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금융과 생산과 어업 겸직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아성금융그룹 본사.
이사회가 소집되고, 오늘 이 자리에는 두 건의 논의가 있었다.
[이것으로 하상규 대표이사 겸 회장에 대한 사임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물러나는데도 오히려 속 시원하다는 듯이 싱글벙글하고 있는 큰아버지 상규.
예전에 그렇게 공들여 길렀던 수염도 싹 밀고, 부스스한 머리도 기름을 발라 넘긴 것이 훨씬 깔끔해 보이면서, 진짜 정치 입문을 위한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의 안건은 진욱이 아성금융그룹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하진욱 현 아성사료그룹 대표이사의 아성금융그룹 등기이사 겸직에 대한 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찬성 18표, 기권 2표로 통과되었음을 알립니다.]
기권은 다름 아닌 외부에서 영입한 사외이사들.
눈치가 보이니 만장일치는 안 될 말이었고, 반대표대신 기권표를 던진,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그렇게 큰아버지가 만든 회사에 진욱이 정식으로 들어갔다.
회장 자리는 공석으로 남기고, 진욱이 맡은 자리는 아성금융 총괄본부장.
전 계열사의 모든 기획안을 모아 회장님께 보고하는 체제였지만, 그 회장이 부재하니 사실상 회장 대리라고 할 수 있었다.
“잘해 봐.”
“감사합니다, 큰아버지.”
“나, 이거 그냥 주는 것 아니다? 네가 개떡같이 회사 운영하면 그때 다시 뺏을 수 있어?”
백지 신탁 준비를 하면서 일부 지분은 부인과 아들에게도 양도했으니, 언제든 진욱이 삐끗하는 순간 개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 큰아버지.
하지만 그 이야기가 오히려 진욱에게는 훌륭한 자극제가 되어서 진욱의 기업 운영 의지를 불타오르게 했다.
그렇게 다시 금융으로 돌아오게 된 진욱이었다.
“본부장님, 이게 현재 저희가 진행하는 핀테크 프로젝트입니다.”
진욱에게 현 기획안 자료를 건넨 이는 아성저축은행 사장, 이준혁이었다.
올해 쉰여덟에, 외화은행 출신으로 한라은행과의 합병 이후 영입된 인물이었다.
그 역시도 대세는 오프라인 금융보다는 온라인 금융이라는 대세를 알기에 많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카카오나, 아토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저희 또한 무이자 송금 플랫폼 앱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흐음, 내부에서 이런 걸 진행하고 있었군요.”
진욱은 역시 안으로 들어오니 1급 자료들을 한 번에 볼 수 있어 한결 편하게 기획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본부장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하세요.”
“사실 핀테크 사업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투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예산이 너무 과한 것도 사실입니다.”
“예산이… 흐으음, 올해 배정 예산이 1천억이요?”
진욱은 작년 기술 개발 비용에 대해서 금액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본부장이 문제없다고 하니 이준혁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현재 인터넷 뱅킹 1위인 카카오가 매년 핀테크에 투자하는 금액이 2천억 원, 스마트폰 송금 서비스 1위인 아토스도 매년 1천억 가까이 투자합니다. 오히려 이 금액은 적절하죠.”
“그렇긴 합니다만, 저희는 아직 성과가…….”
“원래 개발하는 기간의 과도기에는 그런 법입니다. 제가 믿고 맡길 테니 연구 개발에만 노력하라고 해 주세요. 그리고…….”
“네?”
진욱은 잠시 생각하다가 옆머리를 긁적이면서 자신이 떠올린 것을 그대로 내뱉었다.
“아성사료그룹 내에도 IT전문팀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맞춰서 만든 앱개발팀인데요.”
과거 진욱이 중기청과 상록시 청년 취업 지원에 대한 논의를 할 때 IT 개발자를 영입하기 위해 썼던 프로젝트였다.
당시에는 진짜 기초부터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전문가를 영입해서 코딩부터 앱 개발까지 교육을 하면서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10년의 시간 동안 남은 인물들이 꽤 있었다.
“그쪽과도 협업해서 필요하다면 인원을 증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아, 그리고 저축은행의 이율 상품 말인데요. 현재 금리에 맞춰서…….”
진욱은 아성금융그룹에 오면서 능숙한 일처리를 보였다.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올라온 회장 조카가 어디까지 하겠냐는 여론도 있었지만, 취임 이후 빠른 속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적자가 나는 사업을 정리하면서 그룹 내의 느슨한 고삐를 조여 나갔다.
* * *
얼마 후 진욱은 이천에 있는 아성아쿠아팜에 방문했다.
물비린내 가득하고 진흙탕에 바닥 천을 깔고 비닐하우스로 된 우중충한 양어장에서, ‘아쿠아팜’이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바꾸고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전문 양식업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승낙하고 그대로 맡겨 두길 잘했어.”
진욱은 한껏 꾸며 놓은 아쿠아팜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 이사님은요?”
“관상어 수출 건으로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지금 그곳에서 비단잉어 수출 건에 대해 의뢰가 왔습니다.”
이정열 부사장의 말을 들은 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열사 사장이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대표님, 연설은 직접 하시겠습니까?”
“네, 그래야죠.”
이 자리에는 이천 지역구 정치인과, 군수, 지역 협회장, 해수부나 농림부 공무원 등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모두가 진욱이 만든 아쿠아팜을 두고서 이럴 때 얼굴을 알리면서 사업 논의를 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날을 위해서 진욱은 미리 써 뒀던 연설문을 큐 카드에 적어 대기실에서 천천히 외웠다.
[네, 다음으로 아성 아쿠아팜을 만드신 아성사료그룹 하진욱 대표이사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진행자의 소개에 맞춰 정장 단추를 잠그고 단상 위에 올랐을 때, 큰 박수 갈채가 이어졌다.
진욱은 미소를 지으며 지역지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는 사이에 찍기 편하게 포즈를 잡아 둔 다음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이 자리에 참여해 주신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그러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21세기는 바야흐로 스마트폰의 출범 이후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기와 시스템이 합쳐진 스마트한 세상, 그것을 위해 우리 아성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진욱은 고개를 돌려 자신이 만들어 낸 아쿠아팜을 보고서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의 삶에서 농업과 어업. 하지만 이젠 단순 1차산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1세기 정보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정보 통신 기술로 인한 더 많은 생산량, 더 많은 부가가치, 기술을 앞세운 첨단산업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 바로 스마트팜입니다.]
스마트팜, 아쿠아팜.
예전에는 그냥 농사, 양식업이라고 했던 것을 사물 인터넷과 정보 기술로 결합해, 인간 대신 컴퓨터가 시스템을 구축하여 최적의 생산량 증대를 위해 움직이는 첨단 농/어업.
진욱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는 앞으로도 발전된 기술과 결합한 사업을 끝까지 이어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이 자리에서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정보 통신 기술과 결합한 기업을 발전시킬 것을 약속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욱의 축사가 끝나고 다시 한번 이어지는 큰 박수 소리.
그 이후에 군수나, 도지사나, 국회의원 같은 높으신 분들이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성 아쿠아팜은 사물인터넷으로 양식하는 고기들에 대한 시스템을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님, 이 중앙처리시설에서 곧바로 수온과 산소 농도, 사료를 배급하고 거기에 따른 수질 오염 상태까지 한눈에 체크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이 수치는 바로바로 저장되는 거겠죠?”
“네, 그렇습니다. 매일같이 보고가 되면서 성장률이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폐사율은 어떤가를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습니다.”
“옛날 생각 나네요. 제가 처음에 양어장 체험 학습으로 왔을 땐 새벽에 일어나 그걸 일일이 온도계 가지고 확인했는데. 수조에 몇 마리가 죽어서 둥둥 뜬 건지도 확인하고요.”
진욱은 이 시스템 구축하는 데도 꽤 큰돈이 나갔기에, 그만큼의 수익을 기대하면서 하나하나 살펴봤다.
내년쯤이면 본격적으로 시스템이 구축되어 수출 전용으로 육성한 관상어와 식용 잉어들로 톤 단위로 오갈 것이다.
그렇게 아쿠아팜 순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진욱은 아성저축은행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네, 사장님.”
[본부장님, 인사 문제로 급히 논의를 드려야겠습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그러죠. 제가 지금 이천인데 바로 종로로 가겠습니다.”
진욱은 차 안에서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는 눈이 커지면서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아성금융그룹 종로 사옥에 도착한 진욱은 기다리고 있던 임원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준혁 사장은 진욱을 향해 통화로 말했던 자료들을 건네줬다.
“이게 다 사직서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대규모 인사 공백.
이번에 큰아버지가 사임하시면서, 임원들은 하진욱 체제를 받아들였지만,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았다.
“고영표 융자기획 상무, 임근우 홍보사업부장, 이민수 온라인사업팀장… 전부 다 사임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본부장님, 고 상무의 경우 이번에 카카오뱅크로 이직한다고 합니다.”
“흐으음, 다른 분들도 다 갈 곳이 있다는 거겠죠?”
“이민수 팀장은 아토스에서 전략사업부 임원으로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원래 사원 수준에서는 동종업계 이직이 금지되어 있어서 1년간의 유예기간이 있다.
하지만 임원 영입의 경우에는 그 조항이 유명무실해서 직책을 높여 계약직 임원으로 경쟁사가 채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것 참… 이거, 공백 메꾸는 것도 일이겠군요.”
현재 아성보다 더 큰 기업들로 가니 그것을 억지로 붙잡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많은 돈과 승진으로 묶어 뒀지만, 그 이상으로 이름값 있는 타 기업의 제안까지 다 막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바로 새 영입 공고를 올려야겠군요. 혹시 추천하실 분들 있습니까?”
“네?”
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일단 온라인사업팀과 홍보부의 새 임원 영입은 이사회의 추천을 받겠습니다. 내부 승진도 좋고, 타 임원 외부 영입 역시도 인물이 괜찮다면 허락하겠습니다.”
아직은 취임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기존의 임원들을 믿고서 추천을 받은 인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진욱.
그 말에 임원들은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하상규 회장 체제보다 더 소통이 쉽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여기 이 융자기획 상무는 제가 직접 임명하겠습니다.”
“융자 담당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쪽에 대해서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의 선택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를 통해서 대체 임원 선발에 대해 이야기를 마치고 티타임식의 가벼운 토론이 끝났을 때, 진욱은 잠시 이준혁을 따로 남겼다.
“본부장님, 혹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네, 뭐 좀 여쭤보려고 합니다.”
“제게 어떤……?”
진욱은 인사 서류를 보면서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만약 말입니다. 제가 진짜 뜻밖의 인물을 데리고 온다면 그것에 대해서 지지해 주실 의향이 있습니까?”
“뜻밖이라면 어떤……?”
“말 그대로요. 파격적인 인사가 될 수도 있고, 이사회에서 뭐라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제가 누구를 데려와도 지지해 주실 수 있냐는 말입니다.”
“흐음, 저는… 본부장님의 인사 정책에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준혁은 자신을 두고 따로 이 말을 한 것에 대해서 생각이 복잡했다.
‘원래 사료그룹 쪽에 있었던 사람 찍어 올린다는 건가? 그쪽은 대부분 생산직 출신이 전부일 텐데? 아니면 혹시… 금감원 출신 낙하산이라도 하나 데려오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따르기로 했다.
그 역시도 어디까지나 오너 일가에 고용된 전문 경영인이고 오너의 명은 곧 법인 상황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