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개밥이나 만드는 놈이라고?
진욱은 연회장에서 한 인물을 보고서 말했다.
“동방그룹 김명호 사장이네?”
“아는 분이에요?”
“우리 회사 채소류는 전부 저쪽 하고 거래했지. 지금은 그 계열사 매각했다고 하지만.”
진욱은 오다가다 한 번씩 본 김명호를 보고서 인사를 해야 하나 살폈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여러 무리 속에서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지었고, 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인사하고 올게.”
“아, 저는 잠깐 화장실 좀.”
세화가 파우치를 챙기고 다른 곳으로 향했고, 진욱은 김명호가 있는 일행 쪽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김명호 대표님 맞으시죠?”
“어.”
김명호의 주변에 보이는 인물들은 동방그룹 쪽 사람들로 보였다.
단체로 와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모습에 한 명씩 인사했다.
“아, 사료회사 하진욱이구만.”
“네, 그렇습니다.”
김명호는 실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람하고 같이 온 건가?”
“네, 부득이하게 김규완 전무 대신 왔습니다.”
“그래, 뭐 천천히 즐기다 가라고.”
“하하…….”
김명호는 손에 들린 잔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다음에 진욱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가 회사에 들어가서 보험 일 한다던데.”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개밥 만들다가 대기업 금융업 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진욱은 순간 ‘개밥’이라는 말에 흠칫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묘하게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진욱이 멋쩍게 웃고 있을 때, 김명호는 한술 더 떠서 말했다.
“대화가 손해보험 쪽은 쫌 약하거든. 우리한테도 밀리니까.”
사실이었다.
생명에 이어 손해보험에서도 확실한 1위 삼정을 제외하고, 동방, HK 등에게 밀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잘해야죠. 동방화재하고도 좋은 경쟁이 되길 바랍니다.”
“뭐, 잘해 보라고. 개밥 만들 때랑은 다르겠지만 말이야.”
“…….”
또 다시 개밥 운운하는 것을 보고 진욱은 이거 일부러 그러는 것이란 걸 확신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인사를 하고 돌아갔고, 진욱의 뒷모습을 본 김명호는 피식 웃으면서 주변에게 말했다.
“누가 누구랑 경쟁해? 어린 녀석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기껏해야 공장 몇 개 돌려 봤던 녀석이 조금 뜨니까 천지분간 못 하는 거겠죠.”
그 순간 여기저기서 웃음이 들렸고, 진욱에게 들리진 않았지만 그는 감정이 상한 상태였다.
* * *
“오늘 진짜 좋았어요.”
“그래, 다행이다.”
이후 각종 와인을 시음한 다음 돌아가는 길에 진욱은 차 안에서 세화에게 말했다.
“잘해야 될 것 같아.”
“네?”
뒷좌석 옆자리에 같이 앉은 진욱는 아까의 일을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개밥이나 만드는 사람이 금융을 뭘 아냐는 말을 들어서.”
“어머! 누가요? 그 사람 진짜 웃기네!”
세화는 자기 남편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말에 격하게 화를 내면서 누군지 말하면 당장 본가에 알리겠다고 말했다.
“어떤 인간인지 알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냐. 별로 일 크게 키우고 싶지 않거든.”
“오빠!”
“뭐, 그런다고 가만히 놔두진 않을 거야. 성과로 보여 줘야지.”
사업가가 한 도발은 사업으로 맞받아치겠다고 나선 진욱.
세화는 그런 남편의 손을 꼭 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남들한테 그런 소리 듣지 마요! 저도 진짜 가만 안 있을 거니까.”
“고마워.”
진욱은 자신이 결혼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안아 줬다.
그날 집에 들어가서도 이왕 먹은 김에 집에 있는 와인도 꺼내서 야식을 즐겼고, 풀충전을 한 채로 대화로 출근할 수 있었다.
* * *
“어서오십시오. 실장님.”
“네, 다들 잘 부탁드립니다.”
상록이나 청담이 아닌 여의도 대화그룹 사옥으로 첫 출근을 한 진욱은 관련 임원들과 인사하면서 회의에 들어갔다.
“현재 순위는 딱 중간이라고 할 수 있네요.”
“그렇습니다. 자동차보험과 실비보험이 모두 6위에 머물고 있고, 다른 상품들도 현재 판매량이 시원치 않습니다.”
“흐음~ 대화생명과는 다르게, 손해보험 쪽이 이렇단 말이죠.”
진욱은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따며 보험 상품 시스템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준비하는 건 뭐죠?”
진욱의 물음에 부실장 이한국 이사가 손을 들었다.
“먼저 기존의 설계사를 늘리려고 합니다.”
“흐음, 현재 자사의 설계사가 2만 8천 명 정도네요.”
그러자 바로 이 이사가 정정했다.
“아, 그건 모든 설계사를 합쳤을때고, 전속은 8,241명입니다.”
전속설계사가 8천 명대라는 말에 진욱은 배운 내용이어서 물었다.
“그러면 나머지는 교차설계로 딴 사람들이라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보험은 크게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으로 나뉘는데, 손해보험 설계사가 생명보험 상품을 팔거나 그 반대의 사례에는 교차설계사라고 특정 회사와 협약을 맺어서 설계사 자격증을 두 개로 가지게 된다.
그렇게 대화손해보험으로 등록은 됐지만, 대부분은 원래 생명보험을 파는 쪽이 더 수수료가 좋으니 실질적으로는 보조에 불과했다.
“그럼 일단 전속설계사의 비율을 늘리고, 질적 개선을 해야겠군요.”
보험이 기본적으로 인맥 장사라고 불리니 일단은 더 많은 설계사와 추가 고객 유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진욱이었다.
“일단 상품 교육 쪽도 늘이고, 설계사 영입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사업부를 맡으면서 여러분들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욱은 이목을 집중하는 임원들에게 말했다.
“흔히 자산설계사니 재무관리니 말하지만, 그 단어 지양하겠습니다. 일단 저부터 그 단어 안 쓰겠습니다.”
“네?”
“연금상품 제외하고는 재무설계라는 말이 어폐가 있죠. 보험은 그냥 보험으로 팝시다. 고객들이 아픈 일이 생길 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요.”
진욱은 하나하나 고쳐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일단 보험 상품에 대한 이미지부터 바꾸기로 했다.
회의를 마친 뒤로 서류들을 보는 진욱은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들에 대해 살펴봤다.
“단독실비가 보통 만 원대인데, 이걸 따로 팔지는 않는구만.”
다른 암보험 상품과 결합식으로 파는 것을 보고, 첫 가입부터 10만 원 이상 되는 가격으로 파는 시스템을 확인한 진욱은 이것부터 손보기로 했다.
1만 원대의 저렴한 가격으로 수수료 재미가 없다고 하지만, 일단 이걸 단독 판매 허가해서 고객의 수를 늘린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고객을 만나면서 추가 상품을 납입하게 한다.
진욱은 그것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자신도 움직여 보기로 했다.
* * *
“세상에, 살다살다 아들이 보험설계서 가지고 올 줄은 몰랐네?”
“좋은 상품이니까 한번 읽어 보세요. 하나하나 설명해 드릴게요.”
진욱은 직접 인재개발원의 교육을 받고 자신이 운영하는 대화손해보험의 상품에 대해서 부모님에게 설명을 해 줬다.
“그러니까 암에 대해서 이렇게 나뉜단 말이지?”
“네, 생식기암과 소액암은 제외하고요.”
“무슨 차이가 있는데?”
“그… 소액암은 갑상선이나, 피부 상피 이런 곳으로 바로 떼어 내면 그만인 것이고요. 생식기암은 유방암, 자궁암, 전립선암, 고환암 등이요.”
“왜 그게 더 싼 거야. 똑같은 암 아니야?”
“거기에 따라 산출하는 방식이 다른 거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백~수천억짜리 사업을 진행하던 아들은 프로 보험설계사가 되어 그런걸 전혀 모르고 지냈던 부모님을 설득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본가에 왔다가 진욱의 명쾌한 상품 설명에 의해 큰누나 진미 역시도 유심히 살펴봤다.
“남편이 의사여도 보험은 중요하지.”
“어차피 우리 남편 그쪽 영역이 아니라서…….”
그렇게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누나까지 가입을 하고 최종 싸인을 받았을 때 악수를 하는 모습을 찍은 진욱이었다.
보통 SNS 보면 설계사들이 이런거 많이 찍던데 자신도 따라해 본 것이었다.
“근데 괜찮겠어? 요새 대화손해보험 말이 많던데.”
계약을 마치고 이제 가족들 간의 이야기가 나왔다.
“뭐, 잘해 봐야죠. 일단 그 자리에 앉았으니 성장시키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집에 있던 강아지가 진욱을 향해 달려와 무릎으로 뛰어올랐다.
진욱은 오랜만에 보는 요키를 쓰다듬으면서 재롱을 부리는 강아지를 어루만지고 계속 이야기를 했다.
“펫푸드 쪽은 세 분이 잘하더군요.”
“진영이도 이제는 경영하는 티가 나.”
“아직도 자기 사업 키우는 데만 몰두하지만요.”
진영이 진욱의 대리를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진욱이 추천한 두 명의 임원이 경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대화손해보험 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그쪽에 대한 보고도 받았고, 중요 사안에 대해서는 직접 출근해서 결정하곤 했다.
“아무튼 몸 챙겨. 보약 한 첩 지어 줄 테니까 세화하고 꼬박꼬박 챙겨 먹고.”
“어우, 그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얘는! 잔말 말고 챙겨 줄 때 먹어!”
결혼까지 한 아들이어도 언제나 원숙 앞에서는 걱정되는 녀석이었다.
“그건 그렇고 요새 회사 미국 수출건이요…….”
그 외에 본사 이야기를 아버지 상만과 논의하고, 큰 누나가 개발하고 있는 신제품 연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설계사 합격 이후 처음으로 고객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고, 이러식으로 하나하나 이 사업에 대해 적응해 나가는 진욱이었다.
* * *
한편 그사이에 보험업계에서 큰 기삿거리가 하나 있다.
[3년간 30만 명 인턴, 정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피눈물 흘리는 청년들, 젊음을 이용하는 것은 큰 잘못.]
[동방화재의 정직원 채용 ‘제로’ 많은 지탄받아…….]
“동방화재….”
지난번 김명호가 ‘개밥 만드는…’ 운운했던 게 떠오르면서 미소가 지어졌다.
젊은 청년들을 먹고 버리는 이 시스템, 주변 인맥을 통해 고객만 잔뜩 유치하고 인턴기간 종료 시에는 바로 칼같이 버리는 놈들을 향해 진욱은 이참에 한 방 날려 주기로 했다.
진욱은 일단 임원진을 소집하고 모두가 모였을 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동방화재 인턴 채용 기사 보신 분 계십니까?”
“네, 그 정직원 채용 건은 저도 봤습니다.”
“저도 봤습니다. 좀 씁쓸한 기사지요.”
하나둘씩 그것을 봤다는 이야기에 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보험설계사는 영업에 따른 수수료인지라 기본급이 없어서 정직원이라는 개념을 찾기 힘든 편입니다. 설계사로 채용해 내부 직원을 따로 고용하는 것도 여의치 않고요.”
그중에서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한 이사의 말에 진욱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결정했다.
“그럼 내친 김에 우리가 한번 영입해 보죠.”
“네?”
“실장님, 그게 무슨…….”
진욱은 자신의 계획을 임원들에게 말했다.
“동방화재 인턴 채용 건으로 똑같이 기자들에게 알리세요. ‘우리는 청춘을 이용하지 않는다.’ 같은 헤드라인이면 좋겠고, 그쪽 경력이 있는 설계사와 일반 직원들을 한번 채용해 보겠습니다.”
“실장님! 저희 회사 공채도 있는데 다른 회사에서 버려진 친구들을 그렇게 영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긴 하지만 이건 감성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진욱은 단호했다.
“아니요. 방법이 다 있습니다. 공채는 공채대로 채용하면서, 추가 경력직도 따로 공고를 한번 내지요. 일단 인원이 많아진 만큼 써질 곳도 많습니다.”
이미 보험업계에서 인맥과 청춘을 다 버린 친구들인데 굳이 채용한다는 말에 의문을 가지는 임원들이었다.
하지만 진욱은 그대로 강행했고, 아성사료그룹 때와는 다르게, FM적으로 이사회 임원투표를 하면서 반대표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그래도 결국 통과는 됐고, 진욱은 지난번의 복수로 동방화재 이미지를 속된 말로 10X를 내 버리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