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넋 놓고 당할 내가 아니지
조지아 주.
하츠필드-잭슨 애틀란타 국제공항.
진욱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기지개를 켜고서 바로 비자 수속을 끊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테네시 주 녹스 카운티 공장 착공식을 앞두고 이렇게 빨리 미국에 다시 올 줄은 몰랐다.
진욱은 애틀란타에 위치한 아성펫푸드 물류센터로 갈 준비를 했고, 공항에서 기다리는 주재원들이 그를 맞이했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가죠.”
진욱은 준비한 차에 올라탔을 때, 내부는 싸늘한 분위기였다.
“표 지사장이 거래 대금 건으로 공항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뭐, 그거 메꾸려면 바쁘긴 하겠죠.”
초상집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서 진욱은 로밍된 스마트폰과 태블릿으로 W마트의 유통 마진에 대해 준비한 자료를 보고 있었다.
30분 정도 달려서 아성펫푸드 물류센터에 도착한 진욱은 곧바로 표 지사장 외 미국 지사 직원들을 만났다.
전부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에서 진욱은 먼 타국에서 고생한다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일단 떨어진 사기부터 챙겼다.
그리고 안의 회의실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갔다.
“자~ 본사로 온 메일은 확인했는데, 자세히 들어보죠. 표 지사장님.”
“네, 그럼… 제가 천천히 말하겠습니다.”
표영훈 지사장은 상기된 얼굴로 그간의 일을 천천히 진욱 앞에서 털어놨다.
표 지사장은 미국 진출을 위해서 영업팀에서 자원해서 진욱을 도운 인물로, 공교롭게도 자녀가 애틀란타에 있어서 진욱이 파격적으로 앉힌 인사였다.
그런 사람이 1천만 불짜리 사고를 쳤으니 일단 명명백백하게 모든 걸 알아야 했다.
“먼저 W마트 물류센터의 유통 방침은 1분이라도 늦거나, 빨리 오더라도 물건을 받지 않겠다는 방침이었습니다.”
“네, 그건 알아요. 그래서 W마트 전문 납품 업체를 고른 거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메일을 보낸 내용과 마찬가지로 부득이한 사고로 인해 5분 정도 늦었습니다. 도로 한복판에서 트레일러가 펑크가 났습니다.”
있을 법한 일이었고,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문제는 그 5분으로 인해 1천만 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W마트가 물건을 받고서 대금 지급을 거부했고, 계약에 명시된 사항이어서 물건값을 못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결하실 거죠?”
“일단 이런 일에 대해서 W마트 물류센터에 전문적으로 납품하는 업체들은 각자의 운송보험이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메꿀 수 있는데요?”
“85%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흐음, 그럼 한 15억 정도 날렸다고 보면 되나요?”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 숙여 사과하는 표 지사장을 보고 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다 날린 게 아니라 보험 처리로 어느 정도 메꾸기는 했으니 150만 불은 그냥 매몰 비용이라고 생각합시다. 다른 쪽에서 찾아보면 답이 나올겁니다.”
“네, 부사장님.”
“그리고 제가 W마트 담당자하고 한번 이야기해 보죠. MD 연락처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진욱은 여기까지 온 이상 W마트의 그 MD를 한번 만나 보기로 했다.
* * *
진욱은 조지아 물류센터에 도착했다.
전미 50개 주에서 150개가 넘는 대형 물류센터를 운용하는 유통 공룡 W마트는 확실히 그 스케일부터가 달랐다.
“미스터 하?”
“예스.”
“펫케어사업부의 MD 알렉스 마르티네스입니다.”
그는 히스패닉으로 보이는 갈색 피부에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남성이었다.
두 눈을 연신 가늘게 뜨면서 진욱을 여기저기 훑어보고 고압적으로 나오는 모습은 보통 꼬장꼬장한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좋아요. 미스터 마르티네스? 납품 거래 건으로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보죠.”
진욱은 인근에 있는 커피숍에서 자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말 돌리는 걸 싫어합니다. 미스터 하 역시도 한국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이유가 다 있겠죠.”
“하하, 성격이 급하시군요.”
“W마트는 언제나 시간을 중시합니다. 지금 보니…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군요. 딱 커피 한 잔의 시간일 겁니다.”
대놓고 진욱의 앞에서 비싼 손목시계를 보고는 대화할 시간은 30분 남짓이라고 말하는 고압적인 태도.
진욱의 속도 슬슬 불이 붙어서 30분이 지나면 부글부글 끓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 W마트랑 거래할 때, 정말 장사해 먹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겪어 보니 진짜 생각 이상이군.’
불만은 할 수 있지만, 일단은 30분 내에 할 말을 다 꺼내야 했다.
“이번 납품 지연으로 인해 패널티가 따로 있습니까? 공문에는 그것이 없더군요.”
“물론입니다. 다음 달 유통제품에 대한 할인전을 진행해 주세요. 전시는 W마트에서 하지만, 세일과 사은품 전시는 전액 준비해 주셔야 합니다.”
‘양아치…….’
계약때 협의 후 결정이라고 하고, 그래도 어느 정도 생색은 낼 줄 알았지만, 아쉬운 쪽은 납품업체라면서 고압적으로 나오는 W마트였다.
국내의 명품관도 이 정도는 아니었고, 차라리 일본 시장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생각을 하실 줄 알겠는데, 전 세계에서 우리 W마트에 납품을 위해 움직이는 기업들은 모두 통과 의례였습니다.”
“흐으음, 그렇게 생각해야겠죠?”
“한국에서 오셨으니 잘 아시겠죠. 샘정과 GH의 가전제품 역시도 납기일을 못 지켜서 당일 대금 지급을 거부한 게 우리입니다.”
천하의 삼정전자도 W마트 물류센터 초단위 납품 시간을 못 맞춰 트럭 몇 대분의 물건을 압류당했다는 말에 진욱은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희가 너무하다 생각하겠지만, 거래는 철저히 해야 한다는 방침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저희 제안을 말하죠.”
진욱은 커피 한 잔을 마신 다음 입술을 적시면서 바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프로모션은 없을 겁니다. 할인전은 다음 기회로 미루죠?”
“미스터 하? 납품 지각 이후에 세일 쿠폰은 납품업체의 조건이라고 말했을텐데요?”
“그걸 꼭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계약은 제가 몇 번을 검토해도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
“일단은 저희 손해를 메꾸고 다음 분기에 프로모션을 진행하죠. 그렇게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분기 매출 포기하겠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어차피 납품은 끝난 거고, 우리 제품이 진열은 될 거 아닙니까? 설마 유통공룡 W마트가 일부러 유통기한 있는 펫푸드를 창고에만 썩히진 않겠죠?”
이판사판이었다.
W마트의 방침이 어떻고 간에 눈 뜨고 5분 만에 1천만 불 날릴 뻔했는데, 거기다 대고 추가 청구까지 하면 올해 수익 자체를 포기하란 말이었다.
‘내가 미국 진출했을 때 1억 불 생각했는데, 첫 단추부터 이러면 말이 안 돼지.’
진욱은 단호했고, MD 마르티네스는 이런 놈은 처음 본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분을 다 채워 드리긴 힘들 것 같군요.”
“앞의 커피는 다 드시죠. 테이크 아웃 해 드릴까요?”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잘해 보라는 투로 손을 내밀었을 때, 악수하는 손아귀의 힘이 상당히 강했다.
그 상황에서 진욱은 할 말을 마치고 먼저 자리를 비웠고, 알렉스 마르티네스는 그를 보면서 진심으로 비웃었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놈이군, 한국에서 제법 알려진 기업인이라더니 유통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 아닌가?”
그래도 몇 년간 코딱지만한 기업이 제법 그럴듯한 펫푸드 사업을 해서 유통계약을 했는데 저런 식으로 나오니 계약 기간이 끝나면 그 다음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 * *
“W마트 들이받았어요.”
“네, 네엣?!”
애틀란타 사옥에 모인 표 지사장 이하 임직원들은 진욱의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로타도 그런 양아치 짓은 안 할 겁니다. 가뜩이나 떼먹힌 물건들 가슴 아픈데, 거기다 대고 마트 내 펫용품 할인전과 프로모션 진행 비용까지 이쪽에 100% 청구했어요. 리베이트도 없고요.”
몇 번이고 검토한 계약서였지만, 막상 이런 식으로 나오니 그냥 끓어오른 진욱이었다.
“부, 부사장님. 저희가 어떻게 뚫은 W마트 시장인데, 거기서 MD하고 트러블이 있으면…….”
“네, 미국에서 가장 큰 유통업체를 적으로 돌린 거겠죠. 뭐, 계약 파기는 안 되겠지만 재계약은 모르겠고요.”
“부사장님!”
제정신이냐는 투로 외치는 표 지사장 이하 임직원들의 외침.
진욱은 그 상황에서 자신의 가방을 꺼내고 한국 본사에서 준비하고 있던 서류를 미국지사 직원들에게 돌렸다.
“오프 더 레코드였는데, 제가 직접 왔으니 이제 다들 아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어떤……!?”
표 팀장은 그것을 읽더니 눈이 점점 커졌고, 다른 직원들도 그것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표 지사장님 이하 직원분들이 기존 거래처에 힘써 주고 계실 때 본사에서도 추가 미국 유통 거래를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이런 게 진행되고 있었군요.”
“이번 W마트 건이 아니었으면 여유 있게 진행하고, 확정되면 그때 자리 만들어서 다 같이 계약서 싸인을 하려고 했죠.”
진욱이 내민 것은 아성사료그룹의 해외수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서포트해 주는 양대 기둥이었다.
하나는 중안무역에서 추천한 곳이었다.
“첫 번째는 하니마트입니다. 미국 최대 아시안 대형마트라고 하더군요.”
“아, 부사장님! 그곳은 초반에 이야기가 나왔던…….”
“네~ 그때는 고려한다고 하면서 씹었는데, 어떻게 재시도를 하니 이야기 좀 하자고 하더군요. 공교롭게도 애틀란타에도 지점이 있어서 거기서 보기로 했습니다.”
하니마트는 재미교포들이 모여 만든 한국 식자재 대형마트로, 미국 내 최대 규모의 아시안 음식 대형마트였다.
일전에 수출파트를 맡을 때 중안무역이 중개해 줬지만, ‘현지 공장이나 물류센터가 있어 대형 납품 아니면 소매상 안 받는다.’라고 한 번 물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성의 위상이 올라갔을 때, 이번에는 그쪽에서 먼저 계약을 제안했으며 그것을 통해 협상에 들어간다.
“두 번째로는 대화무역에서 카스트코와 지분 거래를 하면서 저희 쪽을 소개해 줬습니다. PB상품에 대한 논의도 오갔습니다.”
“카스트코요!?”
카스트코는 캐나다와 미국 서부 지방의 유통공룡이자 W마트를 추격하는 세계 2위의 대형유통업체였다.
“이것 때문에 하니마트 협상 끝내고 시애틀로 가야 해요. 여기서도 같이 갈 직원을 좀 뽑아야겠네요.”
W마트와 어그러진 상황으로 경악하던 미국 지사 직원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경이로운 눈으로 부사장 진욱을 바라봤다.
W마트 하나 겨우 뚫은 것과 달리, 동네 소매상 수준으로 영세한 규모인 아성사료가 미국에 제대로 퍼질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두 업체 모두 우리한테 독박 씌우는 계약은 안 할 겁니다. 그리고 5분 늦었다고 대금 먹튀하는 일도 없을 거고요.”
진욱은 계약 기간 내 W마트 납품은 생각하고 있어도 각을 잡아 엿 한번 먹일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과거 코카콜라 외에는 그 어떤 제품도 감히 W마트 앞에서 거스르지 못했는데, 당장은 아니더라도 두 번째로 유통 공룡을 상대로 백기를 드는 게 아성이 될 거라는 자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