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책임감이 수천 배
“나 왔어.”
진욱은 일찍 와 달라는 세화의 말을 기억하고 칼퇴근하고 집에 왔다.
언제나 같이 한 손에는 해결할 서류가 가득했고, 다른 손에는 일찍 온 김에 하나 사온 선물이 있었다.
“어머!?”
소파에서 고양이 안고 조용히 쉬고 있던 세화는 진욱이 가져온 올프레쉬 과일 바구니 선물을 보더니 감동한 듯 받으면서 그를 안아 줬다.
“어떻게 알고 이걸 사 왔어요?”
“좋아하잖아?”
과일을 넘겨주고 안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진욱의 머릿속은 여전히 일 생각이었다.
‘일단 GH는 아쉽지만, 시기상으로나 기술상으로나 삼정이 나아.’
문제는 그러면 대화에서는 뭐가 없으니 뭔가 다른 추가 협상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일 출근한다면 이 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고, 당장에 동방화재하고, 싸울 것도 대비해야 했다.
진욱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아성과 대화의 두 집 살림.
올해 대화손해보험 임기가 끝난다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천천히 나왔을 때 세화는 과일 바구니를 뜯어서 오렌지부터 바로 까 먹고 있었다.
“천천히 먹지~.”
“하아~ 이거 너무 좋아, 시큼하면서 단 게…….”
과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급하게 집어먹는 것을 보고 진욱이 웃으면서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 할 말이 뭐야?”
“으응~ 눈치채서 이거 사온 거 아니었어요?”
“음? 뭐가?”
진욱이 정말로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화는 조용히 이유를 말했다.
“요새 몸이 안 좋고, 과일 땡겨서 비타민 부족인 줄 알고 병원 검사 좀 받았어요.”
“그런데?”
“4주래요.”
“……!?”
진욱은 그 순간 사업 구상이고, 경쟁 상황이고 그냥 머릿속에 있던 일 내용이 싸그리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미안함과 기쁨이 공존하면서 세화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 내가 너무 무심했다.”
“아기 낳으면 이 얘기 해 줘야겠어. 아빠가 너무 바쁘게 살아서 몰랐다고.”
할 말 있다고 한 게 임신일 줄은 진짜로 생각 못 했던 진욱.
지난 삶에서는 아예 결혼도 안 했었는데, 지금의 이 순간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면서 이후 행복회로가 전신에 퍼졌다.
이후 여기저기에 전화를 돌렸고, 엄청난 축하 세례를 받았다.
특히 상록에 있는 부모님은 통화 너머로 울먹이면서 내일이라도 올라와 태교에 뒷바라지해 주겠다는 말에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 * *
“이게 뭡니까?”
“실장님 앞으로 온 소포입니다.”
“삼정전자에서요?”
진욱은 여의도까지 보낸 선물을 받고서 이게 뭔가 싶어 집무실로 가져가 뜯어봤다.
그리고 안에서 나온 것은 아기 용품이 가득했다.
“…….”
진욱은 위에 있는 카드를 집어서 펼쳐봤다.
[축하드립니다. 자사의 임직원들의 임신축하상품을 보내드립니다. 건강한 아이를 순산하시길 기원합니다. by.이현재.]
“하, 참…….”
임산부 전용 치약, 영양제, 초음파 사진 보관 다이어리, 출산일을 계산하는 디데이 달력, 식이섬유 주스, 크림 및 복부팩 등의 다양한 제품들이었다.
요새 신도시를 중심으로 이런 세트가 유행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걸 직접 보낸 것이 이현재 부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저 감동이었다.
“하, 진짜 삼정의 이 사람은…….”
진욱은 이 순간, 삼정과 확실히 거래를 이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을 가지고 회장실로 가지고 가 처백부 어른에게 보이면서 자신이 받은 제안에 대해 모두 말했다.
그리고 김 회장은 껄껄 웃으면서 단 한마디만 했다.
조카사위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 * *
얼마 후 진욱은 서울 종로구의 손해보험협회 건물에 도착했다.
금감원의 간부들도 도착한 이 자리는 일종의 친목 모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현재 이쪽 업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금감원 간부와 손해보험협회 임원들이 강당에서 진행하는 세미나.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마친 뒤로는 다 같이 연회장으로 모여 좋은 음식에 한 잔씩 곁들이는 자리였다.
식사 이후 잠깐 바람이나 쐬려고 밖에 나갔을 때, 진욱은 실시간으로 세화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카톡을 보냈다.
삼정에서 준 바디워시랑 치약 너무 좋다, 친정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태교에 좋은 음반을 보내 줬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받을 거다. 등으로 아이 이야기에 대한 걸로 깨가 쏟아졌다.
이렇게 아버지가 되는 거라고 여긴 진욱이 흡족해할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하 실장님 맞으시죠?”
“……!?”
자신이 혼자 떨어져서 폰을 하고 있자 슬며시 다가오는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있었다.
진욱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어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지미 리라고 합니다.”
“네, 대화손해보험의 하진욱입니다.”
악수를 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서로가 엄청난 경쟁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어 속에 칼을 품고 있었다.
“월가를 거치시고 한국 금융업계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이신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아직은 멀었습니다. 시장은 아직도 개발 가능성이 크고요.”
“잘하실 겁니다.”
그러면서 지미 리가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먼저 공격했다.
“사장님께서도 꼭 안부 연락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상품을 만드시고 시장 개척을 하시는 데 고생하셨다고요.”
마치 동방그룹 김명호 사장의 이름을 빌려서 ‘선점하느라 고생했다.’ 식으로 하대하는 투로 말하자 진욱 역시도 맞받아쳤다.
“저희 역시도 동방화재 같은 곳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죠. 그쪽이 좋은 직원분들을 많이 보내 주셔서 말이죠.”
인턴 먹튀 케이스를 에둘러 말하며 디스했지만,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이번에 저희도 펫케어 상품을 준비하면서 다른 영역의 기업들과 공동연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네, 열심히 해 보세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GH텔레콤 쪽에서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더군요.”
“……!”
진욱은 그 말을 들은 순간 흠칫했고, 지미 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는 단순 상품만 파는 게 아니라 다른 기업들과의 이런 연계하는 결합 상품이 대세가 될 겁니다.”
저건 이미 사전 협의를 마치고서 자신들이 먼저 계약 마쳤다는 선전포고였다.
하지만 진욱은 거기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잘되실 겁니다. 아, 그럼 이만…….”
진욱은 지미 리의 인사를 받으면서 확실하게 결심했다.
‘자기들 딴에는 GH랑 우리랑 손잡으려는 거, 가로채서 판세 잡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오히려 잘됐어. 바로 삼정하고 추가 협상 들어간다.’
그것을 알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 * *
“상품 부스전을 대화유통 쪽에서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네, 좋습니다. 갤럭시아 백화점은 그 쪽에서는 많은 행사를 치렀으니 익숙합니다.”
진욱은 스케일을 더 키웠다.
중국 사업을 마치고 돌아온 규완이 대화리조트에서 유통사업본부 기획실 부사장으로 승진하고, 이후 관련 사업 자료를 내밀자 곧바로 준비하기로 했고, 셋이 만났다.
그렇게 삼정의 이현재, 대화의 김규완, 아성의 이름으로 하진욱이 모여서 관련 사업에 대해 논의를 했다.
“과기부에서 IoT(Internet of Things-사물인터넷)에 관한 규제에 대해서 하나하나 풀어 나가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쪽에서 규제 풀린다면 마음껏 만들 수 있는 겁니까?”
“하하하, 지켜 봐야겠죠. 일단 산출하기로는 국내 사물인터넷 시장은 향후 10조 원 규모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0조…….”
물론, 이건 모든 시장을 합친 규모지만, 첫 단추로 펫케어를 시작하고 그 뒤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서 선점해 나간다면 모든 재벌 후계자가 부르짖는 ‘미래먹거리 선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친구는 책임감이 클 겁니다. 곧 아빠가 되니까요.”
“하하하, 네 그 말 들었어요. 약소하지만 선물 보낸 거 괜찮았는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정말 잘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화-삼정-아성은 손을 잡고서 합동 사업을 준비했다.
먼저 제품에 대해서는 스마트 케어 결합상품 제품을 삼정전자가 제조한다.
그리고 삼정화재와 대화손해보험에 같은 가격대의 스마트 펫케어& 돌봄 상품에 대해서 만들고 그것을 대화유통을 통해서 부스를 열어 오프라인 홍보를 한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월 결합상품을 할 때, 아성은 우유나 신문 배달처럼 수제간식과 사료 제공, 분기별로 반려동물 옷과 진료서비스까지 반려동물 가구를 위한 맞춤 패키지를 기획한다.
상대는 동방화재+GH텔레콤+GH전자의 연합이었고, 이렇게 시작한 사물인터넷 사업의 전초전이 시작됐다.
* * *
위이이이잉-
달그락-
진욱은 시판되고 있는 자동급여기 제품을 가지고, 집에 있는 고양이에게 줘 봤다.
에오오오옹-
처음에는 전자음과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에 잔뜩 경계하면서 털을 올리던 고양이 치즈는 조심스럽게 다가오다가 물과 사료가 저절로 생기는 걸 신기해하면서 조용히 먹었다.
거기에 맞춰서 진욱이 손으로 급여기에 사료 몇 개를 바닥에 던지는 순간, 근처에 있던 원반형의 로봇청소기가 깜빡거렸다.
우우우우우웅-
아직 초창기 모델이라 진동 소음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진욱이 흩뿌린 사료를 하나하나 빨아들이며 청소 업무에 대해서는 믿을 만했다.
그리고 리모콘을 켜자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거기에 맞춰서 로봇청소기에 달린 카메라가 집 안을 비췄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는 고양이는 화들짝 놀라면서 앞발로 로봇청소기를 툭툭 치고는 했는데, 그게 휴대폰에 계속 찍히고 있었다.
“괜찮은 상품이야… 잘 판매만 된다면…….”
이왕 시작하기로 한 사업이니 제대로 해볼 생각이었고, 그로 인해 마케팅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바로 나왔다.
* * *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우리 아이를 위한 든든한 배려, 지금 시작하세요!]
반려동물용품 행사에서 부스를 열고서 펫케어 보험을 홍보하는 동방화재 직원들의 모습에 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얼굴로 지켜봤다.
“네, 고객님. 혹시 집 인터넷과 통신사와 결합상품이 되는 것을 알고 계실까요?”
“저희가 이번 이벤트로 GH텔레콤에 가하신 분들은 추가 요금을 내시면 스마트 케어 상품과 같이 펫케어 보험 혜택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결합상품으로 팔고 있는 모습에 흥미를 보이는 고객들이 일부 있긴 했지만, 대다수는 그냥 지나가다가 한두 번 보는 정도였다.
그나마 GH전자의 제품들은 반려동물이나 저학년층 아이들을 둔 부모들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필사적으로 직원들이 홍보를 해도 큰 반응은 없었다.
“그래, 잘해 보라고.”
진욱은 자리를 피해서 다른 전시회를 돌곤 했다.
비슷한 컨셉으로 각기 다른 회사가 개발해서 만든 삼정-대화-아성 스마트 케어 상품은 엄청난 대박이었다.
첫 출시 이후 기존에 2천여 건 남짓이었던 펫케어 상품은 첫달 1만 건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고, 개업 버프 제외하고 연 3만 건의 판매 예상이 됐다.
물론 이건 결합상품 가입.
결합에 대해 시큰둥한 고객들은 각자의 제품을 따로 구매할 수 있었고, 이것이 큰 홍보가 돼서 아성의 수제간식과 사료 판매량도, 삼정의 사물인터넷 제품도, 대화의 보험 판매 건수도 단독상품으로 엄청나게 올랐다.
그리고 이 건으로 인해 삼정화재가 압도적인 시장 1위를 굳히면서 2위였던 동방화재는 점유율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5~6위권인 대화가 3위까지 올라와 추월당하는 게 시간 문제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처음 보험업으로 진욱이 파견 오고, 초면에 ‘개밥이나 만드는 애가 금융을 알겠냐?’라고 모욕한 회사의 다리를 걸어 그대로 자빠트리고, 신사업으로 추월을 앞둔 상황.
불과 1년 반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