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아성 일가의 대격변
진욱은 노원구 상계동에서 강남 집으로 돌아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제안을 들었고, 그냥 넘기기에는 마지막에 들은 게 너무도 큰 떡밥이었다.
‘이 제안을 듣고서 그 어떤 정치권 인사나 언론에 알리시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공천권을 가지신 당 대표님께 이야기드리겠습니다. 상록시 갑 공천권을 말입니다.’
그곳은 아성사료그룹 본사가 있는 곳이고, 만약 성사만 된다면 지금 당장 진욱이 출마해도 무난한 당선권이다.
게다가 원래 그곳에 있었던 다함께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뇌물 수수 비리로 나가떨어진 곳이어서, 여당은 공천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곳이라 진짜 눈 감고도 승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정치는 크으음…….”
돈 버리고, 건강 버리고, 사람 버리기 딱 좋은 게 정치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진욱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고, 늦은 새벽에도 한창 걸어다니는 재미에 빠진 아들 은준이와 아내가 반갑게 맞이해 줬다.
“어서 와요. TV 잘 봤어요.”
“긴장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소리를, 완전 상대 패널 탈탈 털더만요.”
“진짜야. 컨디션이 안 좋았어.”
진욱은 누가 봐도 2:1로 싸우면서 확실하게 승기를 잡았는데, 그걸 가지고 앓는 소리를 하니 남편을 두고서 한 소리 했다.
“피곤하다. 씻고 자야지.”
“네~ 네~ 야식은 필요 없겠네요.”
진욱은 안방에 있는 파자마와 속옷을 보고는 피식 웃으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면서도 계속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 * *
다음 날, 출근을 한 진욱은 이정열 부사장을 따로 불렀다.
이정열은 최근 진욱을 대신해서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욱에 필적하는 그룹 내 워커홀릭인지라 아무리 많은 양의 업무라도 묵묵히 해결하는 타입이었다.
“아쿠아팜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군요.”
“대표님보다는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 아~ 그런 말씀 마세요. 부사장님의 인재 픽은 상당히 잘 적중한 것 같습니다.”
진욱은 밝게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분위기가 가벼운 티타임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서 멋쩍게 웃는 이정열이었지만, 진욱에게 있어선 그게 아이스 브레이킹이었다.
“부사장님, 지금 저희가 민주당 정권하고 일하는 건이 몇 개나 되는지 아십니까?”
“네?”
“말 그대로요. 현 정권하고 밀접한 사업이 얼마나 되는지 다 말해 주세요.”
진욱의 말을 들은 이정열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아는 대로 말했다.
“일단 지금 반려동물 의무 등록제가 여당이 추진하는 것인데 그걸 제외하고 물어보시는 겁니까?”
“네, 그걸 시작으로 하나하나 들어 보죠.”
“그러면… 광주시장의 동물원 인수와 사료공장 개발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그렇죠. 그건 대화유통과 복합 쇼핑몰 건도 있어서 몇 조는 파급효과가 있을 건이죠.”
“그리고 또… 강원도의 동물원과 유기견 보호센터, 체험학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쪽도 다함께민주당 정권이긴 하죠. 네, 네~ 그럼 두 곳인가요?”
“충남도청도 있지 않습니까?”
“어이구! 광주시장, 강원도지사, 충남도지사 다 있네요.”
“거기에 지역구까지 생각한다면… 솔직히 우리가 현재 집권 여당하고 사업한 게 많기는 합니다.”
“흐으음, 그렇군요.”
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2008년부터 중앙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광역단체장들과 통하는 지원책으로 성장한 자신의 회사를 떠올렸다.
이정열 부사장은 갑자기 왜 이런 것을 묻나 어리둥절했지만, 이러면서 기습적으로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게 진욱이니 뭔가 또 생각하신게 있나 싶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저희가 이런 상황에서 야당인 한국미래당의 라인을 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네에……?”
이 부사장은 진욱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진욱 역시도 이게 말이 안 되는 무리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냥 뻘생각이었다.
“정권이 교체되지 않고서야 저희가 그런 일 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집권 여당 건드려서 좋을 게 전혀 없다는 건 대표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2년 뒤 총선에서 한국미래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또 다르겠지만, 저희는 정치권하고 크게 손 닿으면 안 됩니다.”
“흐음, 네. 맞습니다.”
진욱은 그 외에도 이정열과 이런저런 경영 논의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가 다시 업무를 위해 돌아갔을 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2년 남았지?”
아까 이정열 부사장이 말한 대로 다음 대선까지 딱 그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다만 재보궐은 몇 달 남지 않았고, 그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요새 들어 가끔 잊고 있었지만, 진욱은 엄연히 2020년대의 미래를 알고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2008년에 돌아왔을 때, 당시의 제도 그리고 각종 사건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덕분에 제대로 꿀을 빨고 준재벌 소리까지 들으며 이 나이에 이 정도의 업적을 이뤘다.
그리고 진욱이 마지막으로 아는 건, 2년 뒤에 세상이 바뀌는 거다.
“여당 유통기한도 딱 2년 남았단 말이지…….”
물론 레임덕의 정권도 아니고 지금 섣불리 나섰다간 진짜 제대로 파고들어서 그동안의 계약을 죄다 휴지 조각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진욱은 이 뜨거운 감자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 *
얼마 후.
진욱은 아버지 상만의 생일에 맞춰 가족들과 같이 상록으로 내려갔다.
화려한 걸 좋아해서 호텔 하나 대절하고, 파티를 벌이는 큰아버지와 다르게 집에서 소소하게 벌이는 잔치.
그래도 오늘을 위해서 진욱이 미리 드시고 싶은 건 다 만들어 드리라고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 놨다.
상록 본가에 도착하니 이미 큰누나 진미와 작은누나 진영이 기다리고 있었고, 큰집 일가도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우리가 제일 늦게 왔었네요.”
“어서 와. 이제 올 사람 다 왔네.”
진욱은 미리 선물로 챙긴 정장 티켓을 아들에게 쥐여 주고는 등을 밀었다.
“은준이가 가서 할아버지 선물드려.”
“아이구- 이제는 잘 걷네? 하하하하!”
생일 날 손주가 아장아장 걸어오면서, 조막만 한 손으로 양복 티켓을 가져오는 모습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크게 웃는 상만이었다.
어느 노인이나 어린 손주 앞에서는 세상 관대한 사람이 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가정부들이 각종 음식을 내오고, 모두가 웃으면서 집 안에서 평화로운 생일 파티를 할 때, 각종 선물이 방 한편에 가득했다.
“이거는 진미 사돈이 보내 주신 거고, 이거는 너희 사돈 그리고 이거는 상록시 의회에서 화환을 다 보냈더라.”
“많기도 해라.”
“그리고 이거 보여?”
“어우, 시계 새로 샀어요?”
“삼정전자에서 이현재 부회장 이름으로 보냈더라. 으하하하!”
자신에게도 말 안 하고, 아버지 생일에 맞춰 명품 시계를 비서실을 통해 보냈다는 말에 진욱은 국내 제1의 기업과 친해진 보람이 확실히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이 괜히 떠올랐다.
분명 00년대 후반에 자신이 이 삶으로 일을 할 때는 중소기업 공장 사장 선물이라 해야, 김이나 통조림, 식용유 박스가 고작이었는데, 확실히 위상이 사람을 바꾸는 것 같았다.
이제는 지역 정치권은 물론이고, 대기업에서도 오너 일가가 선물을 보내니 말이다.
선물을 개봉하는 데에만 하루가 걸린다고 하고, 식품 제외하고는 내일 하나씩 열어 본다고 했으니 그 뒤로는 계속 술자리가 오갔다.
진욱은 지난번 그 일로 인해서 너무 많이 드시지 말라고 귀띔을 하고는 따로 자리를 잡기로 했다.
그리고 안방으로 잠시 들어가서 서로 이 떡밥을 털어놓기로 했다.
“뭐? 국회의원 공천?”
“네.”
“누가?”
“모 당의 청년 위원으로 유명한 사람이요.”
“…이원욱이구만.”
큰아버지 상규가 바로 맞혀 버렸고, 그 이야기를 듣자 다들 눈이 커졌다.
진욱은 숨길 것도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공천권이라……. 대놓고 그쪽에서 여의도 콜을 날린 거구만.”
상만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건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건이라면서 혀를 찼다.
“그래서 할 거냐?”
“당연히 저는 안 하죠.”
진욱은 딱 선을 그어서 자기는 할 생각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럼 왜 말한 거야?”
“딱 잘라 거절하긴 뭐하니까 추천이라도 할 수 있나 싶어서요.”
이미 그 정도의 여지를 남겨 놨으니, 할 수만 있다면 추천을 해 볼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 것은 역시 큰아버지였다.
“야, 이번 재보궐 강남이나 상록 준다는 거는 진짜 대놓고 금배지 거저 준다는 거잖아? 그걸 무시해?”
“3년짜리 배지 하나 가지고, 평생 경영 못 하는 건 싫어요.”
“흐음, 나도 정치는 몰라서…….”
“정치인들하고 골프는 겁나게 치면서 별…….”
“형님, 그거야 그냥 친분 쌓기용이죠.”
이야기가 나왔을 때, 진성도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런데 진짜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이긴 하네요. 제 생각에는 숙부님과 그쪽에서 이야기를 한번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나는 진짜 그쪽 잘 몰라. 그냥 나한테 세금 조금 떼는 놈들이 제일이지.”
정말 일관적인 투표 소신으로, 공약 보고서 법인세 감면이나, 기업 지원책 주는 곳이라면 당이나 인물은 상관없이 그냥 찍어 주는 게 전부인 상만이었다.
진욱 역시도 그걸 잘 알고 있어서, 아버지에게는 말해 봤자 자신과 똑같이 절대 안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돈으로 만족 못 하고, 명예와 위상에 대해 엄청나게 집착하시는 분이 이 자리에 한 분 계시기 때문이었다.
“진욱아, 차라리 형님을 추천하는 게 어떠냐?”
“네?”
그 대답을 기다렸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되물었다.
“생각해 보면 말이야. 상규 형님도 상록 토박이고, 정치권 인맥은 여기서 제일일 거다. 게다가…….”
“내가 또 인기 관리를 잘해서 이 동네에서 방귀깨나 뀌는 놈들은 꽉 잡고 있지.”
확실히 상록에서 공천을 받는다고 할 때, 어느 당이든 입당 신청을 한다면 엄청난 환영 인사를 받을 것이다.
“흐음, 흠! 나야 뭐… 그런 자리가 마련되면야, 관심은 있지만…….”
얼굴에 대놓고 ‘나 좀 추천해 줘. 하고 싶어!’라고 쓰여 있는 큰아버지의 반응을 보자 그저 웃음이 나오는 진욱이었다.
“근데 큰아버지는 지금 경영하시는 건 괜찮으시겠어요? 금융에, 사학 재단에, 건설에…….”
정치권이랑 잘못 엮이면 진짜 역대급으로 게이트 터질 세 곳을 모두 소유한 큰아버지의 재산 목록이었다.
당장에 소유한 주식부터 백지 신탁을 해야 하고, 수천억의 재산이 수 년간 동결되는 상황이었다.
그걸 감당하고서 진짜 생각이 있냐는 말에 상규는 진욱에게 물었다.
“근데, 진짜 자리 만들 수 있냐?”
“자리는 만들 수 있습니다.”
“너 대신에 내가 그 자리 가져가면 그쪽이 승낙해 주겠고?”
“뭐, 청년 인재 영입을 생각했지만, 대신 최고의 지역 유지를 영입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그럼 됐어.”
상규는 그러면서 진욱과 자기 아들인 진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이제 경영 안 하련다. 니네 둘한테 전부 양도할게.”
“…네?”
“이제 회사 경영은 니들이 알아서 하라고.”
“……!?”
진성이야 장남이니 그렇다 치지만, 조카인 진욱에게도 큰아버지가 재산을 분할해서 나눠 준다고 하니 그야말로 돈 폭탄이 떨어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