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생각지도 못한 픽
“정 이사님, 좋은 오후입니다!”
“아니, 또 오셨습니까?”
어제에 이어서 또 찾아온 진욱을 보고 정준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초밥은 괜찮으셨나요? 오늘은 식후라 생각해서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사 왔습니다.”
“사장님, 부담스럽게 이러지 마시지요.”
“부담이라니요? 고생하시는 분에게 드리는 건데요.”
진욱은 계속해서 아파트 주변을 맴돌면서, 정준모 전 삼정카드 이사를 지켜봤다.
낡은 경비 옷을 입고서 자신보다 10살에서 20살은 어린 주부들에게 잔소리를 듣고, 다른 나이 든 경비원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해 혼자 활동하는 인물.
간간이 경비실에서 책을 펼쳐 보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건 전부 정보 통신과 금융에 대한 전문 서적들이었다.
그것을 보고 진욱은 오히려 더 확신했다.
“저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가고 싶잖아?”
그래서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 * *
“폐기물엔 제대로 스티커 붙이셔야 합니다.”
“아, 되게 빡빡하네? 아저씨! 내가 부녀회에서 다 이야기한 거예요! 그쪽에서 괜찮다고 하는데 뭔 상관이야?”
“하하하, 그래도 이런 대형 폐기물은 규정에 맞춰서 스티커 사 와서 붙여야 해요.”
“별 거지 같은! 이런 것도 경비원이 해야 하는 것 아니야?”
합판 옷장을 버리려는 중년 부인이, 스티커를 안 붙여서 점잖게 말하는 정준모를 향해 마구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급기야 주머니를 뒤적거려 천 원짜리 지폐 쪼가리 몇 장을 정준모에게 집어 던졌다.
“알아서 사서 붙이셔! 이런 것까지 입주자가 해야 돼? 경비가 왜 있는 거야?”
“…….”
씩씩거리면서 달려가는 입주민 아줌마를 보고 한숨을 쉬면서 땅에 떨어진 돈을 줍는 정준모.
그러면서 아파트로 들어갈 때마다 궁시렁거리는 부인은 다른 아줌마들과 어울리면서 말했다.
“아이고, 다들 고마워요. 무거운 걸 옮기는 데 큰 도움 됐어요.”
“희철 엄마, 아까 경비원한테 뭐라 하던데 잘 풀렸어?”
“제깟 놈이 뭐라고 나한테 슈퍼 가서 스티커 붙여서 제대로 신고하라잖아요? 세상에, 그런 것 하라고 경비원 만든 것 아니야?”
“어머…….”
“부녀회장에게 말해서 그런 놈 싹 다 자르라고 해야겠어요! 요새는 인사 안 하는 노친네 경비도 많아서.”
“아이구, 여기까지 잘리면 저 사람들은 뭐 하고 먹고 살게요?”
그걸 보던 중에 진욱이 조용히 나섰다.
“이 동네는 투자 가치가 전혀 없구만?”
“사장님, 저기 그러시지 마시고… 아파트 내부를 봐 주시죠?”
“보고 말 것도 없어요. 목소리 큰 아줌마 치맛바람 날리는 아파트는 거르는 게 정상이지!”
“사장님! 아닙니다!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시고…….”
부녀회 사람들은 웬 젊은 정장 차림의 청년이 자기들을 겨냥하는 말을 해 대고, 옆에서 나이 든 사람이 쩔쩔매며 붙잡는 모습을 봤다.
자세히 보니 그 나이 든 사람은 전 아파트 입주민 대표였고, 젊은 사람은 TV에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어머, 저, 저 사람?”
“저 사람 하진욱 사장이잖아! 그 대화그룹 회장 사위!”
“세상에?! 재벌이야? 어머, 어머어머어머!”
멀리서 진욱이 짜증스럽게 말하며 바로 돌아가 버리자, 사색이 된 입주민 대표가 달려와서 방금 전 갑질을 한 희철 엄마를 중심으로 아줌마들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입주민분들! 방금 뭔 짓을 하신 겁니까?!”
“아니, 대표님. 하 사장이 여기 왜 와요?”
“설마 아성그룹 거기서 여기 투자 알아보나요?”
“다 끝났어요! 경비한테 막 대한다고, 야박한 동네라고 아파트 구매한다는 걸 안 하고 그냥 갔잖아요!”
“네엣?!”
순간적으로 놀라는 거주민들과 경비한테 돈 집어 던지고 자른다고 말했던 입주민 아줌마는 순식간에 이 동네 물을 흐린 천하의 개쓰레기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 * *
“이제 퇴근하십니까? 태워 드릴까요?”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밤이 되어서 교대하고 돌아가는 정준모를 두고서 진욱이 차로 그 앞에서 창문을 열고 말하자, 그는 재벌 사장이란 사람이 할 일도 많다며 한숨을 내쉰다.
“어쩌다보니 이 동네에 일이 많아서 말이죠. 이 인근에 땅도 좀 알아보고, 지점 만들 위치도 찾고요.”
“…대표님.”
“네?”
“정 그러시면… 소주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진욱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차 문을 열었다.
“타시죠. 비서님, 이 근처 지리 잘 아시죠?”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수행비서가 괜찮은 술집으로 안내하겠다며 핸들을 잡았고, 정준모가 차에 탔다.
사실 이 상황에선 반쯤 넘어온 것이다.
* * *
시내 외곽에 위치한 포장마차에 도착한 둘은 소주잔을 비우면서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이유가 뭡니까?”
“이유야 많죠.”
“저 같은 사람을 왜 그렇게 찾으시는 겁니까? 벌써 며칠째 아닙니까?”
그의 말에 진욱은 피식 웃으면서 예전의 커리어를 말해 줬다.
“정준모 이사보, 안암대 전자공학과 출신에 동 대학 경영대학원 수료. 삼정그룹 공채 입사 이후 삼정카드에서 최연소 임원 자리에 오르셨죠?”
“그게 벌써 10년 전입니다.”
“그렇죠. 그 커리어가 끝난 것도 ‘개인의 정의’로 마친 거였고요.”
개인의 정의라는 그 말에 정준모는 움찔하다가 들고 있던 소주잔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 어- 그렇게 꽉 잡으시면 깨집니다. 자, 한잔 받으세요.”
“…….”
진욱이 소주를 따라 주자 그것을 바로 쭉 들이켜는 정준모.
그리고 한이 맺힌 듯 ‘그때의 그 일’에 대해서 울분을 토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전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회사에서 저를 배신자로 찾아내고, 3년간 동종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었을 때, 공익 재단에서 손을 내밀었죠. 당연히 참여했습니다.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하는 가장이니까요.”
2010년 삼정카드 개인 정보 유출 사태.
주민등록번호와 공인 인증서로 인터넷 전자 상거래를 하던 그 시절, 삼정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카드사는 고객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영업을 했고, 심지어는 중소 업체들의 고객 리스트를 따로 구매해서 개인 정보 거래로 인바운드 영업을 했었다.
그것이 금융회사 해킹, 개인 정보 유출 사태로 언론에 퍼지자, 당시 삼정카드 영업부 이사 정준모는 이런 고객 정보 거래가 옳지 않다고 여겨, 금융 당국에 공익적 목적 제보를 한 ‘내부 고발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삼정카드는 압수 수색을 당하고, 법적으로 과징금을 물고 고객들과 합의해서 큰 돈이 나갔다.
물론 익명의 내부 고발자가 삼정그룹의 시스템에 안 걸릴 수가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아토스의 창립 멤버라는 영광스러운 업적을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창립 멤버요? 크크크, 창립 멤버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현재 핀테크 사업을 선도하는 아토스는 전자 송금 시스템으로 인터넷뱅킹 업계 1위를 차지한 유니콘 기업.
진욱의 목표도 아성금융그룹 내에 그 정도 되는 기업을 만들어 차세대 산업에 도전할 확실한 의지가 있었다.
“아토스는 벤처기업으로 시작할 때, IT 대기업 출신들을 이리저리 영입했습니다. 그중엔 저도 있었죠.”
“벤처가 성장을 할 때 대기업 출신분들이 가진 노하우는 중요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영입해서 지금의 임원분들과 함께 하고 있고요.”
“하지만, 삼정이 제가 그곳에 있다는 이유로 아토스에 투자 거부를 하자 바로 자리가 치워졌습니다. 제가 진행하던 무수수료 앱 광고 프로젝트는 다른 사람에게 갔지요.”
진욱은 이것까지만 들어도 이 사람이 굉장한 능력자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처음 정준모를 찾았던 것도 삼정 이 회장의 사망 이후 고인의 과거 일화들을 볼 때, 유능했던 임원들이 내부 고발로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서 회장이 직접 검찰청에 출두하는 구설수가 많았다는 것에서 떠오른 생각이었으니까.
‘나였어도 그때는 내부 고발자가 밉게 보이는 게 정상일 거야. 애초에 그런 짓을 처음부터 안 하면 될 것 아니냐는 이상론을 말할 생각도 없고…….’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난 일.
한 번 한 사람이, 또 그런 짓 안 하겠냐는 말도 있지만 진욱은 좀 다르게 봤다.
오히려 그런 유능하고 강직한 사람의 커리어가 단절되고 다시는 발 못 붙이며 능력을 허비하는데, 그들에게 재도전의 장을 만들어서 기존 인원들 사이에 새 피를 수급할 생각이다.
“그래서 저를 데려다 어디에 쓰시겠다는 겁니까? 아성금융그룹의 그 하 회장님이 그만두신 뒤로 제가 경영인이 되는 겁니까?”
“융자사업부장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거기가 상무 대우인데, 아무래도 돈이 직접적으로 오가는 곳이니 아주 강직하면서, 영업력이 좋으신 분이 필요합니다.”
진욱의 제안을 들은 정준모는 조용히 소주를 따랐다.
그러고는 한 잔 쭉 들이켜는 그를 향해 진욱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저희 제안입니다. 혹시라도 연봉이 적거나, 계약 기간에 문제가 있으시면 직접 써서 제게 보내 주시죠. 전 언제나 서울에 있을 겁니다.”
“…….”
정준모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들고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진욱은 그날의 술 한 잔을 끝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 * *
“정준모 전 삼정카드 이사를 융자영업부 상무로 영입할 겁니다.”
“네? 그 친구를요?”
“아십니까?”
“제 동생 친구입니다.”
“…오!”
진욱은 이준혁 사장에게 들은 뜻밖의 말에 순간적으로 놀라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깜짝 발표라고 하기에는 뭔가 김이 새는군요.”
“미리 말하셨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 친구가 어떻게, 응한다고는 했습니까?”
“계약서는 줬습니다.”
“제 동생이 지금 안암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데, 그 친구가 대학 시절 동기입니다.”
“역시, 이래서 명문대는 사회 인맥이 넘치는군요?”
“그 친구… 괜한 짓을 해서 찍혔지만, 제 딴에는 그걸 공익 목적이라고 생각한 거겠죠.”
“능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능력은 나무랄 게 없는 인재입니다. 그 친구가 당시 근무할 때 했던 게, 그 액티브 X 없이 해외 결제 가능한 시스템 구축이었습니다. 개인 정보 유출이나 해킹 위험이 많다는 윗선의 반대에도 강행해서요.”
진욱은 자신의 픽에 대해 이준혁 사장도 격하게 찬성하자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그 친구를 데려오면 삼정과 좀 껄끄러울 게…….”
“아, 그건 걱정 없습니다.”
진욱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켜고 통화 목록에 [이현재 부회장]이라고 쓰인 통화를 보여 줬다.
20분 넘게 한 통화 기록을 보여 주자 이준혁의 눈이 커졌고, 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 이동을 정리했다.
“일단 핀테크 사업부를 새로 만들고 거기에 대해 전자 금융서비스 프로그램도 준비해야 할 겁니다.”
“네, 관련 TF팀도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바쁠 겁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거야 뭐, 때에 따른 승진하고, 성과급이 전부겠지만 말입니다.”
단순하지만 그것이 직장인들에게는 최고의 포상이고, 적어도 일한 만큼의 돈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아끼지 않는 진욱이었다.
그렇게 아성금융그룹에 대해서도 진욱이 경영에 손을 대며, 사실상 전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재보궐 선거인데, 벌써부터 여론조사에서는 하상규 전 아성금융그룹 회장의 지지율은 50%가 넘어,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평가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