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한 발짝 떨어져 지켜봤다
아성금융그룹의 인사 발령은 끝났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융자사업부에서 진욱이 직접 임명한 인물이 정준모라는 말에, 일각에서는 삼정카드나 아토스가 불편해할 거라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진욱의 의지는 확고했고, 결국 정준모가 융자사업부 신임 상무에 임명됐다.
앞으로 그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아성금융그룹의 융자 영업을 적극적으로 할 것이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정장 차림의 정준모 상무가 들어와 진욱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네~ 네~ 앉으세요. 차는 뭘로 준비할까요?”
“하하하, 그냥 물이면 됩니다.”
“그러죠.”
비서가 얼음물을 두 잔 가져왔고, 둘은 소파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확실히 달라 보이시는군요.”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허름한 옷에 흰머리가 그득한 경비에서 바로 깔끔하게 염색을 하고, 정장을 갖춰 입으니 정말 엘리트 금융 맨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정준모였다.
“그래, 첫 출근 하시고 회사에 적응은 잘되십니까?”
“솔직히 기대 이상입니다. 시스템도 완벽하고, 프로젝트도 순조로우며, 직원들 역시도 우수합니다.”
“삼정이나 아토스만 할까요?”
“그에 못지않은 인재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몇몇은 푸시 한다면 눈여겨볼 만합니다.”
벌써부터 내부 임직원까지 스캔을 마쳤다는 말에 진욱은 바로 박수를쳤다.
“칭찬은 다 하셨습니까?”
“네?”
“금칠만 하면 회사에 발전이 없죠. 이제 이 회사의 문제점에 대해 말해 주시죠?”
돌직구로 묻는 진욱의 질문에 정준모 상무는 멋쩍게 웃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한마디를 꺼냈다.
“굳이 있다면야…….”
“네에~ 굳이요.”
“아직 핀테크에 대한 전문 직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호, 그래요? 그렇게 투자를 했는데 말이죠?”
“아니, 투자나 프로젝트 진행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는 것은 역시 전문 앱 개발자입니다.”
“으흠?”
기대 이상의 완벽한 회사라고 했지만, 진욱이 살살 긁으니 문제점에 대해서도 확실히 말하는 정 상무였다.
“먼저 오프라인으로는 융자 전문 행원이 많고, 특히 지역과 융화되어서 그쪽 분야는 전문가입니다. 문제는…….”
“앱 개발자가 있는 온라인 쪽이 문제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은 송금과 간편 결제 서비스를 생각하고, 융자까지 생각하는 건 아직 생소한 개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말인즉슨 오프라인의 그 엄청난 영업력에 비해 온라인 팀은 아직 개발도 미진할뿐더러, 기껏해야 아토스나 카카오뱅크 등의 아류 정도로만 생각해서 상대적으로 달린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대해서는 상무님께 맡기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것은 기획안에 사인을 하고 또…….”
“……?”
“추가로 핀테크 앱 개발 전문가를 영입하는 것이겠군요.”
“아, 네. 그것만 해 주신다면 온라인 팀에 대한 밑그림도 제가 그려 보겠습니다.”
경영에서 그림을 그린다라는 표현이 오늘따라 낭만적으로 들린다고 생각한 진욱이었다.
그렇게 새로 영입한 정준모 상무에 대한 푸시로 진욱은 확실하게 아성금융그룹 내에서 뿌리를 내렸다.
아성금융그룹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진욱이 이 자리에서 큰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영업 역시도 고삐를 단단히 조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또다시 바쁜 출장 스케줄을 가졌다.
* * *
“네, 이것으로 부산대와 아성금융그룹의 수의학 장학금 기증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진욱과 부산대 정만호 총장은 [아성금융그룹 대학 발전 기금/인재 육성 장학금]이라 써진 대형 피켓을 들고 활짝 웃었다.
거기에 맞춰 다른 교수진들이 박수를 치고, 기자들이 모여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기증식 이후로 진욱은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하 대표님, 이제 금융과 사료그룹을 합친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성사된다면 아성은 단숨에 재계 서열 30위의 대기업 집단으로 규정됩니다. 진행하실 겁니까?”
“대표님,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그룹 회장은 누가 맡는 겁니까?”
이미 큰아버지가 은퇴한 이후 정계에 투신하고, 자신이 금융그룹 본부장을 맡아 실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두에게 퍼진 상황이었다.
일부 호사가들은 그를 두고서 삼정이나 현기 초대 회장들의 재림이라고 하는 낯간지러운 기사도 쓰고, 그보다 더 밑의 저질 지라시들은 어째서 아들이 아닌 조카가 상속하게 되냐면서 집안에 대한 별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진욱은 부산까지 따라온 메이저 신문사 기자들이나, 지역지 기자들을 보고서 멋쩍게 웃고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딱 5분만 질의응답 하지요. 그러니까 질서를 잘 지키길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모두들 일제히 외쳤지만, 진욱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가까이 있는 기자부터 하나씩 가리켰다.
물론 대다수는 원론적인 대답이었고, 기자 몇몇이 역시나 큰아버지 상규에 대한 정치 출마 그리고 사촌형인 진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나 모두 조리 있게 넘겼다.
* * *
“후우우-”
짧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호텔 숙소로 돌아온 진욱은 정장 재킷만 벗은 채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벌써부터 이런 상황인데, 과연 3년 안에 통합할 때까지 어떤 사건이 있을지, 또 얼마나 더 언론에 시달릴지에 대한 생각이 이리저리 들었다.
하필 부산에 올 때마다, 언제나 술친구를 하면서 고급 정보를 가져다주던 중안무역 박 사장 역시도 출장으로 인해 없었다.
남은 스케줄은 부산공장 시찰 및 부산 일대의 아성저축은행 지점 시찰 그리고 여기서 확인할 아성사료그룹 인사 이동에 관한 결재였다.
분명 실무에 대해서는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겼는데도, 아직도 최종 결정권자로서 해야 할 일은 똑같은 것 같은 진욱의 삶이었다.
* * *
“네, 고객님. 그러니까 고객 센터에서 스마트폰 앱으로 청구하라는 것을 못 하시겠다는 말씀이죠?”
“나 같은 할마시가 그걸 우예 안다고 서마터폰 야기하는 기가? 그냥 은행원이 해 주면 되잖아?”
“저… 고객님, 계약서상 수수와 이율 추가를 조건으로 폰뱅킹 자동 송금을… 아닙니다. 제게 주세요.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부산 해운대에 있는 제3 아성저축은행.
저축은행은 일반은행처럼 다양하게 지점을 내지 못해, 기존 업체를 인수하는 등의 꼼수로 지역 내 지점을 늘리는 방식이었다.
진욱은 허름한 옷차림으로 찾아가서 노인 고객에게 시달리는 직원들을 봤다.
특히 폰뱅킹 자동이체로 가입했는데 그걸 쓸 줄 모른다면서 냅다 휴대폰부터 내미는 노인을 향해 직접 해 드리겠다면서 하나하나 설명하는 창구 직원을 보니, 정말 극한직업도 저만한 게 없었다.
“자, 어머님. 이렇게 하셔서 이거 누르시고요. 요기 잔액 확인 있죠? 비밀번호 누르시면 됩니다.”
“내가 불러 줄 테니까 받아 적어 줘.”
“아이고, 그러시면 안 돼요~ 비밀번호는 어머님만 알고 계셔야죠.”
“뭐가 보여야지…….”
그러자 옆에 있는 은행 비품인 돋보기 안경을 건네드려 직접 입력하게 한 직원.
30분 동안 할매 한 분만 잡고서 끝까지 친절하게 대하고 해결하는 직원을 보니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띵- 동-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번호표 차례가 되었을 때, 진욱은 그 직원에게 다가갔다.
“네, 어서오세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잔액 조회 및 통장 1년간 출금 내역 출력이요.”
“네, 신분증과 통장 주시겠습니까?”
진욱이 자신의 신분증과 통장을 냈을 때, 피로에 전 그 직원은 진욱의 신분증을 보고 검색하면서 통장의 입출금 내역을 본 순간, 그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잘못 봤나 싶어서 신분증을 보고 다시금 확인했다.
하지만 다시 확인해도 잘못 본 게 아니었고, 진욱이 어서 처리해 달라고 손짓하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로 출력을 신청했다.
“1년 분 입출금… 목록하고, 잔액 47억 7,640만 원… 확인했습니다. 대표님…….”
직원이 떨리는 손으로 서류 뭉치와 통장, 신분증을 건네자 진욱은 빙긋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이름과 직책을 말해 주시죠.”
“네, 넷?!”
“이달의 직원상 드리게요.”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대표를 맞이하며 명찰을 떨리는 손으로 꺼냈다.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아닙, 아닙니다.”
진욱은 그에 대한 정보와 직책을 받고는 지점장이 오기 전에 슬쩍 빠졌다.
바람같이 슬쩍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진욱 덕분에 부산 일대의 아성 계열사들엔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 * *
얼마 후 진욱은 밤 늦게 부모님을 집에 들였다.
퇴근 준비 하는데, 갑자기 서울 올라가는 길이라면서 손주 보고 싶다는 말에 진욱은 황급히 집으로 가서 가정부들을 잔업시켜서 음식상부터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밤 9시가 넘어서 온 부모님 내외는 오자마자 손주 은준이부터 끌어안고는 아들 내외보다 더 좋아했다.
“요새 별의별 것 다 하더라?”
집까지 직접 찾아온 부모님 내외 덕분에 강남 자택에서 식사를 다 같이 하는 자리가 되었다.
상만은 손주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재롱을 받으면서 진욱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디서 아파트 경비하는 사람 데려와다가 상무 시킨다는 말에 난 뭔 소리인가 했지.”
“아, 그 사람이요?”
“근데 알고 보니 내부 고발로 그렇게 된 엘리트더구만? 쯧, 그런 사연 덕분에 신문사가 시끌시끌하더라?”
“스토리텔링 좋아하는 게 미디어니까요.”
진욱의 말에 상만은 껄껄 웃으면서 빈 잔을 내밀었다.
“할미! 무울-”
“이 녀석! 할미는 저기 있고, 나는 할아버지! 자, 할아버지~ 라고 해 봐!”
“하아비…….”
아직 유치가 다 자라지 않아 발음이 이리저리 새는 옹알이 같은 말이었지만, 그게 더 귀여운지 꽉 끌어안아 주며 테이블에 놓인 포도 한 알을 물려 주는 상만이었다.
“손주 보러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닐 테고, 두 분이 이 늦은 시간에 진짜 어떻게 오신 거예요?”
“뭐? 손주만 보러 오면 안 되냐?”
“에이~ 저번 주말에도 왔는데, 그땐 천천히 오신다면서요?”
“호호호, 맞아. 당신이 그랬죠?”
어머니 원숙이 웃으면서 상만의 옆구리를 찔렀다.
빨리 아들한테 본론이나 말하라는 뜻이었다.
“흠~ 흠~ 다름이 아니라, 나 요새 땅 보고 있어.”
“네?”
“제주도에 땅 좀 크게 사려고 알아봤다.”
“…갑자기?”
너무 두서 없는 말이라 더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는 아들의 반응에 원숙이 부연 설명을 해 줬다.
“우리가 상록에서만 산 지가 벌써 60년이 넘었어. 엄마도 얼마 안 있으면 칠순이고, 그 전에 하고 싶은게 있었거든?”
“후우~ 큰아버지는 정치고, 아버지랑 어머니는요?”
“과수원!”
“느네 엄마랑 벌써 감귤 과수원 땅 알아보고 있다?”
“…크으~”
이게 뭘 뜻하는 건지 너무나도 잘 아는 진욱이었다.
보통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마지막에는 꼭 하는 말이 있다.
산 좋고, 물 맑은 곳으로 내려가서 과수원이나 텃밭이나 가꾸면서 남은 인생 편하게 살고 싶다는 은퇴 욕구였다.
그리고 이걸 이 밤에 와서 말한다는 건 간단했다.
“…그거예요?”
“맞다!”
“진짜요?”
“그렇다니까?”
진욱은 그 말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는 할아버지 품에서 포도 알을 쪽쪽 빨고 있던 아들 녀석을 손을 뻗어 직접 데려와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은준이 봐 바.”
“우응?”
“자, 할아버지 보고 인사해. 할아버지가 우리 은준이한테 재산 물려 주신대.”
“…풋!?”
“감사합니다~ 해 봐~”
“감솨~”
밤중에 찾아와 알리는 아버지의 은퇴 선언.
정치권에 투신한 큰아버지와 은퇴 후 과수원을 준비하신다는 아버지까지 바야흐로 ‘한 시대의 끝’이 다가온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