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룹화 이후의 행적
2015년 2분기.
상록시 아성사료 본사에는 수많은 검은색 세단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전부 아성사료그룹의 임원들, 그리고 그중에 검은색 BMW 차량 한 대도 멈췄다.
덜컥-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다른 임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인사할 때, 진욱은 건달 패거리도 아니고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양반들이 이러는 것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들어가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부사장님.”
진욱을 따라 나란히 걷는 임원들을 보고 진욱은 추가로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성사료가 그룹 이름을 붙이면서 임원실로 향하는데, 거기서 ‘회장’ 직함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기다리는 자리였다.
끼이익-
“아, 하 부사장 왔어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성사료 개편으로 인해 새로 영입된 사장 김유현.
진욱이 강남 사옥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을 때, 본사에서 아버지와 같이 주력사업을 컨트롤하기 위해 모셔 온 사람이다. 과거 공기업 임원 출신으로 현장에 오래 있던 사람이었다.
진욱에게 있어선 아버지 옆에서 보수적으로 자산 운용을 하면서 자신과 같이 굿캅-배드캅으로 활약할 만한 인물이니 상호 예우를 갖췄다.
“회장님 오십니다.”
비서실 직원의 말에 모두가 일어났고, 사장실에서 이름을 고친 회장 하상만이 나왔다.
그래도 이제는 동네 공장 사장이 아니라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근엄한 이미지의 회장님 태가 났다.
자리에 앉은 뒤로 회의 서류를 확인하기 위해 품 안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낸 상만은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흰 이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자~ 딱 15분 만에 끝내지? 노인네랑 오래 말해 봤자 남는 게 뭐가 있겠어?”
작은 웃음소리가 퍼지면서, 회의는 딱딱함이 사라지고 훈훈한 분위기에서 각 계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끝이 났다.
회의가 마친 뒤로 진욱은 잠시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회장실로 향했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다 네 공이지.”
“과찬이십니다. 회장님의 판결이 언제나 옳았습니다.”
“야~ 진욱아! 직함 하나 바뀐 거 가지고 우리 너무 그러지 말자?”
역시나 회사 규모가 커지고, 그룹 회장이 되었어도 진욱 앞에선 여전히 너그러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하는 상만이었다.
회장님이 먼저 그러는데 진욱 역시도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요새 여기저기 바쁘시죠?”
“어이구, 난리도 아니야. 평소엔 거들떠도 안 보던 양반들이 알아서 골프 약속이다, 술 한잔하자 난리들이더라고?”
중소 아성사료 때와는 다르게 아성사료그룹은 출범 이후 여기저기에서 연락을 받았다.
상록시장은 기본이고, 경기도지사에, 수원지검 산하 지방청장들, 또한 국가직 공무원 사람들과 대기업과의 거래도 이제는 최소 임원급의 MD를 만났다.
현재 아성사료그룹은 기존 아성사료가 지주회사 아성사료.
그 밑으로 진욱이 강남 사옥에서 운영하는 아성펫푸드, 그 산하에 AD아쿠아리움.
이 자리에는 안 오고 대리를 보냈지만, 역시 강남 사옥에서 운영하는 아성펫드레스.
다음으로 처음에 지었을 때는 재벌 놀이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가문의 이미지 관리와 각종 자선사업, 그리고 주주총회의 오너 일가가 꽉 잡고 있는 아성재단이었다.
참고로 아성재단은 큰아버지 일가의 지분 방어와 조상님 금칠을 위해 위해 그쪽 역시도 적지 않은 지분이 있었다.
“그래, 앞으로 준비하는 신사업이 뭐뭐 있어?”
“할 거야 많지만, 일단은 전에 임시로 해 놓은 것들을 확정으로 만들어야죠.”
“그래?”
“일단 ‘원주 건’도 해결해야 하고요.”
“아, 맞다! 그게 있지?”
“전에 말한 대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래, 그래~ 하고 싶은대로 다 해 봐.”
직함은 높아도 이제는 아들과 고용사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높으신 분들과 친분 다지는 자리에 집중하게 된 상만.
그렇게 아버지에게 전권을 받은 부사장 하진욱은 회의와 면담을 마치고서 바로 강남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이래서 강남 사옥의 회의는 상록 본사와 대비되게 점심식사 이후 오후에 진행시켰다.
* * *
“누나, 이것 좀 봐줘.”
“뭐야, 이거? 아, 도쿄 애완견 패션쇼? 나도 이거 봤어.”
진영은 동생이 전달해준 자료를 보면서 안 그래도 이거 준비를 위해 예산안을 편성하고 있었다.
나이가 곧 마흔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싱글라이프를 즐기며, 언론이나 SNS에서도 큰 화제가 되는 골드미스 멋쟁이 사장님으로 통하는 둘째 누나였다.
진욱은 딱히 집안 가족들끼리의 사생활을 생각하지 않으니 그건 알아서 하라고 하며, 사업에 대한 논의를 했다.
“펫드레스 사업 말이야. 웬만하면 다 참여해 주고 스폰도 좀 해 주고 그래.”
“갑자기? 언제는 또 원단 품질하고, 디자인만 신경 쓰라면서?”
진욱은 대답 대신 쌓인 서류 중에서 준비하고 있던 기획안 하나를 건네줬다.
진영은 파일을 열어 그것을 천천히 읽어봤고, 눈이 점점 커졌다.
“와~ 우리가 직접 한다고?”
“국내에도 이제 그런 게 필요하잖아? 펫푸드 박람회처럼 서울시나 부산시에 지원도 받을 수 있고.”
진욱이 기획하고 있던 안건 중 하나는 국내에서 추진하는 ‘강아지 패션쇼’였다.
대형견, 중형견, 소형견 파트로 나뉘고, 해외 참여도 독려하면서 세계적인 행사로 만들며 아성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전까지 강아지 의류는 소규모의 주먹구구식에 아성펫드레스가 나와서 그나마 대형마트, 백화점 납품으로 이름값을 겨우 유지하는 상황이니 장기적으로는 필요한 일이었다.
“암튼 알았어. 아, 맞다. 박 이사 아저씨 딱히 뭔 말 없었지?”
“이사님이 아니라 회장님은 무슨 말 있었지. 임원회의 안 올 거면 그 직함 내려놓으래.”
“아, 뭘 일일이 거길 가야 돼? 차라리 여기를 본사로 쓰자니까!”
학동 사옥 규모를 생각하면, 여기를 본사로 써도 문제될 게 없었지만 아버지의 확고한 의지로 아성사료는 상록의 향토기업으로 남기겠다고 선언했다.
덕분에 진영은 연구개발임원이나 시간이 걸려도 꼭 내려가는 진욱과 다르게 언제나 대리인을 보내고 자기는 강남에서 일을 하곤 했다.
“그래 뭐, 그건 별수 없지. 아무튼 도쿄 애견 패션쇼 준비 잘해 줘. 곧 있으면 일본 유통업체 직납도 고려하고 있으니까.”
“오케이~ 품질이나 디자인은 걱정하지 마!”
진영이 자신만 믿으라며 엄지를 들고 돌아갔고, 진욱은 나머지 서류들도 하나하나 살펴봤다.
“[직영점 청년취업 패키지]… 이거는 서울하고 인천 둘다 오케이 싸인했고, 경기도청하고 협상을 해야 하고… [환경배합사료 인증제도], 이거는 장관 바뀌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고… 그 다음은…….”
중견기업이 돼서도 바뀌지 않는 국가지원 사업들과, 거기에 따라 늘어난 국가기관 규제들에 맞추느라 진욱은 남들의 배 이상으로 서류를 꼼꼼이 살피고 그것들을 해결했다.
그 옛날 컨테이너 사무실 안에서도 남들 서넛이 하는 것을 혼자 다 처리했던 짬밥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도 퇴근 시간에 맞춰 서류를 정리하고, 남은 것은 야근 대신에 밑에 직원들 빨리 퇴근하라고 챙겨서 집에 가져가 해결할 셈이었다.
상록 본가에 돌아온 진욱은 남은 일처리를 하다가 아버지를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주에 원주에서 드림월드 인수 진행 끝내러 갑니다.”
“그것 때문에 말 나왔는데, 지금 도지사가 잘해 줄지 모르겠다?”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때 계약했던 도지사와 지금 도지사가 같은 당인데.”
상만은 자신도 들은 이야기에 대해 알려줬다.
“강원도가 이번에 동계올림픽 준비한다고 도 내에 있는 공원들 꽁꽁 싸매더라, 돈 더 주는 대기업들이 있다고 말이야.”
“뭐, 그렇기는 하겠는데, 미리 계약이 있으니까요.”
진욱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다음 주 출장을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근데, 너도 이제 장가갈 때가 되지 않았냐?”
“저 만으로는 아직 20대예요.”
“얌마, 신문 빼고 누가 만 나이로 쳐? 그래도 네가 외아들인데, 결혼 준비 슬슬 해야 하지 않겠어?”
일에 매달리면서 청춘을 보내, 연애 한 번 하는 꼴을 못 봤던 아들이었다.
회사 오너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우수 핵심 인원이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슬슬 생각이 들 만도 했다.
“때 되면 다 알아서 하죠. 큰누나나 진성이 형처럼요. 아우, 조카들 진짜 예쁘더라.”
“아이고, 진영이고 너고 뭔 그렇게 남 일 말하듯이 하냐?”
그때 원숙이 가정부가 깎은 과일을 가져오면서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렇지 않아도 사모님 모임에서 너 관심 있어 하는 분 있는데 연락해 볼까?”
“어머니, 요새 그런 모임도 나가십니까?”
“백화점 다니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초대하더라고 호호호-.”
원숙은 휴대폰으로 모 대학 총장 손녀라고 하는데, 나이도 맞는 것 같다면서 한번 보라고 하지만 진욱은 그럭저럭 이쁘긴 하지만 아직 생각 없다면서 넘겼다.
* * *
원주 치악산에 위치한 드림월드에 왔을 때, 진욱은 그때의 그 폐허 속에서 고통받던 동물들을 생각하며 감회가 남달랐다.
지금은 강원도 최대 규모에 관광지와 데이트 코스로 상당히 각광을 받는 곳이었고, 매출 역시도 짭짤해서 이상이어서 투자한 값은 확실히 했다.
“이것도 진짜 잘못하면 엄한 놈한테 돈 뿌릴 뻔했지…….”
조폭들이 낀 유령회사가 잡고 있어서 잘못하면, 헛짓거리할 뻔한 일이었다.
새로 단장된 드림월드 안에 호랑이, 사자, 기린, 곰 등의 동물과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소형 동물들의 체험학습관은 인근 유치원에서 온 아이들이 사육사와 교사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진욱이 홀로 자신이 만든 역작을 보고 있을 때, 기다리고 있던 전화가 왔다.
* * *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미 약관이 이렇게 돼 있는데.”
“유감입니다. 하지만 도지사님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셔서.”
강원도청 관광부의 양현무 국장은 난처한 얼굴로 연신 진욱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국장님, 저희 잉크 말랐다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3년 위탁으로 경영 정상화가 되었고, 이후 우선순위로 저희가 인수하게 된 게 원래 룰이에요.”
“네, 네~ 압니다. 하지만 부사장님. 신임 도지사님이 조례안으로 다른 협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에 출장 오기 전에 아버지가 넌지시 던졌던 말이 그대로였다.
신임 도지사가 강원도 평창올림픽을 앞두고서 관광개발을 위해 치악산 공원과 원주 드림월드, 강원미술관과 캠핑장 일대의 개발권을 타 기업과 협상을 한다는 말이었다.
“계약안에 나온 위약금 그 이상을 드리고 협상을 하는 게 어떻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허어- 위약금이 문제가 아니죠. 저희는 동물원과 인근 개발권이 꼭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 당시 계약한 위약금의 두 배를 쳐 준다 하더라도, 만족할 수 없었다.
진욱은 죽 쒀서 개 준 꼴도 아니고, 이제와서 도지사 직권으로 아성사료보다 더 큰 대기업과 협상을 한다고 하니 역시 정치인들 함부로 믿으면 안 되겠다며 혀를 찼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다른 기업이 원주에 와서 원주시장님과 강원도청이 모인 자리에 협상 논의를 한다고 합니다.”
“어딘데요? 제가 찾아가서 협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거’여서.”
양 국장은 입으로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면서 ‘오프 더 레코드’라 말 못 한다는 말만 했다.
“후우-.”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실 이 사람도 총알받이로 와서 이러는 것일 테고, 진욱은 백날 여기서 날뛰어 봤자 도지사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면, 이곳을 노리는 대기업과 협상을 해야 했다.
진욱은 1차 협상에서 파투가 난 뒤로 숙소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형님.”
[응~ 우리 부사장님, 어디에요?]
“잠깐 출장 나왔습니다.”
[강원도요?]
대화리조트 개발사업부 임원으로 오른 김규완 이사.
몇 번의 술자리 이후로 형님 동생 하기로 한 사이인데, 그가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
“저 강원도 오신 거 어떻게 아셨어요?”
[응~ 나도 지금 거기 가거든. 강원도청하고 이야기하느라.]
“저기 혹시… 지금 오시는 곳이 원주는 아니죠?”
[맞는데? 아, 부사장 원주에 있어? 그럼 이따 밤에 술 한잔 또 해야겠네?]
진욱은 순간적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