고 앉으며 잔을 들었다.
“꿀꺽꿀꺽. 캬아아! 민준이는 능력이 있고 다 좋은데 현상 유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거든요.”
“...도민경님은”
“편하게 말해도 돼요.”
“...도민경님은 다르다는 겁니까?”
“흐음~”
여전히 님을 붙이는 진우의 모습에 콧소리를 낸 도민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이가 온건파라고 하면 저는 강경파 정도겠죠. 십년이 넘도록 지속해 온 정부와의 대립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정부를 무너뜨리고 싶은 겁니까?”
“네? 아하핳. 아니에요. 절대 아니죠.”
다시 잔을 들어 맥주를 들이킨 도민경이 진지한 눈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저는 저희 템페스트가 더 위로 올라가기를 바랄 뿐이에요. 정부를 무너뜨리는건 하수나 생각할 일이죠.”
“하수라...”
도민경을 떠보기 위해 정부를 들먹인 진우였지만 되로 하수 취급을 받아버려 피식 웃음을 짓는 진우였다.
“그래서. 그 위로 가기 위해 저와 대화를 원한다는 겁니까?”
“대화는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진짜로 그냥 대화를 원하는 거에요.”
“그냥 대화라...”
이게 얼마나 의미 없는 얘기인지 잘 아는 진우로서는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당신의 목적은 뭔가요?”
“...”
“목적 없이 움직이는 사람, 아니 생명체는 없어요. 한낱 동물조차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인간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목숨조차 거는 동물이죠.”
눈을 빛내며 말하는 도민경의 모습이 도석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
“제 예상으로는 가디언을 무너뜨리는 건 아닐 것 같아요.”
“...”
진우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도민경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럴꺼면 그냥 비교적 전력이 약한 가디언 코리아의 지부를 박살내고 다녔을 것 같거든요. 낮의 정보력과 행동력을 보면 그리 무리라고 생각되지도 않고.”
“...”
“그런데도 가디언 코리아의 비리를 건드리고 저희에게 그놈들의 비자금 장소를 알려주는 이유가 있을텐데...”
악마 가면 속,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보는 도민경의 시선에 진우도 피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만약 그 비자금이 가디언 코리아만의 비자금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비자금도 섞여있는 거라면?”
“...”
미소를 짓는 도민경의 얼굴과 몸이 점점 진우 쪽으로 기울어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최종 목표는 잘 모르겠지만, 일차적인 목표로 저희를 이용해서 한국 정부랑 가디언 코리아의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거죠?”
“...”
흔들림 없는 진우의 눈. 하지만, 그 속에서 뭔가를 봤는지 도민경의 양쪽 입가가 올라갔다.
“정답인 모양이네요.”
“후우...”
“후후. 눈이 흔들리지 않아도 동공이 수축되는 걸 조절할 수는 없잖아요? 어릴 때부터 특기였어요.”
“...”
아무리 가까워도 동공이 수축되는 것을 보통의 인간이 판별할 수 있을리가 없다.
때문에 진우는 도민경이 시각계 능력이 있다고 예상했다.
“정답이라고 하면 어떻게 할겁니까.”
“저는 야망이 큰 여자에요.”
“...?”
도민경이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제자리로 돌리고 다시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저희를 이용하는 건 조금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제안은 먹어야 하는 게 맞는 제안이었죠.”
“...”
“어차피 서로가 윈윈인 상황. 뭘 따로 할 생각은 없어요.”
도민경이 잔 속의 남은 맥주를 원샷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얘기하죠. 아버지께 제가 하고 싶다고 할거거든요.”
“네?”
“비자금 터는거요.”
“...그걸 직접 하신다고요?”
“그럼요. 저희는 철저한 능력 우선이거든요.”
허리를 숙여 진우의 귓가에 입을 댄 도민경이 속삭였다.
“확실한 후계자가 되려면 몸을 사리면 안되잖아요?”
“...”
다시 허리를 편 도민경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즐거운 대화였어요. 그럼 다음에 다시.”
그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후우.”
홀로 남은 진우가 자신의 뒷목을 매만졌다.
“역시 템페스트인가. 방심할 수가 없군.”
도민경의 추측대로 이번에 진우가 템페스트에 넘긴 자료는 가디언 코리아의 비자금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가디언 코리아, 인사 본부장 이성규의 비자금 절반과 국회의원 3명의 비자금이 함께 잠들어있는 장소였다.
“도민경이라...”
점점 멀어져가는 도민경을 바라보던 진우가 가면의 아래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네.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다른 목적은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진우였다.
***
템페스트에 자료를 전해주고 동맹을 맺은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저거 맞지?”
“네. GK은행 울산 동구 지점. 저곳이 맞습니다.”
“흐음...”
도민경과 그녀의 라인에 선 템페스트의 조직원들이 GK은행이 보이는 한 카페에 앉아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울산 동구에 세운 은행이라...”
“왜 이런 지방에 가디언 직속 은행이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비자금을 숨기는 곳이었군요.”
“생각보다 경비가 많아.”
“이클립스의 자료를 보면 은행 지하에는 더 많을 거랍니다.”
“흐음~”
도민경이 커피를 홀짝이며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GK은행을 바라봤다.
“시작까지 얼마나 남았어?”
“어...이제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애들은?”
“전부 대기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좋네. 그럼 우리도 준비하자.”
“예.”
도민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 명의 조직원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에서 나온 네 사람은 GK은행을 등지고 CCTV를 신경쓰며 인적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미끼는?”
“토박이 조직으로 준비해 놨습니다. 지역에서도 소문이 안 좋은 양아치들이라 저희와 연관 지을 수는 없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한번 더 흔적을 지우라고 해.”
“알겠습니다.”
한 조직원이 매고 있던 가방에서 체형을 특정할 수 없게 만든 특수복과 가면을 꺼내 착용하니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모습이 되었다.
“아아. 음성 변조 되고 있지?”
“완벽합니다.”
“좋아. 그럼...”
콰아앙!!!
조금 떨어진 GK은행의 방향에서 폭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
“이제 시작 했겠군.”
서울, GK은행 본점이 보이는 높다란 마천루의 옥상.
두 개의 뿔이 달린 악마 가면을 쓴 진우와, 왼쪽 이마에 뿔이 달린 가면의 최유나. 그리고 오른쪽 이마에 뿔이 달린 천무진이 GK은행 본점을 내려보고 있었다.
“보스. 템페스트를 미끼로 써도 되는건가?”
“양동작전이라고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사전에 얘기가 안된 양동은 그냥 미끼일텐데...”
“에이~ 아재. 보스가 어차피 그쪽에 피해는 가지 않는다잖아. 문제없을 거야~”
“음...”
걱정이 되보이는 천무진과 아무런 걱정도 없어보이는 최유나의 모습에 진우가 실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쪽으로 향한 전력은 금방 이쪽으로 돌아올 거다. 우리는 그 전에 빠르게 치고 빠지면 되고.”
“아무리 그래도 본점의 경비는 꽤나 심할텐데.”
“우리 세 명이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지금 가디언의 상급 요원들은 우리가 감옥섬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바쁠테니까.”
진우는 조심씩 소란스러워 지는 GK은행 본점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클립스’라는 이름을 지었으니 알려야하지 않겠어?”
“압도적 동의~”
“그건 맞지.”
후우웅!
살짝 소란스럽던 GK은행 본점에서 급하게 나온 요원들이 비행 능력을 통해 어디론가 날아가고, 비행 능력이 없는 자들은 대기하던 차량에 탑승해 신호를 다 무시하며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20분 뒤에 진입한다. 작전시간은 딱 15분. 그 이상은 안돼.”
“오케이~”
“알았네.”
진우의 말에 최유나와 천무진이 각자의 방법으로 몸을 풀었다.
“감옥섬이랑은 다르니까 웬만해서는 사람을 죽이지 마라.”
“움... 먼저 덤비는 애들은?”
“위험할 것 같지 않으면 죽이지 마. 빠르게 이름을 알리려면 생존자가 많아야 돼.”
“알았어. 보스.”
현금 보유량, 추정 2000억원. 하지만 그 밑에 쌓인 정치인과 가디언 임원들의 비자금만 추정 수조원.
진우가 노리고 있는 것은 그 비자금이 아니라 GK은행 본점 금고에 잠들어 있는 하나의 서류였다.
그것을 위해 비교적 위험이 적게 털 수 있는 울산 GK은행의 정보를 템페스트에 넘기고 그것을 이용해 본점에서 약간의 병력이라도 빠져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슬슬. 20분인가.”
지금쯤이면 서울 가디언 코리아 본사에서도 상당량의 요원이 울산으로 향했을 터.
더 길어지면 템페스트가 위험해 질테니 지금이 적기였다.
“최유나.”
“오~케이!”
드드드득!
최유나의 손짓에 GK은행 본점 상공에 거대한 고드름이 생겨났다.
“위치 틀리지 마라. 본점 앞의 도로 정중앙이다.”
“알고 있엉~”
약간의 시간을 소모해 날카롭고 단단해진 고드름이.
“가랏!!”
부우우웅!!!
중력의 힘과 최유나의 마력의 힘을 받아 운석처럼 낙하하여.
“어어어??”
“저,저게 뭐야!?”
“피,피해!!!”
콰아아아아앙!!!
GK은행 본사의 앞. 도로 정중앙에 내려꽂혔다.
“명중~!”
“가자.”
즐거워 하는 최유나의 음성을 뒤로하고 진우가 그대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힝. 너무해.”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최유나가 진우의 뒤를 이어 뛰어내리고.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군.”
고래를 절레절레 저은 천무진 또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
서울 GK은행 본점, 경비 팀장은 울산에서 온 지원 요청에 경비 인력이 빠져나갔음에도 큰일은 없을 줄 알았다.
오늘도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끝날 줄 알았다.
“콜록콜록! 1팀! 무사한가!”
“다,다리가!!”
“티.팀장님! 영식이가 의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굉음과 함께 두꺼운 콘크리트와 철벽으로 만들어진 금고실의 천장이 무너지며 평화롭던 일상이 박살났다.
후우우웅. 툭. 톡. 콰아앙!
무너진 천장에서 내려온 세 명의 악마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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