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매우 간단한 답
진욱은 박경학 전무에게 전권을 맡기고 TF팀을 꾸릴 수 있게 했다.
얼떨결에 대형 프로젝트를 맡게 된 박 전무는 놀라기는 했어도, 회장의 푸시로 인해 이걸 실수 없이 진행하기 위해 에이스 임직원들을 모집했다.
진욱은 그 와중에 신형 카드 디자인을 두고서 펫케어 팀에 연락해 모델 견종에 대한 사진을 금융팀에 지원하도록 했다.
그 와중에 진욱이 하는 일은 큰 그림을 지시하고, 전문경영인 임원들이 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를 받고, 결재 사인을 해 주는 일 등이었다.
알아서 잘 진행되는 회사 시스템을 두고서 진욱은 예전과 달리 한발 떨어져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고, 다음 주에는 제주도 출장이 있었다.
물론 출장은 구실이고 가족들이 전부 가는 놀이겠지만 말이다.
* * *
따악-
경쾌한 아이언 소리와 함께 진욱이 때린 골프공이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갔다.
그 뒤에서 캐디와 같이 온 일행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젠 골프도 수준급이구만.”
“배워서 익숙해지니 확실히 재밌긴 하네요.”
오랜만에 만난 형님 김규완과 제일식품의 이용철 등과 같이 골프 투어를 온 진욱이었다.
“아주 예전보다 더 여유로워졌어?”
“하하하, 그런가요?”
“다음 필드로 가지. 카트에 타라고.”
셋은 계속 필드를 돌면서 능숙한 골프 실력을 보였고, 한 게임 뛴 뒤로는 클럽하우스에 도착했다.
시원한 차를 마시면서, 그들은 최근 사업에 대한 논의를 나눴다.
“이번에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이렇게 초대한 거야.”
“부탁이라, 형님이요?”
“그래.”
김규완이 부탁할 게 있다고 하자 이용철과 진욱 모두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규완은 아이스티를 마시면서 지금 대화그룹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에 우리 회장님이 서울상공회의소장 후보로 참여하셔.”
“…아!”
“흐음, 그 자리라면…….”
서울상공회의소.
대한상공회의소 산하에 있는 법정 경제 단체로 현재 가장 경영인 모임에 실세라고 불리는 대한상공회의소의 직계 회의소였다.
지난날 ‘국정 농단 게이트’로 인해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한 전경련에 이어 실질적인 업무는 대한상공회의소가 도맡았다.
특히 재계 오너들이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았는데, 서울상공회의소장에 오른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대표를 겸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다.
“이번에 김 회장님이 상공회의소 회장을 노리신다는 말이군요.”
“지금 회장이 두성그룹 박 회장이던가?”
두성그룹은 재계 서열 15위의 종합 기업집단이었다.
20개의 계열사 중에서 주력 사업은 건설업과 중공업인데, 최근 오너가 바뀐 이후로 기존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서울상공회의소 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박 회장 이후로 다음 자리를 노리는 것은 대화그룹의 김승열 회장.
진욱에게 있어서는 처백부 어른이고, 사실상 같은 집안으로 취급당하는 경향이 있어서 진욱은 김 회장을 지지할 것이다.
“후보는 또 누군데요?”
“KS그룹 최 회장.”
“…오우!”
재계 서열 2위에, 삼정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KS가 경쟁자라고 하자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거라며 혀를 찼다.
“제일그룹도 상공회의소에 내는 후원금이 막대하지 않나요?”
“그, 그렇긴 하죠. 지금 회장님인 큰아버지에게 상임위원 투표권이 있으니까…….”
상공회의소 회장은 간선제를 통해서 투표를 진행하고, 80여 명의 투표권을 가진 임원이 회장을 선별하는 방식이었다.
그 상황에서 재계의 두 거물이 붙는 상황이 되었으니, 어느 쪽이 될 지에 대해서 이목이 집중됐다.
“KS는 반도체와 통신 사업을 중시하는 쪽이고, 우리 대화는 유통과 금융을 중시하는 쪽이지.”
“공통점도 있죠. 둘 다 석유화학 쪽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는 것.”
핵심 계열사에 에너지 산업에 대해서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었다.
진욱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조용히 손을 들었다.
“일단 저와 용철 형님은 각각 투표권이 있으니 김 회장 쪽을 지지하겠습니다.”
“뭐, 저도 여기까지 초대해서 그런 말이 나왔으면 해야죠.”
“하하하, 고마워.”
규완은 오늘 골프 비용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결제했고, 그렇게 물밑에서 표심 모으기에 들어가며 둘의 인맥을 통해서 상공회의소 회장 투표의 빌드 업을 착실히 올렸다.
골프 라운딩이 끝난 뒤로 다음 날에 진욱은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 일대를 돌았다.
제주도의 이름난 맛집에서 식사도 즐기고, 차도 직접 운전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진욱이 향한 곳은 동물원이었다.
뿌우우- 뿌우-
“와~ 은준아, 저게 뭐야?”
“…….”
“은준아, 코끼리! 해 봐, 코끼리!”
세화가 아들을 안고서 제주도에 위치한 테마 동물원 ‘엘리펀트 파크’에서 코끼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엄마, 아빠, 할아버지 정도만 말하는 아들을 두고서 엄마가 하나하나 가르쳐 줄 때, 은준이 입을 천천히 뗐다.
“코끼이…….”
“어머~ 잘했어!”
진욱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전에도 몇 번 왔었지만, 언제 봐도 마음이 안정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제주도와 라오스에 있는 코끼리와 공연팀들을 영입해서 만든 코끼리 테마파크였다.
알록달록한 동남아풍의 옷을 입은 코끼리들이 공을 차거나, 그림을 그리고, 사람을 태워서 공원 일대를 도는 등 동물 곡예와 체험학습관으로 이만한 곳이 없었다.
진욱 가족이 직접 사육사의 안내를 받으며 코끼리 등 위에 있는 의자에 탔고, 처음에는 놀라 울던 은준도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에 신기해하면서 금방 또 좋아한다.
그렇게 오붓하게 가족들과의 여행 중, 진욱은 제주도청의 연락을 받았다.
* * *
“안녕하십니까? 하 회장님.”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하진욱이라고 합니다.”
“앉으시지요. 차는 어떤 걸 드시겠습니까?”
“더운데 시원한 걸로 먹죠. 아이스로 부탁드립니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들어왔고, 도청 안에서 편히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진욱을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제주특별도지사 염희성이었다.
한때 한국미래당의 유망한 대선 후보였으나, 낙선 이후 무소속으로 고향인 제주도에서 선거에 나와 도정 직무수행평가에서 1, 2위를 다투는 우수 지자체장으로 여겨졌다.
“회장님께서 제주에 오셨다는 말에 제가 직접 초대했습니다. 응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 약속이 있어서 출장 왔다가 겸사겸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뭐든지 일을 하면서 오너가 적당히 쉬는 것도 미덕 아닙니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말에 부른 제주도지사는 진욱을 만나서 가벼운 이야기를 하면서 천천히 티타임을 가졌다.
게다가 지금의 진욱은 시가총액 12조의 대기업 회장.
보통 재벌은 유력 대권 후보나, 부총리급이 아니고서야 부른다고 그냥 올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욱은 예전과 똑같이 그냥 편하게 나왔고, 덕분에 염 지사는 연신 감사를 표하는 것이었다.
진욱은 염 지사를 보면서 이 사람이 뭔가 노리는 게 있어서 자신을 붙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양반도 무슨 투자 같은 걸 받으려고 계속 밑밥을 까는 것 같은데?’
그동안 진욱은 중앙 정계보다는 지자체장들과의 교류를 하면서 수많은 사업을 만들어 냈다.
서울시장과는 서울국제 애견박람회 행사로 인한 투자 계약을 했고, 강원도지사와는 동물원과 체험학습관 그리고 보호소 등을 만들어 강원도를 말 그대로 ‘동물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충남도지사하고는 펫푸드 연구소를 만들어 수제간식의 대중화를 이끌어 내는 단지를 만들었고, 경남도지사와 부산시장과는 수의대 유치와 대형 사료공장 인수, 확장을 진행했다.
광주시장과 동물원 인수와 대형 복합 쇼핑몰을 만들어서 ‘하진욱과 만나면 지자체장 치적이 하나 생긴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
아마 제주도지사 염희성 역시도 그걸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제주가 특별자치도로 개편된 이후 경제 다각화를 위해 수많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또 성공했습니다. 혹시 회장님께서는 제주도의 수출품 1위가 뭔지 아시나요?”
“반도체와 IT 기술이죠.”
“하하하, 역시 잘 아시는군요? 대부분은 감귤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염 지사는 껄껄 웃으면서 지금의 제주도 경제에 대해 설명했다.
“현재 제주도에서 가장 큰 수익을 올리는 회사가 제주반도체라고, 팹리스 방식으로 반도체를 설계하는 곳입니다.”
“조세 제한 특례를 잘 사용하셨더군요.”
조세 제한 특례란 수도권에 있는 기업이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갈 시, 일정 기간 법인세를 면제해 주는 법이었다.
덕분에 수많은 기업이 세제 감면 혜택을 위해서 내려왔는데, 그중에서도 테헤란로나 판교에 있던 IT 기업이 특히 제주도에 많이 몰렸다.
“뭐, 저희 역시 특별법에 의해서 많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제주도에도 한번 투자를 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법인세 감면이나 각종 혜택에 대해서는 제가 뭐든지 다 지원하겠습니다.”
‘역시 이거였군.’
진욱은 지자체장이 기업 오너를 부르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출장이라 했지만,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여행을 즐기는데 불러서 투자 좀 해 달라는 제주도지사.
하지만, 딱히 제주에 대한 메리트는 느끼지 못한 진욱이 되물었다.
“제가 뭐, 그것에 대해서 할 게 있을까요?”
진욱이 먼저 기선 제압용으로 ‘구미가 당길 만한 매리트가 없으면 투자할 생각이 없다.’라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염 지사는 빙긋 웃으면서 들고 있던 컵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제가 원래 직설적인 성격이라, 그냥 조건을 바로 말하겠습니다.”
“네~ 그럼 잘 듣죠.”
“먼저 이곳에 투자하실 시, 토지 매입비와 설비 투자 지원금 그리고 사옥과 공장에 대한 건설 비용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웬만한 지자체라면 다 해 줄 법한 일이었다.
“또한 국세와 지방세에 대해서 재산세와 등록 면허세 역시도 전액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확실히 당길 만한 일이었다.
특히 중앙 정부에서 거둬들이는 국가 법인세에 대해서 지자체가 대납을 해 주어 면제 및 감면을 해 준다는 것이다.
“투자 지원금은 얼마나 됩니까?”
“원래 대기업은 5%지만, 아성은 아직 준대기업에서 대기업 올라가는 유예 기간이니 7%까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흐으음-.”
정말 직설적으로 세제 혜택에 대한 조건을 바로 말해 준 염 지사의 말에 진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상황에서 염 지사는 새로운 정보에 대해서도 알려 줬다.
“사실 저희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성에 대해서 공장 설비 투자를 받고 싶습니다.”
“굳이 저희를 말입니까? 그 이유를 알려 주시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요.”
“한때, 중국에서 온 종합 사료 대기업 바이룽과 인연이 많으셨지 않습니까?”
“……!”
바이룽이라는 이름을 참 오랜만에 들은 진욱이었다.
한때 가장 아성펫푸드를 괴롭히던 경쟁자였고, 대만 공장 인수 이후로 사실상 승기를 굳힌 상태였다.
“바이룽 이야기가… 왜 나오죠?”
“바이룽이 제주도에서 지원을 받아 IT 계열사와 펫푸드 공장을 운영했으나, 이전 의사를 밝혔습니다.”
“……!?”
“서해안 쪽의 내륙 도시로 간다고 하더군요.”
이건 진욱도 모르는 정보였고, 지자체장을 통해서 이전 의사를 밝힌 것을 이제야 듣게 됐다.
그 말을 들은 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로 대답했다.
“제주도에 투자… 하겠습니다.”
염 지사는 빙긋 웃으면서 진욱에게 악수를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