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단절과 공익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어우, 사람 진짜 많네?”
진욱은 아침에 급한 전화를 받고, 사옥 출근이 아닌 강남 삼정병원에 도착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방송국 차량이 가득한 곳에서 진욱은 혀를 차며 차를 멈추게 했다.
“여기서 내려가는 게 낫겠군요.”
“대표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요. 제가 빈소로 갈 테니까 편하게 주차 자리 알아보세요.”
진욱은 차에서 내려 빈소까지 걸어갔고, 아침부터 대기하고 있던 언론사 기자들은 멀리서 오는 그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움직였다.
“조문객 온다.”
“저 사람, 아성사료그룹 하진욱 사장이야.”
“삼정바이오하고 큰 건 계약 하더니…….”
“카메라 준비해!”
진욱을 향해 기자들이 달려왔고, 그들은 빈소에 들어가기 전에 카메라 셔터부터 터트렸다.
수많은 플래시와 셔터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빈소라서 직접적인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는 없었다.
진욱은 조용히 기자들에게 인사하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삼정그룹 비서실 직원들이 그를 안내했다.
“모시겠습니다.”
“아, 네.”
“지금 한 분 들어가십니다.”
무전기를 통해 알렸을 때, 복도의 양 벽 전체가 근조 화환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국회의원부터, 지자체장, 대기업 회장, 각종 단체 협회장 등이 보낸 것이었다.
‘그래도 한때 황제라 불리신 분이니까…….’
오늘 이 자리는 삼정그룹의 2대 총수인 이 회장의 장례식이었다.
그동안 고령의 나이에 지병을 앓고 있어 실무를 아들인 이현재가 맡은 지도 3년째. 오늘내일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진욱이 아는 이전의 역사보다 조금은 더 오래 사시고 가셨다.
물론, 그때의 역사에서 이현재 부회장은 국정 농단 게이트 특검으로 인해 뇌물 수수로 감옥에 있었지만 말이다.
진욱은 빈소에서 한때 대한민국 제1의 기업 총수이자, 최고의 거부였던 이 회장의 영정 앞에서 조문을 표했다.
“부회장님, 애도를 표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현재는 진욱의 손을 꽉 잡으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범삼정가 출신의 사람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진욱에게 모든 시선이 향했다.
신나라홈쇼핑, 신누리유통, 제일식품, 제일그룹, J그룹과 중원일보 등의 수많은 방계 회사 오너들까지도 모두 모여 있었다.
진욱 역시도 다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었고, 몇몇은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 하 대표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는 제일식품의 대표이사인 이용철을 다시 만나게 됐다.
그 뒤에 이성철 역시도 과거의 악연으로 이어진 사람이지만, 지금은 집안 가장 큰 어른의 조문으로 만난 사이.
게다가 그 이후로 대기업 집단까지 한 발짝 남은 덩치로 커진 아성을 보며 옛날 일은 그냥 잊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육개장이라도 한 그릇 드시고 가세요.”
“아, 네.”
이현재가 직접 상조 회사 직원들에게 말해서 식사를 차려 줬을 때, 진욱은 그걸 먹으면서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식품 쪽에서 잘하고 있지. 하 대표도 엄청나게 잘나가더만, 이번에 금융 쪽도 손댄다지?”
“그렇게 됐네요. 갑자기 큰아버지가 은퇴하셔서…….”
“정치하신다면서? 후원 할 수 있으려나?”
“네, 재보궐 나가신다고 하니까 제일의 후원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친분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진욱은 식사를 마치고 다른 조문객들이 올 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성이는 오후에 온다고 하더라.”
과거 아성사료와 가장 좋은 파트너 중 하나였던 몬스터티켓.
소셜 커머스의 붐은 사라졌지만, 오픈마켓 시장으로 나름 자리를 잡았으며, 진욱도 많은 금액을 투자해서 상장 준비를 하는 동안 많은 연락을 했었다.
“나중에 제가 또 연락드려야겠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오늘 와 줘서 정말 고맙다.”
그때 이현재까지 와서 진욱에게 인사를 했고, 용철과 현재의 배웅을 받으면서 돌아갔을 때, 진욱은 수많은 기자가 기다리는 자리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기사는 바로바로 나왔다.
[아성사료그룹 하진욱 대표, 故 이 회장 빈소 조문.]
[삼정과 아성의 인연, 그는 이른 아침에 바로 도착했다.]
국내 제1의 기업 오너 일가와 인연이 많은 진욱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왔다.
진욱 역시 출근하고, 그 기사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청담동 사옥으로 온 이준혁 사장을 맞이했다.
“본부… 아니, 대표님. 오늘 아침 회의에서 나왔던 내용입니다.”
오늘 장례식에 다녀오느라 부재중이었던 상황에서 압축한 자료를 직접 가져왔고, 진욱이 그것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인사 건에 대해 물었다.
“온라인사업부하고, 홍보사업부는 벌써 추천 임원들이 나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대부분 조직 내에서 유망한 인재들을 추천하는데, 이사회를 통해 결정될 것 같습니다.”
그건 진욱이 전권을 줬던 내용이니 별 문제 될 게 없었다.
정작 진욱 역시도 인터넷뱅킹을 준비하며 융자사업부는 자신이 임명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마땅한 인물을 추천하지 않고 있었다.
“대표님, 융자 사업의 경우에는 지금 임시로 돌아가고 있지만, 빨리 후임자가 필요합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적절한 인물을 올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가장 중요한 인사에 대해서 뜸을 들이는 상황이 되자, 이준혁 사장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진욱은 인사 문제로 시간이 걸리는 것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그를 배웅하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후우- 할 일이 많은데 말이지.”
오늘 장례식 다녀온 뒤로 계속 전화를 돌리면서 새 인재 영입에 대해서 이곳저곳에서 알아봤다.
헤드헌팅 업체에서도 알아보고, 기존의 인맥을 통해 추천도 받으면서 몇 번의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예상 인원들이 추려지는 상황에서 진욱이 직접 면접을 진행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뭔가 진욱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비슷한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진욱에게는 애매했다.
“후우, 오늘도 꽝이구만.”
며칠간 돌았지만, 이번에 면접을 본 두 명 역시도 그다지 맘에 차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연일 삼정 이 회장의 추모에 대한 게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그의 리더십을 추앙하는 일화가 많았다.
[고인은 이 당시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능력주의 위주의 철저한 인센티브 경영을 선보였습니다.]
“저거 유명했지.”
일을 제대로 한 사람에게는 과장이건, 사원이건, 이사건 확실하게 성과급을 제공해서 무한 경쟁의 구도를 만드는 삼정의 시스템이었다.
멈추지 않는 말이라고 불렀던 초고속 성장 속의 삼정 사내 문화에서 나온 삼정식 인센티브제는 이후 다른 대기업이나 다국적기업에서도 참조하고는 했다.
“그래서 삼정 출신 임원들은 과장이 부장급 업무를 하고, 부장이 다른 기업 상무급이라던데 말이야.”
진욱이 그것을 보고 중얼거리다가 뭔가를 떠올렸다.
수많은 이 회장의 업적 속에서도 그의 각종 구설수와 기업 활동 중에 벌어진 스캔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들지 않고 서재에서 노트북을 펼친 채 뭔가를 계속 검색하던 와중, 새벽 4시가 넘어서 진욱의 ‘찾았다!’라는 외침이 집 안에 울려 퍼져 자고 있던 아들이 깰 정도였다.
* * *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신도시.
최근 수도권의 집값 폭등으로 인해 각 지자체가 너 나 할 것 없이 재개발 규제를 풀어 버리고, 수많은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이곳 역시도 전형적인 경기도 신도시였고, 광역 버스를 통해 서울로 통근을 하는 직장인이 많은 곳이었다.
“아저씨, 오늘 택배 잘 챙겨 주셔야 해요. 8시에 관리실로 찾으러 갈 거예요.”
“네~ 네~ 걱정하지 마세요.”
50대 중후반의 경비원은 출근길에 오른 젊은 여성의 오더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입주민들을 위해 미소를 아끼지 않았고, 언제나 친절한 경비원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진욱은 멀리서 그를 지켜본 다음, 식사를 위해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과 음료수를 사 가지고 올 때 조용히 내렸다.
그러고는 그가 경비실로 들어가기 전에 넌지시 말했다.
“식사가 좀 부실한 것 아닙니까?”
“……?!”
진욱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을 때, 그 경비원은 처음 보는 얼굴에 어리둥절했다.
“누구… 십니까?”
“아, 아성사료의 하진욱이라고 합니다.”
“아성사료? 아, 하 사장님!?”
“지금은 아성금융그룹 본부장도 겸하고 있습니다.”
진욱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자 그는 놀란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고는 인사했다.
“아니, 이런 분이 왜 저를…….”
“정준모 이사님 되시죠? 과거 삼정카드와 아토스의 창업 멤버셨던 분.”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컵라면 말고 제대로 된 점심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시간 괜찮으실지요?”
“죄송합니다.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쪽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게 없습니다.”
“흐음, 그런가요? 뭐, 오늘 인사는 드렸으니 자주 뵙죠.”
진욱은 그러면서 전화를 걸어 이곳 아파트 경비실에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초밥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식으로 하나 시켜 놓을 테니 식사는 든든히 하세요.”
“사장님, 그러지 않으셔도…….”
“내일 또 오겠습니다.”
진욱은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현직 경비원이자 전직 금융업의 삼정맨이었던 정준모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진욱에 대해 당황해하면서도 묵묵히 지금 일에 대해 집중했다.
한편 직접 보고 온 진욱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삼정카드 1위 만드는 공신이었는데, ‘그 일’로 아파트 경비를 한단 말이지?”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수억을 벌던 대기업 임원이 은퇴 나이 이전에 최저 시급보다 조금 높은 경비 일을 하면서 원래 본업에 대해서는 발도 못 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진욱은 그가 만들었던 경영 실적을 보면서 스마트폰으로 관련 자료를 캡처해 다시금 확인했다.
그러고는 이번 융자사업부 임원에 대해서는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 * *
그날 밤 진욱은 삼정가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을 편히 모셨습니다. 장례식 때 참여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부회장님께서도 제 결혼식때 와 주셨는데, 이런 경조사는 당연히 참여해야죠.”
국내 제1의 기업 삼정의 회장이자 아버지의 장례식 때 조문 온 사람들에 대해 그룹 차원에서 일일이 감사 인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에 한해서는 이현재가 직접 전화를 걸었는데, 진욱도 그중 하나였다.
[아무튼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진욱은 그 상황에서 바로 승부수를 띄웠다.
“부회장님, 그럼 혹시 지금 무리한 부탁을 하나 드려도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네?]
“삼정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지만, 저는 이번 건을 꼭 통과시키고 싶어서 부탁드립니다.”
[하, 하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번 말씀해 주시죠?]
“아, 네. 전직 삼정맨분을 한 분 영입하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분 성함이…….”
[……!]
진욱이 ‘그’에 대한 언급을 하자 들리는 침묵.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변을 들은 진욱의 표정은 미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