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하 회장을 만나고 싶다
경기도까지 돌고 온 뒤로 진욱이 향한 곳은 전주였다.
이명헌 경기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간 곳이었는데, 이미 그쪽에서도 연락을 해서 만남의 장소까지 정해졌다.
전주에 도착한 진욱은 가는 김에 주변에 있는 아성펫푸드 대리점 등도 한 번씩 살펴봤다.
직영점과 가맹점이 모두 있는 전주는 매출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빠른 시장 진출로 인해 캐시 카우로서 확실하게 돈줄이 되었다.
“회장님,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가야겠군요. 여기 있는 것 다 계산해 주시고요.”
진욱이 가게 안에 있는 수제간식과 사료들을 계산한다고 하자 화들짝 놀란 가맹점주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아닙니다. 회장님이 오셨는데, 그냥 가져가시지요.”
“그런 말 마세요. 이런 게 다 횡령이고, 배임이에요.”
진욱이 직접 계산하려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비서실장이 와서 바로 준비했다.
“회장님, 제가 결제하겠습니다.”
“……!”
“자, 이걸로 거슬러 주시지요.”
“아이고, 네~ 네.”
진욱은 조용히 그것을 보고 있다가, 사 온 것들을 챙기려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비서실장이 대신 들어서 차에 직접 실었다.
“회장님, 이런 일은 이제 저희를 통해서 하셔도 됩니다.”
올해 나이 쉰다섯에 과거 감사원과 삼정전자 전략기획실 출신인 김인규 비서실장.
그는 대기업 그룹화가 된 아성 내에서 주변 대기업 회장에게 기획 참모 조직의 필요성을 듣고 추천받아 영입한 인물이었다.
“저도 손발이 있고, 지갑이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제는 조금 달라지셔야 할 겁니다. 회장님의 밑으로 30개 계열사와 2만 명의 임직원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예전과 같은 소탈한 모습을 지금도 똑같이 쓰는 것은 자제해 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권위적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저는 아직 마흔도 안 됐습니다. 더 배울 게 많고, 아직도 청년 혜택을 받는 사람이지요.”
“회장님, 나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위상과 책임이 그것을 앞서게 되는 겁니다.”
“흐음.”
“회장님은 전혀 저자세로 나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만날 전북도지사 역시도 얼마든지 우위에 서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칼자루는 이쪽이 쥐고 있습니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 비하면 위상은 약간 떨어질 수도 있지만, 엄연한 민선 광역단체장.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앞선 둘과 다르게 저자세로 나가지 말라는 조언을 하는 김인규 실장의 말에, 진욱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서 오십시오. 전주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오는 길에 각 지점을 돌고 왔습니다.”
진욱은 아까 가게에서 산 사료와 수제간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송일주 전라북도지사에게 선물로 내놓았다.
“도지사님께서도 유기견 캠페인을 하시며, 두 마리를 입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이고, 저희 집 애들이 좋아하겠군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선물 교환 이후로 본격적인 사업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명헌 도지사님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경기도의 공공 배달 앱은 원래 도지사님께서 전북 일대에 시도하신 것이라 들었습니다.”
“하하하, 우리 도가 인구는 적어도 이런 인프라에 노력을 하고 있는 편입니다.”
경기도 주식회사와 전북에서 만든 배달 특급 앱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져 군산시에서 시작해 전주, 익산 등지의 도시권에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제가 알기로는 도내 지역 화폐를 이용해서 공공 배달 앱과 연계해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전북사랑 상품권과 논의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경기도와 같이 협업해서 통합 앱 프로젝트도 구상하고 있고요?”
“맞습니다.”
“저희 또한 투자를 하겠습니다.”
진욱은 바로 자신의 조건을 말했다.
“아성에서 원하는 것은 경기도와 전라북도 내 아성펫푸드와 아성사료 매장이 있는 곳에 지역 화폐와 배달 앱이 연계되는 것입니다.”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도 예산으로도 홍보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진욱은 거기에 대고 다양한 제안에 대해 말했다.
지역 화폐로 쓸 수 있는 홍보 그리고 군산 일대의 수제간식 공장 설립과 군산항을 통한 수출 건에 대한 내용 등이었다.
대부분은 진욱이 주도하면서, 이것저것 요구하는 모양이 되었지만, 전북도지사가 그 모든 것을 승낙하면서 이뤄졌다.
협상이라 할 것도 없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 전라북도청.
그 덕분에 진욱은 폭넓게 전북권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고, 이것으로 잠깐 소원했던 광주와의 관계만 다시 회복한다면, 전남-광주-전북-경기도라는 서해안 벨트를 완성하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인천인데, 쿠폰팡과 바이룽이 그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거기에서 시작할 것이다.
진욱이 전주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김인규 실장이 전화를 확인하고 있었다.
“회장님, 이거…….”
“네?”
“쿠폰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냐고요.”
“……!”
쿠폰팡이 연락했다는 말에 진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교롭게도 진욱이 사업 논의로 쿠폰팡을 들이받을 준비로 전주에서 사업 논의를 하고 왔는데, 돌아오는 대로 보자는 것이었다.
“흐으음. 오늘 말이죠?”
“시간이 있다 하셔도 오늘은 안 된다고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미 저쪽에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거는… 저도 동의합니다. 실장님께서 따로 적절한 시간을 알아봐 주시죠.”
이미 이야기가 나왔으니, 비서실을 통해서 스케줄을 조정하라는 오더를 내렸고,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서울이었지만, 진욱은 쿠폰팡과의 대담은 신경 쓰지 않고서 아내를 위한 태교 선물을 준비할 쇼핑을 했다.
* * *
“자, 이건 이쪽으로… 그렇지.”
그사이 진욱은 처가에서 말한 대로, 청담동에 구매한 새 저택으로 짐을 옮기고 있었다.
“이사 잘돼요?”
“아, 왔어?”
둘째를 가진 세화가 아들 은준이의 손을 잡고서 이삿짐을 나르느라 분주한 집을 바라봤다.
“저번에 왔다 갔는데도 아직 실감이 안 나네요.”
“전의 집보다 두 배는 크니까 고용할 사람도 많을 거야.”
“그거는 어머니가 추천해 준대요. 이런 일 전문적으로 하는 가정부가 있다고.”
이제는 다른 재벌들과 같이 고용인도 많이 쓰고, 아파트가 아닌 대저택에 집무실을 두고서 움직일 수도 있었다.
특히 진욱이 강조한 서재는 자택 근무로도 그룹 내 모든 계열사를 컨트롤할 수 있게 만든, 그만의 승지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녁까지 되어 이삿짐이 모두 옮겨지고 청소까지 마쳤을 때, 진욱은 업체 관계자에게 두둑한 금일봉을 주고서 싱글벙글한 얼굴로 새 집에 들어갔다.
“와아아!”
“은준이, 뛰지 마!”
세화가 방방 뛰는 아들을 붙잡으러 쫓아갔고, 진욱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으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딱 12년이네…….’
작은 중소기업 공장의 외아들로 태어나 정신없이 달려서 온 지금.
이제는 어엿한 대기업 재벌의 총수로서 수만 명의 임직원을 두고 조 단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새 집에서 편하게 지내려고 할 때였다.
“여보, 밖에…….”
“음?”
새 집을 만끽하면서 소파에 누워 태블릿으로 최근 프로젝트에 대해 확인하던 진욱은 세화의 말을 듣고서 인터폰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곳에는 종이봉투를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중년 남성이 있었다.
“아니…….”
“누구예요? 아는 사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긴 하지만…….”
그는 진욱을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연락했던, 쿠폰팡의 오너 스티브 김이었다.
* * *
“이사 선물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진욱이 출장에서 복귀하는 길에 만나자고 제안을 했던, 쿠폰팡의 오너 스티브 김.
그는 그때의 거절 의사를 통해 추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나, 진욱의 이삿날에 맞춰 고급 와인을 가지고 이렇게 찾아왔다.
“캘리포니아에서 아주 이름난 와인입니다. 한국에는 들어온 게 몇 병 없어서 생소한 맛이기도 할 겁니다.”
“와인이라… 예전에는 많이 먹었는데 말이죠.”
“그렇습니까? 어느 쪽을 좋아하십니까?”
“흐음, 구대륙산 중에서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쪽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럼 이건 이탈리아제 포도로 재배한 것이니 입에 맞으실 겁니다.”
이곳에 오면서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진욱의 기분을 풀어 가는 스티브 김.
그 와중에 세화가 가정부들을 급히 다시 불러서 술상을 준비하게 했다.
그렇게 갑작스럽지만 술자리가 만들어진 자리에서 스티브 김은 와인 이야기 다음으로 본격적인 사업 이야기를 논했다.
“이번에 물류 터미널 건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호~ 이번 일이 오해요?”
“의도적으로 아성사료를 패싱 한 게 아닙니다. 아성사료는 국내 넘버 1의 사료 회사, 특히 미국에서도 그 네임 밸류가 퍼진 상황이지요? 하하하!”
스티브 김은 미국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2세대 재미 교포였다.
이후 미국에서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소셜 커머스 쿠폰팡을 창립하여, 세계적인 IT 기업의 투자를 받아 지금은 1만 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한 대기업의 오너였다.
아직 상장은 안 됐으나, 그들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 준비를 하고, 예상 시가총액이 300억 달러가 넘을 거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었다.
“그저 물류 터미널에 대한 임대료를 조정하는 선에서 끝내려고 했습니다.”
“유감이군요. 어쨌건 저희는 다른 기업과 거래를 맺었고, 곧 독립적인 물류 터미널을 만들 계획입니다.”
“그 또한 들었습니다. 안성시 쪽에 짓는다고요?”
“네, 그런데요?”
“저희가 그 물류 센터에 투자하겠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
진욱의 얼굴에는 ‘이제 와서?’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갑작스럽게 따로 보자고 한 다음에, 직접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런 제안이라니, 상상도 못 했었다.
“패배 선언이라도 한다는 겁니까?”
“오~ 오~ 처음부터 싸운 적이 없는데, 어째서 패배입니까? 그냥 그동안에 대해서 다시 합의를 하자, 이겁니다.”
“바이룽하고 같이 손잡고서 펫푸드 딜리버리를 준비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바이룽 역시 포함이 될 겁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오픈 마켓과 딜리버리 사업, 어느 쪽이든 편향 없이 모두 팔 수 있습니다.”
이제와서 진욱이 준비하는 사업에 대해서 그냥 다 같이 하자는 말.
만약 예전의 아성사료 대표 시절의 하진욱이었다면, 분명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진욱은 지금의 제안으로 인해 내부에서 뭔가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석연찮은 점도 많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오너가 직접 와서 자기 약점을 드러낼 일은 없지. 이거 뭔가 함정이거나, 아니면 뒤늦게 계산기 두들긴 게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어느 쪽이 됐건 기묘한 상황에서 스티브 김은 진욱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회장님, 지금 바로 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