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동유럽에서 플렉스
진욱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경유해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흐음~ 처음 와 보는데 분위기 나쁘지 않네요?”
루마니아에 온 진욱의 첫 감상평이었고, 옆에 있는 김인규 비서실장이 수많은 피켓을 보면서 하나를 발견했다.
“회장님, 저기인 것 같습니다.”
“아! 그렇네요?”
이미 진욱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많았고, 그들 중 한글로 [하진욱]이라 쓰인 피켓을 든 쪽으로 갔다.
진욱과 아성그룹 비서실 임원들이 갔을 때, 피켓을 든 백인 여성이 진욱을 향해 물었다.
“미스터 하?”
“네, 맞습니다.”
“총리비서관 엘레나 이네스쿠라고 합니다.”
40세 전후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금발 여성은 진욱에게 인사하면서, 다른 보좌관들과 함께 진욱의 가방을 받고서 차에 탔다.
“총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관저로 갈 겁니다.”
“네, 오래 걸릴까요?”
“빠르게 도착합니다.”
루마니아는 이원집정제 정치 시스템을 도입하여, 대통령과 총리가 같이 국정 운영을 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일단 총리를 만나서 진행할 프로젝트에 대해서 김인규 실장과 같이 논의했다.
그리고 총리 관저에 도착한 진욱은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루마니아의 총리를 만났다.
“루마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네, 아주 좋은 곳입니다. 하진욱이라고 합니다.”
총리 크리스티안은 약간 벗어진 머리에 백발이 성성한 게 인상적이었다.
커피가 나온 이후로 본격적인 사업 논의를 위해서 김인규 비서실장이 관련 자료를 꺼냈다.
“먼저, 저희가 두성중공업 부쿠레슈티 공장을 인수한 뒤로, 루마니아에 추가 투자를 하려고 합니다.”
“아주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현재 우리 루마니아에는 IT 기업과 더불어 수많은 다국적 기업의 공장이 있습니다.”
“먼저 법인세와 관세 규정에 듣고 싶습니다.”
“하하하, 네. 자료 준비하겠습니다.”
크리스티안 총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바로 오는 보좌관들.
그리고 거기에서 다양한 기업 유치에 대한 법에 대해서 소개를 받았을 때, 미리 숙지한 내용 그대로 나오는 것에 대해 미소를 지었다.
특히 진욱이 관심을 보인 것은 ‘투자 유치 현금 인센티브 지원책’이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르게 루마니아는 다국적 기업의 투자 유치를 받으면서, 현금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가 있다.
어차피 그렇게 받는 금액도 바로 투자로 갈 것이니 진욱에게 있어서는 현금 보조 같은 꿀 같은 법안에, 웃으면서 사업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후에 대통령과 같이 출장 갔다는 다른 장관과 투자청장도 만나뵈려고 합니다.”
“하하하, 네. 천천히 만나 보시지요. 다들 저와 같은 당의 사람들이라 좋은 친구들입니다.”
한국과 같이 거대 양당으로 운영하는 곳이라 그런지, 같은 당 소속이라면서 다른 인물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총리였다.
이후 오찬 시간에 루마니아의 전통 요리들로 대접을 받았고, 푸짐한 식사를 먹은 뒤로 진욱은 첫날을 아주 잘 보냈다.
* * *
위이잉- 위이이잉-
기기기기긱- 삐- 삐-
부쿠레슈티에 위치한 두성중공업의 선박 부품 공장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내부에 있는 중공업 기계들은 전부 치워 버리고, 천장에 놓인 호이스트로 잡동사니가 된 폐철들을 나르면서 내부 청소에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두성중공업 루마니아 공장을 맡은 박진국이라고 합니다.”
“아성그룹의 김인규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하진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진욱이 직접 악수하려고 했는데, 김인규가 진욱을 소개하고, 인사를 받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안전모를 받고서 주변을 둘러볼 때, 진욱이 요청한 것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내부 청소 이후에 컨베이어 기계까지 들여올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주문한 기계는 언제 옵니까?”
“독일에서 사료 생산에 필요한 기계들이 다음주 월요일에 도착합니다. 그 전까지 저희가 이곳을 오픈 전으로 만들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뒤에서 듣고 있던 진욱이 박수를 치면서 잘 돌아가고 있는 공장에 대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공장 주변을 둘러보면서, 추가 확장을 준비할 부지 계약까지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여기에 관사 하나 추가로 짓고, 사무실에다가, 사업소까지 정식으로 운영하려면 꽤 그럴듯하겠네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향후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 루마니아가 시작이고, 이후 다른 국가에도 공장을 늘려 나가면서 해외 사업부의 규모가 커지면 유럽 사업부의 분할도 가능할 겁니다.”
진욱이 말하는 것에 따라 김인규 실장은 큰 그림에 디테일을 붙이면서 이야기를 맞췄다.
“아무튼 오늘 기획안 보고서 둘러보니 잘될 것 같습니다.”
“회장님, 이후에는 비서실에 맡기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진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에게 보고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김인규 비서실장이었다.
“앞으로 회장님 역시도 만나는 분들에 대한 위상을 맞추시는 것이 더 그룹의 이름을 더 높일 수 있을 겁니다.”
“너무 목에 깁스 찬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나름 청년 사업가라는 타이틀이 있는데요.”
“물론 회장님의 그런 이미지로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이후 그러면 어중이떠중이까지도 일일이 회장님에게 달라붙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흐으음.”
“주제넘은 말이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전직 삼정맨 출신이어서 그런지, 의전이나 회장님에 대한 관리를 딱 그 스타일로 진행하는 김인규 실장.
물론 그러면서도 중간에서 실무를 기가 막히게 처리해서 2인자로서 확실히 굳히는 능력도 있었다.
“뭐, 좋습니다. 한번 실장님에게 맡겨 보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렇게 돼서 진욱은 루마니아의 투자청장과 장관을 만나 논의하는 것 외에 남은 스케줄에서는 그냥 주변 관광이나 하기로 했다.
* * *
“의외로 볼거리가 많네?”
진욱은 남는 시간 동안 부쿠레슈티 관광을 다녔다.
동유럽이라고 해서 현지 언어를 하는 가이드와 비서실 직원들을 대동했는데, 의외로 영어도 잘 통하는 곳이었다.
“와인도 괜찮고.”
“루마니아는 유럽 내의 5대 와인 생산국입니다.”
“오, 그래요?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만 생각했는데, 한국에 가서도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진욱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고급 호텔에서 와인과 루마니아 전통 요리의 만찬을 즐겼다.
그 뒤로 왕궁이나 정교회 성당 등의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와중에 실제 협상은 저녁마다 김 실장의 보고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김 실장은 모든 계약을 아성의 우위로 확실하게 처리했고, 덕분에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지는 진욱이었다.
그리고 그날 역시도 관광을 위해서 진욱이 다닐 때였다.
“오-”
진욱은 주말에 있는 서커스 공연을 보고서 흥미를 보였다.
“이런 건 오랜만에 보네?”
진욱이 마지막으로 서커스 공연을 봤던 것이 국내에 내한 왔던 태양의 서커스였는데, 지금의 아내인 세화와 데이트 때 봤던 것이었다.
진욱이 VIP석에 자리 잡고서, 근처에 비서실 직원들을 대동했을 때, 오프닝부터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진욱은 어린아이같이 좋아하면서 연신 박수를 쳤고, 화려한 서커스에 이어서 다음에 나오는 것은 동물 공연이었다.
“옛날 만화 보는 것 같네. 덤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코끼리들이 축구를 하고, 불 고리 속에서 사람을 태우고 뛰어넘는 풍성한 갈기의 숫사자, 야바위같이 컵으로 이리저리 돌리면서 안에 있는 주사위를 찾는 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이 있었다.
진욱은 그것을 보면서 출장 와서 세상 편한 관광을 즐겼고, 2시간에 걸친 공연이 끝났을 때, 다음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호텔 숙소로 돌아가려는 순간, 못 볼 것을 봐 버렸다.
“Nu! Nu!”
“……!?”
짜악-
뿌우우우-
진욱은 어디선가 들리는 채찍 소리와 짐승의 애달픈 울음소리에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에서 본 것은 참혹한 현장이었다.
짜악-
[푸르륵- 푸-]
나이 든 백인 사육사가 채찍을 들더니 쓰러져 있는 코끼리를 상대로 마구 때리고 있었다.
주변에 다른 코끼리들이 서성거렸지만, 그들의 다리에는 쇠사슬이 굳게 걸려 아예 저항할 의지가 꺾인 지 오래였다.
코끼리뿐만이 아니었다.
녹슨 철장 안에서 원숭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마구 날뛰었고, 그 옆에는 사자를 붙여 놔서 그것들을 잡아 먹으려고 이빨을 들이댔다.
“미친, 저거 뭐야?”
“서커스 사육사들 같습니다. 훈육이 조금 심한 것 같지만…….”
“훈육이요? 저게? 학대가 아니라?”
진욱은 그 꼴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때 동행했던 루마니아 가이드가 황급히 달려가서 제지했다.
“오이! blocare(멈춰)!”
“……!?”
그가 달려가서 루마니아어로 뭐라 뭐라 말할 때, 채찍을 든 사육사는 진욱을 한 번 슬쩍 보더니 피식 웃고는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콰앙-
“왓?!”
서커스단장은 갑자기 들어온 동양인을 보고서 당황한 얼굴이었다.
“C,Cine sunteți dumneavoastră?(다, 당신 누구요?)”
“흐음.”
진욱은 바로 소파에 앉아서 조용히 단장을 응시했다.
바깥에 있는 사람을 부르려고 했지만, 이미 진욱의 비서실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다 알린 상황이라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그대로 번역해요.”
가이드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진욱이 입을 열었다.
“나, 한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인데, 오늘 아침에 통계청장하고 총리 만나고 왔소.”
그것에 대해 말하고서 루마니아 정부에서 받은 고위 공직자들의 명함과 자신의 영어 명함을 뽑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게 뻥카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안 서커스단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서커스 공연 재미나게 봤는데, 뒤에서 동물들 데리고 채찍질하는 걸 보고서 기분이 매우 상한 상태야.”
가이드가 말을 하자 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뭐라 뭐라 말했다.
“회장님, 그런 걸 봐서 유감이라고 하지만, 정당한 훈련이라고 합니다.”
“정당? 채찍을 휘두르는 게? 변명할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쇼. 그러면 내가 상황 봐서…….”
탁-
“……!?”
“여기 쓰는 금액에 맞춰 당신 서커스 공연단 사 버릴 거니까.”
가이드가 그 말을 했을 때, 단장의 눈이 확 커지다가 이내 가늘어졌다.
이건 장사꾼이 물건을 팔기 위해 보이는 제스처였다.
“회장님, 안 그래도 재정난인데, 정 그렇다면 동물은 팔 수 있다고 합니다. 가격은 루마니아 동물원 가격에 맞추면 될 거라고 합니다.”
사실 그것도 덤탱이었다.
각종 정부의 이해관계로 인해 법이 까다롭고 거기에 맞추는 금액을 채우는 것인데, 어디서 온지도 몰라 출처도 불분명하고 학대당해 정형 행동을 보이는 동물들을 제값에 사라니.
하지만, 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적어 보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단장이 입맛을 다시면서 금액을 유로화로 적었다.
진욱은 그걸 보더니 조용히 그 앞의 숫자를 1에서 2로 바꿨다.
그 순간 단장의 눈이 다시금 커졌고, 진욱이 번역을 요청했다.
“서커스 공연 하는 사람들도 다 쳐주는 값이야. 단…….”
진욱은 바깥을 한 번 슬쩍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 채찍질했던 사육사 놈하고, 당신 자리는 없어.”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루마니아에서 공연을 잘하던 서커스 팀은 하루 아침에 주인이 바뀌었다.
그리고 동물 공연에 대해서 잠정 중단을 선언한다는 공지와 같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