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래서 이 회사 누구 겁니까?
진욱은 새벽에 의문의 전화를 받고는 다급히 나왔다.
숙소 안에서 편한 차림으로 노트북만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뜻밖의 인물의 연락을 받고 바로 옷을 챙겨 입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간 것이다.
주차장에 있는 차를 빼서 메시지로 받은 주소를 찍자 3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 진욱은 액셀을 밟았다.
“진짜라면 이거 엄청난 일인데…….”
진욱은 약속 장소로 가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안녕하십니까? 삼정물산 기획팀입니다.’
‘삼정물산? 어쩐일이시죠?’
‘현재 아성사료가 PK바이오를 인수한다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그 회사를 원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대표님께서 지금 근처에 계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오셔서 직접 이야기하시지요.’
그렇게 해서 삼정그룹의 초대를 받고 가는 길이었다.
“물산 대표일까, 아니면 그룹 내에…….”
점점 더 궁금해지는 상황에서 진욱의 차는 목적지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부산에 있는 호텔에 도착한 진욱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직원들이 기다렸고, 발레파킹을 맡긴 다음 안으로 들어오자 호텔리어들이 물었다.
“어서오십시오. 어떻게 오셨습니까?”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여기…….”
진욱이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 주자 그들이 바로 눈짓하고는 안으로 안내했다.
호텔리어들은 최상층 스위트룸으로 안내했고 조용히 노크했다.
그리고 안에서 문이 열렸을 때, 그들은 바로 진욱을 안으로 안내했다.
“어서오십시오. 아성사료의 하진욱 부사장님.”
“아, 네. 처음뵙겠습니다.”
진욱에게 인사한 중년 임원은 좀 더 안쪽으로 그를 데려갔고, 거기에는 테이블에서 고급 와인을 마시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아…….”
“오셨군요?”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활짝 웃는 금테 안경의 남성을 본 순간 진욱은 심장이 철렁했다.
‘황태자가… 직접?’
그의 이름은 이현재.
현 삼정그룹의 사장이자, 지난번 진욱 부자가 승지관에서 만난 이원휘 삼정그룹 회장의 외아들이었다.
현재 승계를 위해서 삼정물산 불법 증여 논란이 일어나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이런 자리에서 만나다니… 진욱은 뭔가 엄청난 일에 엮인 것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앉으세요. 와인 좋아하십니까?”
“아, 네.”
그가 웃으며 와인병을 들자 주변의 임직원들이 바로 진욱의 자리를 세팅해 주고, 와인 잔에 직접 따라 줬다.
진욱은 능숙하게 디캔팅을 하면서 한 모금 음미했다.
확실히 국내 제1의 대재벌이 먹는 와인은 맛이 달랐다.
“삼정에서 공식 행사에서 쓰는 와인입니다.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해 왔죠.”
“네, 굉장히 좋은 맛입니다.”
“하하하, 입에 맞다니 다행이네요?”
새벽에 은밀하게 불러서 얼굴 보고 와인이나 한잔하자고 이런 자리 마련한 것은 아닐 거다.
당장에 휴대폰에 있는 기자들 번호로 ‘지금 부산에 삼정 황태자 떴다.’ 라는 한마디만 해도, 이 일대가 뒤집힐 것이다.
하지만 이현재 사장은 아직 본론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부사장님은 모르시겠지만, 멀찌기서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 삼정문화재단 때 반려견 학교 자원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셨더군요.”
“아, 그 이야기로 회장님도 같은 말을 해 주셨습니다.”
“회장님께서 강아지를 매우 좋아하십니다. 본가에도 4마리를 같이 키우시죠.”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집에 한 마리 분양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와인 이야기를 했다가 기르는 반려동물 이야기, 그리고 대화그룹과 아성사료와의 관계나 수제간식으로 얼룩말 고기나 상어 뼈를 재료로 쓴다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 칭찬.
진욱은 와인 잔을 들때마다 손목 시계를 슬쩍 보면서 빙빙 돌리는 일상 이야기만 하는 것을 두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본론은 어느 정도 술을 마셔야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1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 이런저런 투 머치 토킹이 계속되던 와중에 이 사장이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아성사료가 양산에 있는 회사를 인수한다지요?”
“네, 아 그렇습니다. PK바이오라고 눈여겨본 배합사료 업체입니다.”
“흐음, 언제부터 검토하셨는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알 수 있을까요?”
“네?”
“아, 이게 좀 조심스러운 질문이긴 합니다만, 지금 인수 검토하시는 그 회사… 저희하고도 엮인 게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진욱은 고작 1천억 남짓한 지방의 자그마한 공장을 가지고 어떻게 삼정의 후계자까지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지 몰랐다.
‘이거 분명 뭐가 있는 건인데…….’
진욱은 그 가능성을 두고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가장 유력한 것은 수출전문인 삼정물산에서 리스트로 두고 있는 업체라서 눈독들이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난입한 것.
하지만 이거라면 삼정의 압도적인 재력으로 그냥 상위입찰해서 애초에 손도 못 대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만한 일로 이현재까지 여기 올 리도 없고 말이다.
진욱은 연신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삼정가의 황태자에게 직구를 던져 보기로 했다.
“사장님, 저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저, 하진욱 씨? 이 자리는 저희가…….”
중간에 있던 임원들이 나서려고 했지만, 이 사장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는 여유를 잃지 않고서 한번 말해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PK바이오를 저희가 인수한다면… 삼정에 무슨 영향이 있는 겁니까?”
“흐음, 사료회사가 사료회사를 인수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할 게 없지요. 다만…….”
“네? 다만이요?”
“그 회사가 해외 수출에 대해서는 저희를 통해서 전부 움직였습니다.”
“……!?”
진욱은 그 말을 듣고서 무슨 상황인지 바로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아직도 느긋한 얼굴의 이현재와 다르게 다른 임원들의 눈총이 슬슬 따까워질 때였다.
사실 이건 재벌가 중에서 그나마 대화를 시도하는 쪽인 삼정이니까 상대라도 해 준 거지 잘못 걸렸다간 일방적으로 ‘그냥 이번 입찰 접어라.’라는 압박을 회사적으로 받았을거다.
진욱은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서 머리가 복잡했고, 이현재 사장은 그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이 와인 잔을 들었다.
“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시죠? 이 와인에 요리도 좋습니다.”
“아, 네. 그러지요.”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젊은 친구가 사업을 잘하신다고 칭찬을 많이 하시길래, 궁금하긴 했습니다. 아마 진욱 씨와는 오다가다 계속 볼 것 같군요.”
“저야 영광입니다.”
제일, 대화에 이어 이번엔 삼정그룹의 오너일가까지도 진욱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는 말.
좋게 봐준다고 하니 진욱은 그가 말한 대로 와인을 마시면서 서로의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기분 좋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양산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삼정에서 붙여진 대리운전 수행비서가 운전을 하는 와중에 뒷좌석에 앉은 진욱은 아까의 일을 종합했다.
‘뭐인지 딱 알겠다.’
PK바이오의 수상한 자금 흐름, 그리고 그 뒤에 삼정물산이 있고 오너 일가가 직접 올 정도라는 것을 보니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진욱은 품 안에서 받은 삼정물산 이현재의 명함을 확인하고는 지금 생각하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문자를 하나 남겼다.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연락한 중안무역 박 사장을 통해 ‘흥미 있는 썰’을 하나 들은 진욱.
그것을 통해서 노트를 펼치고 펜으로 상황을 하나하나 그려나갔다.
“지자체와 중기청에서 밀어주는 지방의 사료회사, 그리고 비료, 단미사료, 곡물 등에 대해서 관세 혜택을 받는 회사이면서, 수출도 전부 삼정이 밀어주는 곳이라…….”
아마 저렇게 지원을 받아서 정식 판매가격보다 싸게 판 다음에 그 차익을 다시 챙기는 식의 장부가 따로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돈은 자연스럽게 수출 중개를 100% 전담한 삼정물산이 가져가는 시스템일 것이고, 이게 궁극적으로는…….
“리베이트, 거기서 넘어가면 백마진…….”
이거 잘못 파헤치는 순간 잘못하면, 진짜 정부에서 특검까지 나올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삼정이라면 겨우 이거 하나로 끝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런 회사가 적어도 100개는 넘을 것이다.
이게 모두 오너 일가의 사업자금으로 쓰일 테고 말이다.
진욱은 이 카드를 두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고민했다.
여기서 공적 제보를 한다면 언론에서 시끄러워지면서 인지도는 올리겠지만, 반대로 국내 제1의 대재벌을 영원한 적으로 돌리는 것이고, ‘투자금까지 받아 놓고 뒤통수를 치는 상도덕도 없는 놈.’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PK바이오의 인수를 철회한다면, 시간과 돈만 허비한 셈이었고, 다음 인수기업을 찾을 때는 경쟁사도 많이 붙는 더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부사장님, 산업은행과 이야기했는데 최소입찰가가 정해진 상태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아침 회의에서 양 이사가 알려 준 정보를 들은 진욱은 머리를 톡톡 두들기면서, 상록에서 여기까지 와서 인수 준비를 위해 움직이는 직원들을 둘러봤다.
‘그래도 소득 없이 그냥 가는 건 아니야. 이건 쇼부를 봐야겠다.’
진욱은 그들을 보고서 일어나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다음 주까지 계속 협상 준비해 주시고, 인수대금 입찰서 준비해 주세요. 산업은행하고 협의는 계속 양 이사님이 해 주시고요. 혹시 본사에서 무슨 일 있다면 즉시 연락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실무를 임직원들에게 맡긴 뒤로 진욱은 어제 술자리 이후로 오늘 저녁까지 시간을 기다리며, 바로 명함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진짜로 전화를 받은 삼정 이현재 사장.
진욱은 오늘 하루 준비한 제안을 그대로 삼정에게 알렸다.
“사장님, 어제 이야기로 생각을 많이 해 봤습니다.”
[아…… 그런가요?]
“저희는 단독입찰의 기회에서 PK바이오의 입찰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인수 입찰금액은 1천억. 만약 유찰된다면 그때 다른 기업을 찾겠습니다.”
[흐음, 1천억이라…… 일단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하세요.]
“저희가 인수한 뒤에도 1년 동안은 삼정물산을 통해 수출을 맡기겠습니다. 좋은 거래처 중개를 요청하겠습니다.”
[아~ 1년이요? 흐음~ 그래요. 그렇게 하죠.]
이것으로 삼정이 그동안 작은 사료공장 하나를 통해 리베이트로 써먹던 자금줄을 정리할 수 있는 기간까지 주고, 온전한 공장과 기계, 사료 기술만 가지고 제대로 운영할 것이다.
이제 판단은 삼정의 몫일 것이다.
이현재에게 모든 상황을 다 말했으니 그쪽에서 산업은행을 통해 인수가에 대해 알릴 테고, 그러면서 유찰이 된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 *
그리고 산업은행의 PK바이오 입찰 당일.
한 팀장은 단독으로 입찰한 금액을 확인하고는 산업은행 채권단 측에서 준비한 예상가와 비교를 하고는 회의 끝에 결정했다.
[네, 아성사료의 단독입찰 결과, 총 인수가 1,000억원으로 인수가 통과 되었음을 알립니다.]
유찰 없이 바로 통과됐다.
이것으로 진욱이 말한 1천억 초과는 오버 슈팅이라는 소신은 지켰고, 중간에 여기저기 상황이 복잡해서 계속 흔들렸지만, 적절한 가격으로 새 공장과 인지도 좋은 배합사료 회사 하나를 손에 넣게 되었다.
“부사장님, 인수 성공입니다.”
“후우,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진욱은 모두와 악수하면서, 바로 상록 본사에 알렸고 아버지는 그저 수고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후우-.”
입찰 강당에서 나온 진욱이 숨을 돌리다가 문득 처음부터 이 회사 인수를 적극 추천해 준 중안무역 박 사장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삼정그룹 라인하고 직통으로 뚫을 수 있는 계기는 만들어 줬네?”
이걸 노리고서 한 거였다면 정말 큰 선물을 하나 받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