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나보고 처가 파견을?
진욱은 미국에 다녀온 뒤로 밀려 있던 국내 일을 처리하는데 바쁘게 움직였다.
확실히 신혼이라도 일 중독의 스타일은 달라지지 않아서 부사장이 직접 집무실 불을 환하게 켜져 있었다.
“원래 내가 이렇게 눈치 주는 스타일이 아니긴 하지만…….”
현재 강남 사옥에 있는 아성사료그룹 계열사들은 진욱이 하드캐리로 이끌어 나가는 상황인지라 그의 부재 시 쌓이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둘째 누나 진영에게 부탁하고는 했지만, 정작 그쪽은 자기 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대충 밑에 임원들에게 맡겨서 처리하는 방식이라 판단을 잘못한 것은 진욱이 수습하곤 했다.
“진짜 유능한 임원 좀 추가됐으면 좋겠다.”
진욱은 한숨을 쉬면서 오늘도 일에 몰두했다.
* * *
“나, 왔어.”
“어서 오세요.”
진욱은 오늘도 새벽에 들어와서 피곤해하는 세화와 소리를 듣고 달려와 다리를 비벼 대는 고양이 그리고 베란다에서 지저귀는 한 쌍의 앵무새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늦어서 미안. 그래서 이거…….”
“어머!”
진욱은 퇴근 전에 미리 야간 퀵서비스로 준비한 세화의 선물을 전해 줬다.
“이게 뭐예요? 세상에 너무 예쁘다.”
“전에 브로치 이야기 하길래 하나 샀어.”
사실 일찍 퇴근하면 와인 한 병 사 가지고 와서 바로 주려고 했지만, 늦어서 좀 뻘쭘했다.
하지만 세화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진욱을 확 끌어안아 줬다.
재벌가 아가씨라 해도 선물은 역시 가격보다 정성인가 보다.
브로치 선물로 기분이 업 된 아내는 진욱의 옷을 받아 주고 샤워에 들어가는 동안 늦은 야식을 준비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만 들어오면 그래도 기운이 났다.
그리고 또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눈곱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대충 씻은 다음에 헐레벌떡 나갈 준비를 하는 진욱이었다.
“아침 먹고 가요!”
“미안, 바빠서!”
“그럼 샌드위치 만들 테니까 5분만 기다려 줘요! 아줌마!”
“네, 네! 빵 올릴게요.”
세화는 남편을 위해서 아침 준비를 하는 가정부들에게 요청했고, 부엌에 있는 아주머니 두 분이 급하게 빵을 구우고, 계란을 부치고, 냉장고의 야채를 꺼내 만든 도시락을 건네줬다.
“고마워! 다녀올게.”
진욱이 나간 뒤로 세화는 진이 빠진 것 같이 주저앉았다.
“후우~ 저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부사장님이 정말 열심히시네요, 사모님.”
가정부들은 세화를 다독이면서 남은 시간 일을 준비했다.
그때 세화의 휴대폰이 울렸고, 아침부터 누가 연락을 했나 확인했는데 사촌 오빠였다.
“뭐야? 규완 오빠가 왜?”
세화는 번호를 확인하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 * *
“아침부터 전쟁이고, 처리해야 할 건 많고…….”
진욱은 임원 회의 이후로 집무실에서 아내가 싸 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컴퓨터를 두들겼다.
특히 요새 쌓인 내용은 미국에서의 일로 인해서 진짜 처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휴우~ W마트 리스크 배제하고서 일 처리 하려니까 진짜 구멍이 장난 아니긴 하네.”
이 모든 건 전부 미국에서 벌어진 W마트의 갑질로 인해 생긴 일이었다.
진욱은 기존 계약 기간까지만, W마트와 납품을 하면서 미국 내에서 수제 공방을 만들기 위해 동결 건조기와 위생 용품 등을 바로 보냈고, 이후 하니마트와 카스트코 그리고 아마조나에 보낼 제품을 위해 부산 공장을 완전 가동했다.
“우리 처음 공장인 상록 2공장도 전부 펫푸드 간식용으로 돌려 버리고, 그리고 추가 OEM 공장을…….”
이렇게 가다가는 기존의 축산 사료보다 펫푸드 수제 간식이 더 생산량이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계속되는 일에 진욱이 점점 지쳐 갈 때였다.
그날 밤에는 갑자기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다.
“어쩐 일이세요?”
[너, 한국 온 뒤로 너무 일에 치여 산다고 하더라.]
“뭐, 수습하는 게 바쁘긴 하죠.”
[흐음, 이번 주말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아, 그날은 규완이 형도 온다고.”
[나도 들었어. 같이 모이지, 뭐.]
“…네?”
진욱은 별안간 주말에 자기 집이 가족 회식의 자리가 될 것 같아서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그 전에 일에 치여 산다고 했으면서!”
진욱은 통화를 끝낸 다음 뒤늦게 한탄했지만, 이미 날짜는 잡힌 상황이었다.
* * *
“요새 고생이 많아?”
“뭐, 그런 셈이죠.”
“사돈 어른이 걱정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 친구, 이제 서른하나인데 요새 관리가 전혀 안 돼요.”
규완이 낄낄거리면서 진욱의 외모를 지적하자 옆에 있던 누나가 거들었다.
“아이고, 김 이사님, 지금이 더 나은 거예요. 얘 옛날에는 110kg 넘는 돼지였어요. 진짜 사람 된 거죠.”
“어머, 그런 시절도 있었어요?”
“올케가 복권 긁은 거라니까? 얘 옷 하나 스스로 안 사 입어서 제가 다 핏을 맞춰 줬어요.”
그것도 진짜 옛날이야기로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하진욱이라는 이름으로 이 가족과 살면서 예전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뭐, 그동안 미리 알게 된 정보로 이 정도로 꿀을 빨긴 했지만 말이지.’
진욱은 이제 완전히 스며든 지금의 삶을 보면서 슬며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런 자리에서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매제가 우리 회사 좀 도와줄 수 있으려나?”
“하하하, 대화그룹을 제가 도와요? 반대가 아니라요?”
“공생하는 거지.”
규완이 자세하게 이야기를 준비하자 상만 내오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대화그룹 등기임원 자리를 추천할 테니까 잠시 파견 좀 나올 수 있을까?”
“오빠! 결국 그거 하려고 우리 남편을 데려가겠다고?”
세화가 소리를 빽 지르는 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일단 말렸다.
하지만 규완은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이미 정해진 듯이 말했다.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했잖아.”
“그게 양해야? 일방적인 통보겠지!”
“저기, 사돈 총각?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상만도 궁금해하면서 묻자 규완은 헛기침을 하면서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를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다.
“흐음, 금융 쪽이 요새 많이 상황이 안 좋거든. 그래서 외부 CEO를 영입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매제를 추천했어. 이참에 우리 쪽 일도 해 달라고.”
“네?”
“보험 쪽 일 한번 해 달라고.”
그 말을 듣고 나서 진욱의 가족 모두가 뜨악한 얼굴로 입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혼자서 모든 짐을 지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데 거기에 대화그룹 임원 조건, 그것도 오너 일가 픽으로 금융 사업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오빠! 진짜 우리 남편 그러다 쓰러져!”
“매제 생각은 어떤데?”
세화의 말에 손가락을 까딱이며 진욱에게 직접 묻는 규완.
진욱은 이걸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규완이 제안을 말했다.
“사돈 어른, 최근에 아성사료가 W마트 수출 건으로 인해 말이 많은 걸로 압니다.”
“으, 으응? 뭐 그런 일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다른 유통 업체 납품 거래를 통해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아드님을 잠시 모시는데, 저희가 회사에 도움을 좀 드릴까 합니다만.”
역시 이 자리는 단순히 가족끼리 모이는 술자리가 아니라 기업 대 기업의 자리를 만들려고 규완이 모두를 부른 것 같았다.
규완은 서류 가방을 뒤적거리면서 서류를 꺼내 진욱과 상만에게 건넸다.
파일철로 정성껏 작성한 내용을 봤을 때, 진욱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 아니 이건…….”
상만 역시도 깜짝 놀라서 규완을 바라봤을 때,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무역의 아성사료그룹 투자 기획서.]
[아성저축은행-대화저축은행 지분 교환 상호 투자 기획서.]
[갤럭시아 백화점 아성펫푸드 전용 부스 전시회.]
하나같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지금 진욱 일가 말고도 큰집까지 전부 투자해 주겠다는 대화그룹의 조건.
이건 거절하는 쪽이 바보인 어마어마한 조건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W마트 납품 문제 이후에 수출에서 계약은 했지만,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려면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대화의 자금 수혈은 꼭 필요했다.
그것을 안 상만이 먼저 진욱에게 넌지시 물었다.
“강남 사옥 쪽은… 어떻게 진영이가 맡으면 되지 않겠어?”
“아~ 내가 다 하기에는 좀 빡빡한데. 그러면 아빠 쪽에서 전문 경영인을 보내 줄 수 없어요?”
“그건 내가 이사회 소집해서 한번 알아보마.”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세화와 어머니 원숙만이 진욱을 생각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진욱은 그 둘의 손을 한 번씩 잡아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결정해 줘서 고마워, 매제! 역시 내가 추천하기를 잘했어.”
이미 자신의 이름을 본사와 회장님에게 추천했다는 말에 쓴웃음이 나오는 진욱이었다.
그 상황에서 진욱은 자신의 조건을 내걸었다.
“단 저도 들어주셨으면 하는 조건을 걸겠습니다.”
“아~ 그래, 뭐든 말해 봐. 다 들어줄게.”
진욱은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하나하나 말했다.
“첫째로 우리 회사에 있는 제 직책은 그대로 유지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출근 시간에 대해서는 조금 조정이 필요할 겁니다.”
“뭐?”
“진욱 오빠! 지금 두 개의 일을 한꺼번에 하겠다는 것에요?”
이건 경영에 대해 잘 모르는 세화까지도 경악해서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진짜 큰일 나요!”
“뭐, 내가 혼자 다 하면 큰일 나겠지.”
그러자 원숙도 회사를 키울 생각보다 양쪽으로 혹사당하는 아들 좀 챙기라면서 눈총을 보냈다.
“험, 험험! 당분간은 본사 출근 안 하고 자료만 알아서 보내 줘야겠구나. 상록에서 강남까지 다니는데, 거기에 여의도까지… 어휴, 그건 안 돼.”
“네, 그렇게 해 주시고 강남 사옥으로 임원 몇 명 보내 주세요.”
“그, 그래. 내가 이사회 열고 자원을 받으마.”
“그 위에 딱 두 명 더 얹어 주세요.”
“두 명?”
“영업 팀 김학용 이사하고, 이정열 상무요.”
“……!”
둘 다 진욱과는 인연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정열이야 재무 팀에서 언제나 진욱과 대립하던 야당 역할이었고, 김학용 역시 지금은 미국에 있는 표 지 사장과 같이 영업본부장 시절에 진욱과 대형 마트 납품으로 엄청나게 발로 뛴 사람이었다.
“그, 그래! 그럼 내가 둘한테 이야기 해서 강남 지사로 보내마.”
진욱은 아버지의 확답을 받고서 다음은 진영에게 말했다.
“그래도 1주일에 한 번씩은 보고 확인할 거야. 누나가 맡으면서 두 분이 보좌하면 운영에는 문제없겠지만.”
“좋아! 그건 내가 신경 쓸게.”
그다음으로 연신 불안해하는 세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당분간 상록 본사 출근은 안 할 것 같으니 1시간은 더 잘 수 있겠다.”
“진짜 그러다가 쓰러져요. 가뜩이나 밤새 일하시는 분이…….”
“앞으로 아침에 소고기 꼭 올려놓고.”
진욱은 그렇게 정리를 한 다음 자신이 병을 들고서 아버지부터 어머니, 누나, 형님, 아내에게 술잔을 채워 줬다.
그리고 처가 회사인 대화그룹 파견을 두고서 머릿속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금융이란 말이지. 그것도 손해보험…….’
금융위와 금감원 파견 경력은 과거에 있었으니 그쪽에 대해서 곁눈질로 대충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정도 수준으로 와 달라는 건 아니겠고, 뭔가 큰 건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암튼 기대가 되네.’
새 직장을 기대하는 건 진욱뿐만이 아니었다. 매제를 데리고 와 그룹 내 시너지 효과를 확신하는 규완이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