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그래서 합류했습니다
“그래, 학교를 좀 늦게 나왔다고? 어디를 나왔나? 전공은?”
“서울대 동양사학과입니다. 일과 병행을 하느라 졸업도 좀 늦었습니다.”
“흐음, 집안도 전부 회사 운영을 한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진욱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하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세종에서 보훈처 건에 대해서 해결하고, 어머니 연락에 다급하게 올라가니 집에서는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대화그룹 사람들과 집에서 술상을 차리고 즐기고 있었다.
거래가 잘 끝나서 기분 좋은 한잔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거기에 규완이 말했던 그 화가 아가씨까지 데려온 게 문제였다.
그 아가씨 세화는 어머니 옆에 붙어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아 이야기를 나눴고, 규완이 직접 소개를 해서 모두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평소 신경은 크게 안 쓰던 아버지 상만 이번만큼은 생각 좀 해 보라고 진욱을 다독였고, 어머니 원숙은 눈에 불이 켜진 채로 기를 쓰고 둘을 이어 주려고 했다.
그 결과 둘 다 거나하게 마신 뒤고, 여기서 술을 입에 안 댄 것은 진욱밖에 없었다.
대화가에서 수행비서를 미리 퇴근시켰다는 말에 진작에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는데, 결국 이 상황이 되자 진욱이 차를 몰고 상록에서 세화의 집이 있다는 강남구 청담동으로 향했다.
그나마 한강은 안 건너간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길이었고,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화그룹 가문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이것이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사업도 잘한다고 들었어요. 호호호-.”
“아, 감사합니다.”
세화의 어머니인 김승아 대화문화재단 이사장은 밤에도 열일하는 가정부들이 끓인 차와 과일을 먹으면서 진욱을 호의적으로 바라봤다.
옆에서 딱딱하게 이것저것을 묻던 세화의 아버지 김광훈 대화손해보험 전 회장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자네 혹시 사료사업 말고 다른 사업도 잘할 자신있나?”
“네? 아, 저는 제게 맡겨진 건은 모두 자신 있습니다.”
그 대답이 꽤나 패기만만했는지 김광훈은 그 뒤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철부지 딸아이 여기까지 바래다 줘서 고마워요. 내려갈 때는 우리 차 타고 가세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대리기사도 아니고 여기까지 왔다가 어떻게 내려가려고요?”
“이 근처에 회사가 있습니다. 거기 숙소가 있으니 택시 타고 금방입니다.”
“아~ 맞다. 학동의 그 빌딩에서 일하신다고 했죠? 호호호-.”
어째 김 이사장의 모습은 진욱의 어머니와 똑같아 보였다.
그저 사람 좋은 사모님으로 웃으면서 서로의 자녀를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하는 걸 보면 말이다.
진욱이 돌아갈 때, 이미 밖에는 대형 세단과 수행비서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기, 오늘 감사했어요.”
“아, 네.”
“제대로 인사해야지.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호호호-.”
김 이사장은 은근슬쩍 세화를 밀어주면서 진욱과 아이컨택을 하게 했다.
진욱 역시도 그 상황이 많이 쑥스러운지 인사 이후로 차에 탔다.
그리고 학동 아성펫푸드 사옥에 들어온 뒤로 대표실 안에 만들어 놓은 휴게실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
* * *
다음 날 대략적인 보고를 받으려고 아버지에게 전화했지만, 역으로 들리는 건 ‘어제 처가댁 만나 뵀냐?’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아, 뭐 벌써부터 처가댁이에요?”
[야이 눈치 없는 녀석아! 지금 대화그룹도 너 사윗감으로 밀어주는 거 딱 안보이냐?]
“지금은 그거보다 우리 회사가 먼저죠.”
[본사는 걱~정하지 마! 지금은 네 쪽이 더 급해 보인다.]
“네~ 네~ 알아서 할게요.”
진욱은 통화를 마친 뒤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뒤로 진욱을 찾아온 전무 진영이 다가와 서류를 주면서 말했다.
“야, 하진욱. 너 결혼 언제 하냐?”
“아, 진짜…….”
“오죽 급했으면 아침에 엄마가 다 전화를 하냐? 사진도 보내 주더라. 꽤 이쁘던데?”
“일 이야기좀 하자. 일 좀!”
“일 이야기야. 그 김세화라는 아가씨 지금 밑에 상가에 있거든.”
“……?!”
“네가 말했다며? 펫드레스에 옷 몇 벌 준다고.”
“…….”
“나중에 너한테 다 청구할 거다.”
진욱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바로 1층으로 내려갔다.
명품 의류를 입은 채 고양이 케이스를 들고 돠 아성펫푸드와 펫드레스 대리점에서 이것저것 보고 있던 세화는, 진욱을 보고 활짝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부사장님. 어제 잘 들어가셨나요?”
“직접 오신 거예요?”
“네, 입혀 보려고 우리 오리온도 데려왔어요.”
케이지를 열자 안에서 조심스럽게 나오면서 길게 하품을 하는 노란색 고양이가 있었다.
그러더니 바로 진욱을 향해 다가와 은근슬쩍 다리에 부비대서 비싼 정장에 털이 한가득 묻어났다.
“안 돼!”
세화가 바로 달려와서 끌어안자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보고 진욱은 이 친구도 동물은 좋아한다는 것은 확신했다.
그렇게 매니저와 같이 다양한 고양이 옷들을 입혀 보고 결제는 모두 진욱의 카드로 진행했다.
연인 간 쇼핑을 사람 옷도 아니고, 동물 옷으로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안에서 커피도 마시며 싫은 내색 없이 하나하나 간식을 본 세화는 진욱의 배웅을 받으면서 수행비서의 차에 탔다.
“후우-.”
점심까지 겨우 일과 하나 끝낸 진욱은 바지와 자켓에 잔뜩 묻은 고양이털을 하나하나 털어 내면서 다시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영이었다.
“진짜 사돈댁이 제대로 푸쉬해 주려나 보네?”
“아 쫌! 그만해.”
“뭔 소리야? 지금 대화무역상사에서 제안서 온 거 때문에 하는 말인데.”
“음?”
진영은 네일아트 가득한 손가락으로 책상에 있는 파일을 가리켰다.
진욱이 그것을 펼쳐 보자, 방금 온 메일을 출력해서 정성스럽게 코팅까지 한 대화그룹 제안서가 있었다.
진욱은 코팅까지 해 준 정성을 생각해서 하나하나 읽어 봤고,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어, 뭐야? 이거 이제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뭐랬어? 진짜 사돈댁이 푸쉬해 주는 거 같다니까?”
지난번 진영과 같이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펫용품 박람회에서 강아지 옷 패션쇼에 대한 스폰서를 대화무역상사가 한다는 제안이었다.
“참, 나… 하하하!”
수수료 때문에 대기업 거래를 생각 못 할 정도로 콧대 세던 대화였는데, 그들이 아성사료그룹이 준비하는 일본 강아지 옷 패션쇼에 스폰서를 맡아서 국내에서 일본으로 행사에 참여할 기업들을 일체 지원해 준다는 제안이었다.
물론 아성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이나 소상공인들도 원한다면 요코하마 펫 패션쇼에 가는 일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이걸 직접 보냈다는 것은 답이 뻔했다.
“이거 완전 꿀이잖아? 우리 경비 추산한거 다 빼고 몸만 가도 얘들이 지원해 준대.”
“후우- 그럼 준비해야지. 이번에 누나가 직접 가서 확실히 해결할 수 있겠어?”
“당연히~ 가능하지. 일본에도 나만큼 옷 디자인하는 애 없을걸?”
세계적인 의상디자이너를 꿈꾸면서 비싼 돈 들여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진영이었다.
비록 그 꿈이 미묘하게 바뀌어서 현재 사람 의류보다는 펫드레스로 이름을 알리게 되어서 이쪽으로 아예 진로를 틀었고, 이번 건이 본격적으로 세계 진출을 위한 교두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진욱은 그런 누나를 믿고서 이쪽에서도 본사 기획안 보내서 통과시킬 테니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사료와 수제 간식에 이어서 강아지 의류까지도 수출길을 노리는 상황이 되었고, 그동안 다른 일을 위해서 바로 모니터를 켰다.
* * *
진욱은 원주 개발권을 두고서 대화리조트와 마지막 협상을 마쳤다.
먼저 청과 아성사료간의 우선협상권을 대화리조트에 양도했다.
대화리조트와 강원도청의 협상은 빠르게 진행됐고, 곧바로 원주 치악산 일대에 새 리조트 사업권에 대해 인허가가 나자 그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그 상황에서 진욱은 대화리조트와 협상해서 원주 드림월드는 지난 강원도청의 3년 위탁 이후로 ‘10년 위탁경영’이라는 제안을 받았다.
덕분에 아예 이름도 ‘아성 드림월드’로 확실하게 못을 박아놨고, 기존 고용인원들 역시도 그대로 승계해서 무난하게 동물원 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대화와의 거래가 끝난 뒤로, 진욱은 말이 나온 김에 규완과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국내에서 있을 곳은 다 있고, 다음은 해외겠죠?”
“어느 쪽으로?”
“일단은 물질이죠.”
물질이라는 말에 규완은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지.”
AD아쿠아리움과 대화리조트, 아성펫카페에 대한 본격적인 해외 진출 선언.
진욱은 그것을 두고서 다음의 수를 제안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 부사장이 생각하는 곳은 어디에요? 이제는 매부 사이 될 수 있을텐데 말해 줄 수 있어~?”
“아, 이사님.”
“에이~ 확정된 거 아니었어?”
이쪽도 세화 이야기를 가지고 키득거리면서 놀릴 때, 진욱은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먼저 지도와 관련 자료를 꺼냈다.
“인도양 쪽으로 진출을 해야 하는데, 동남아 휴양지 쪽이 어떨까 싶네요.”
“동남아? 우리는 중국을 생각했는데?”
“대화리조트가… 중국 진출이요?”
“응, 제일 큰 시장 아닌가?”
진욱은 그 말을 듣고서 잘못하면 진짜 작살 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재벌가 사람들을 향해 식은땀을 흘렸다.
“요새는 진짜 중국이 대세야. 로타그룹 소식 들었어? 면세점하고, 백화점 사업으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고, 신누리 쇼핑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하, 하하…….”
딱 1년 뒤에 생길 일이 하나 있었다.
한국 정부와 미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고고도 대공 미사일을 국내에 배치한다.
그 덕분에 가장 난리를 친 것은 중국, 그것도 공산당 수뇌부였다.
덕분에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목줄부터 잡은 중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기업 자금부터 옥죄면서 ‘한한령(限韩令)’이라는 경제재재까지 하게 된다.
그 전에 중국 머니로 진출했던 중국 유통기업은… 바로 이거였다.
“이거예요. 이거!”
진욱이 목을 긋는 시늉을 여러 번 하자 규완은 크게 웃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아이고~ 우리 하 부사장은 중국을 싫어하는가 봐? 근데 어쩌나? 지금 내가 그룹 내에서 TF팀으로 중국 진출 건을 몰아붙인 뒤여서 말이야.”
“아, 그럼 뭐… 사실상 중국에 대화리조트랑 아쿠아리움 올라가는 건 금방이겠네요?”
“뭐, 그렇겠지. 그게 다 내 공이 되는 거고.”
진욱은 그 순간 쓴웃음을 지으면서 플랜B부터 생각했다.
“음, 일단 중국 내에서 리스크를 최대한 줄일 방법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그쪽이 꽌시 좋아한다고 하니, 상하이 쪽의 간부들부터 포섭한 다음에 구워삶으면 어떻게든…….”
“뭘 그렇게까지… 우리 대화그룹이야. 그렇게 쉽게 안 말아먹어.”
“네, 잘되실 겁니다. 일단 초반은…….”
진욱이 멋쩍게 웃으면서 FM적인 사업 이야기만 해 주면서 중국 시장에 대한 리스크만 말해 주자 규완은 일단 귀로 들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검토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진욱은 규완이 떠난 자리에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재수도 드럽게 없지. 하필 한한령 1년 앞두고서 중국 시장을 진출한다니… 그것도 후계자 전권 들고…….”
진욱은 이제와서 말릴 수도 없고,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을지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