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제법 큰 건
“후우-.”
진욱은 내일의 아성사료 본사 출근을 준비하면서, 준비한 기획안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동안 신사업에 집중하면서 수많은 아이디어를 구상했고, 아성펫푸드의 강남 사옥은 꾸준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랜만에 상록 본사에서 자리 깔고 일할 거리를 만들어야겠다.
“좋아. 이제 이걸 내일 이사회에 올리면 되겠어.”
진욱은 새벽 3시에 컴퓨터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오늘 하루의 시작을 준비했다.
* * *
“아성사료의 매출 증대를 위해 새 회사를 인수하려고 합니다.”
“네?”
“부사장님.”
“흐으으음!”
술렁이는 임원진들.
그리고 지금 처음 들은 이야기지만, ‘오늘 큰 건 하나 발표할 겁니다’라는 말을 차 안에서 들었으니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하상만 회장.
“하 부사장. 지금 새 회사를 인수한다고 했어요?”
고용사장이지만, 현재 상록 본사의 실무를 맡는 김유현 사장도 금시초문이라 되물었다.
“네, 맞습니다.”
“허어, 어떤 회사를 인수하려 하십니까?”
“본사 사료와 시너지를 일으킬 곳입니다.”
진욱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조명을 끄고, 빔 프로젝터를 가동한 다음 준비한 팜플렛을 직원들을 통해 돌리게 했다.
삑-
“PK바이오. 1978년 설립된 배합사료 제조업체로 부산/경남 일대의 향토기업입니다. 원래 부산에서 시작했으나, 15년 전 양산으로 이전 이후 본사가 그곳에 있습니다.”
대략적인 회사에 대해 소개는 했고 그곳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많았다.
“PK바이오, 유명한 곳이죠. 농협사료 위탁생산 받는 곳이 아닙니까?”
“거기 최근에 위기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진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임원들에게 말했다.
“네, 맞습니다. 최근 3년 동안 누적된 적자로 인해서 위기인 상황입니다. 저희가 그 PK바이오를 인수할 것입니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김유현 사장이 만년필을 까딱이며 PK에 대해 말했다.
“부사장님, 거기가 괜찮은 회사이긴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누적된 적자로 인해서 자칫하면 막대한 부채까지 떠안을 수 있습니다.”
큼지막한 먹이긴 하지만, 그만큼 뼈다귀도 많은 회사, 그러다 보니 그냥 먹어 치웠다간 목에 걸릴 수도 있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부채는 기술과는 다르게 오너의 무리한 부동산 투자와 중국 공장 진출 실패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회사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오너의 무능으로 인해서 재정난에 빠진 회사이니 오히려 이럴 때 영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저희는 긴급 수량이 생길때마다 인근 공장에 하청을 요청해서 위탁생산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PK바이오를 인수하여 추가 공장 설비를 구축하고, 축산배합사료 시장에서도 점유율을 늘일 것입니다.”
진욱의 발표에 김 사장은 납득은 했지만, 칼을 대서 살코기만 먹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물론 대부분의 임원은 회장의 아들이 발표한 것이니 대세에 따라서 PK바이오 인수 건에 대해서 지지하기로 했다.
임원회의는 그저 거수기.
대다수가 찬성을 보냈고, 김 사장 역시도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지켜본 상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PK바이오의 인수팀 구상하고, 작업 시작해 보자고.”
“예, 회장님.”
“하 부사장은 집무실로 같이 가지?”
회사가 성장해도 임원회의보다 더 우선순위는 역시나 오너와 그 아들의 의지였다.
회장실로 들어온 부자는 비서에게 연락해 다과를 시키고는 아침부터 티 타임을 가지며 못 다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오랜만에 큰 건 하나 가져왔구나?”
“네, 인수계획을 은밀하게 진행해왔습니다.”
“PK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 사료협회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조금 나왔지만, 바로 사그라들었는데.”
“부산 일대에 저희 파이프 많지 않습니까? 특히 그 수출업체도 그렇고요.”
“중안무역?”
“대화하고 거래하면서도 거기 라인은 계속 유지하길 잘했죠?”
“참 그 회사가 여러모로 조커란 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그들의 정체를 대략 알고 있는 상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직 국가직 공무원 출신’들이 모인 ‘그 회사’에 대해 인사라도 해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PK인수할 TF팀 만들어지면 부산 가서 많이 이야기해 봐야죠.”
진욱은 이번에 PK바이오 거래권이 잘된다면, 중안무역 박 사장한테 큰 거래 하나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 부사장, 근데 말이야.”
“네, 회장님.”
“지난번 삼정에 후원도 그렇고, 이번에 추가 융자 건도 그렇고 실탄은 충분한데 예상 금액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 거냐?”
“천억 내외요. 오버 슈팅입니다.”
“그 안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이구만.”
유리투자증권을 통해서 현재 PK의 대략적인 가치를 들은 진욱은 1천억 예산으로 회사를 인수할 준비를 했다.
“경쟁상대는?”
“저희가 먼저 움직여서 딱히 움직임은 안 보이지만… 농협사료가 아예 자회사로 운용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그 외에는 아직 모른다는 건가?”
“차차 알아볼 겁니다.”
“좋아. 진행해 봐라.”
“예, 회장님.”
진욱은 회장님이자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곧바로 회장실을 나왔다.
당분간 강남 사옥의 일은 누나인 진영이 할 것이고, 중요 사항에 대해서는 전화로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진욱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TF팀을 찾기 위해 본사와 강남 사옥에 있는 인물 중 각 팀을 찾아다니면서 중요 인물을 뽑았다.
* * *
얼마 후 사료업계에서는 PK바이오의 대표이사 사임과, 산업은행을 통한 매각절차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퍼졌다.
협회 내에서 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만의 연락에 진욱은 때가 됐다면서 바로 입찰서류를 준비하고, TF팀을 결성하여 양산으로 내려갔다.
양산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은 일행은 진욱의 스위트룸에 모여서 각각 서류와 커피 한 잔씩을 가지고 회의에 들어갔다.
“먼저 재무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재무팀 양현수 이사.
원래였다면, 이정열 상무와 같이 움직이려고 했으나, 아무리 중요한 인수라고 해도 재무팀장이 직접 달려갈 수는 없다는 말에 이 상무의 추천을 받고 데려온 인물이었다.
이 사람 역시도 이정열과 마찬가지로 대기업 재무담당 출신이었고, 임원 제안으로 영입해 온 고급 인력이었다.
“최대 인수가 1,500억 원 규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는요?”
“사모펀드 쪽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MK파트너스 쪽에서 그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진욱은 자신이 예상한 천억과 다르게 꽤 금액이 크단 말에 블러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모펀드가 그렇게 크게 지를 리가 없을텐데요. 정말 그게 언플성이 아니라 실제 구입대금을 생각한다면…….”
“3년뒤 잘 운용해서 2천억 이상의 규모로 매각할 기업이 있다는 겁니다.”
“왠지 해외에서 국내 진출을 위해 올 회사 같은데…….”
진욱이 얼굴을 긁적이자, 그가 픽한 인물 중 하나인 최철수 팀장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부사장님, 이번 PK 인수에 유력하게 뜨는 기업이 있는데, 그쪽과도 경쟁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딘가요?”
“한림입니다.”
“후우~.”
한림식품.
진욱, 아니 아성사료 전체와 과거 악연으로 이어진 곳이었다.
육계 가공업체 마이카와 같이 닭값 담합을 주도해서 치킨값 대란을 일으켰고, 그것 때문에 졸지에 칠레산 닭으로 사료를 찍어내게 했던 게 바로 그 녀석들이었으니 말이다.
“한림… 거기도 진짜 많이 크긴 했죠.”
재밌게도 아성사료와는 비슷한 길을 걷는 기업이었다.
상록시의 작은 사료공장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아성.
그리고 한림 역시도 전주에서 양계장으로 시작해 육계가공업으로 코스닥 상장 이후 중견기업에서 빠르게 성장해 준대기업까지 바라보는 기업이었다.
“한림이 최근 거제에 있는 오션해운을 1조 80억 원에 인수했습니다. 그곳은 광물, 곡식, 비료, 철강 등의 벌크화물 업계 1위인 곳입니다.”
“농장에 육계가공에 수출 전문 해운사까지 인수하고… 거기에 사료회사까지 먹는다라…….”
병아리에서 사료 수출까지 혼자 다 할 수 있는 구조였고, 그렇게 된다면 이 업계에서 넘버1은 바로 따 놓은 당상일 것이다.
“하나는 사모펀드, 다른 하나는 업계 진출을 위한 준대기업이라…….”
진욱은 어느 쪽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제 생각을 말하겠습니다. 이번 인수전에 있어서 PK바이오의 인수 단독협상에 들어가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다.”
“네, 부사장님.”
“단 한 가지의 예외는 있습니다. 인수전이 과열되어서 오버슈팅의 위험이 있을 경우 저희는 주저없이 포기하겠습니다.”
“오버슈팅의 기준을 얼마로 잡으신 겁니까?”
“그건 상황을 보고 말하겠습니다.”
양 이사는 그 말에 떨떠름했지만, 차라리 그렇다면 처음 자신이 예상한 ‘1,500억’을 기준으로 그 이상을 넘어가는 것을 오버슈팅으로 예상했다.
“일단 내일 아침부터 산업은행 영업부 직원들과 미팅 준비해 주세요. 남은 분들은 정보 수집해 주시고, 현재 PK바이오의 재무상태도 조사해 봐야 할 겁니다.”
“네, 부사장님.”
진욱은 처음으로 시작하는 대형 인수를 두고서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다음 날 산업은행 경남지부에서 온 영업부 팀장은 진욱을 만나고 서로 인사했다.
“한기호라고 합니다.”
“아성사료의 하진욱입니다.”
“하하하, 공교롭게도 저희 둘 이니셜이 H군요?”
“네, 행운의 상징일까요?”
시답잖은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어넘겼는데, 담당자가 흥이 많은 사람인지 때때로 아저씨 개그를 하면서 분위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이번에 인수전은 삼파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MK와 한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역시나.’
진욱은 미리 예상했던 둘이 경쟁자로 나온 상황에서 한 팀장에게 물었다.
“그 외에 다른 입찰서는 없었습니까?”
“흐음, 삼국지처럼 딱 셋만 남을 것 같아요~ 예상했던 기업들이 더 있었는데, 다들 손을 털더군요.”
“혹시…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저희도… 프라이버시입니다.”
진욱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일단 인수 계획안부터 보냈다.
“이게 저희의 제안입니다. 최종 입찰 결과 때 금액을 작성하겠지만, 일단은 신중한 검토 부탁드립니다.”
“하하, 저희야 뭐… 융자금 회수가 우선인지라 큰 금액을 선택하겠지만 말이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진욱은 거기가 어딘지 짐작이 갔다.
아마 PK를 하청으로 부리던 농협사료였겠지만, 조합원 투표에서 결렬되어서 참가 못 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그저 망한 회사 융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법정관리인.
그들에게 있어 PK바이오의 장밋빛 미래 계획을 알려 줘도, 이들은 돈이 우선이기 때문에 결국 입찰가 높게 치른 곳이 이기는 싸움이다.
진욱은 한 팀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인수 합병 논의를 준비했다.
“2주 뒤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네, 우선협상 대상에서 저희의 이름을 힘차게 불러 주셨으면 좋겠군요.”
“하하하- 아주 목청이 터져라 외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진욱이 바로 양산 호텔로 향했을 때, 한 팀장은 아성이 준 기획안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제법 준비를 잘한 것 같지만… 이 싸움은 일정 금액 안 되면 아예 매각 취소를 할 건이라서요.”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날 PK바이오의 인수전은 그렇게 세 회사의 싸움으로 불씨가 당겨졌고, 산업은행은 그저 느긋하게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