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감히 어딜 노려?
진욱은 차에 탄 뒤로 부산공장과 펫푸드 대리점들을 한 바퀴씩 돌다가 바닷가 앞에 앉았다.
푸른 바다를 보면서 저 너머로 야경이 멋진 대교와 간간이 불꽃놀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정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진욱은 스마트폰으로 상황을 연신 보면서 주변에 회사 주가에 대해 알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내일 아침 장 열리는 대로 바로 경영권 방어를 위한 주식 매수를 위해서 움직이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중안무역 사장은 지나가듯이 말해 준 말이었지만, 진욱은 그게 신호라고 확신했다.
“역시 ‘원’ 사람들 맞다니까…….”
어디까지 인연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그들의 정체가 진짜라면 대기업 상사맨들보다도 뛰어난 국제정보력에 국내에서 돌아가는 것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진욱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의 먼지를 털고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해야 할 게 많았다.
다음 날.
진욱은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떠나기 전 사촌 형의 전화를 받았다.
[진욱아. 이야기 들었다. 지금 계속 매수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부 백기사로 갈 거야.]
진성의 연락에 진욱은 역시 큰집이 제일 먼저 움직인다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나도 지금 아성산업개발 지분 사들이는게 있는데, 이번 건 잘 해결되면 정식으로 지분 교환해서 서로 윈윈하자고.”
모두가 아성이라는 이름을 쓰고 싶지만, 사실 오너의 형제기업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합치지 않은 그룹이었다.
물론 둘이 합친다면 벌써부터 수도권 일대에 알아주는 기업 집단이 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딱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 상록으로 올라올 거야? 이건 좀 집안 단위로 논의해야 하지 않겠냐?]
“아니야. 지금부터 대비한다고는 해도, 할 일은 계속해야지.”
[어우, 바쁘기도 해라.]
“다음에 올라오면 전화줄게. 부산 있다가 바로 경주로 가야 하거든.”
진욱은 사촌 형과의 통화를 마치고서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다시 움직일 준비를 했다.
큰집이 확실히 백기사를 해 준다고 해서 일단 방어선 하나를 구축했지만, 아직까지는 염려되는 게 많았다.
진욱은 부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바로 경주로 향했고, 거기에서 또 다른 장벽을 만들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산에서 경주로 도착한 진욱은 미리 준비된 경주리조트에 체크인을 했다.
리조트라고 한가롭게 놀려는 게 아니라, 여기 소속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숙소 안에서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펼쳐 놓고, 실시간으로 TV뉴스를 들으면서 주가 확인, 기업 소식, 그리고 앞으로 필요한 사업에 대한 기획안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몇 시간에 걸쳐서 방 안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네, 팀장님. 알겠습니다. 저도 지금 여기 안에 있습니다. 천천히 내려가지요. 네~.”
진욱은 통화를 마치고서 바로 옷을 벗고 샤워 이후 새 정장으로 갈아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나왔을 때, 로비에는 정장 차림에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진욱을 보고 다가왔다.
“아성사료의 하진욱 부사장님,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
“대화그룹 비서실입니다. 지금 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신데 저희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죠.”
정장의 남녀는 그룹 비서실 파견직원이라 소개하고 김규완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리조트 내에서도 VIP고객들만 이용할 수 있다는 고급 한정식집으로 안내한 뒤 건물을 감싸는 산의 경치가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똑똑-
“팀장님, 모셔 왔습니다.”
“네, 들어와요.”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김규완이 반갑게 진욱을 맞이했다.
“어서와요. 하 부사장. 승진 축하해요.”
“하하하, 팀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대화그룹의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욱을 잡고 앉으라며 자리를 내줬다.
“그렇지 않아도 진작에 이런 자리를 만드려고 했어요. 사업 논의를 하면서 우리 둘이 따로 밥 한번 먹은 적이 없죠?”
“괜히 지방까지 내려오신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에이~ 무슨 소리를? 여기 역시도 우리 대화리조트의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럴 때 한번 와 주는 거죠.”
대화리조트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그럴 만했다.
이곳이 바로 ‘온가족의 여행!’이라는 슬로건으로 리조트 내 애완동물 전용호텔과 아쿠아리움 카페 등의 아성사료가 입주한 테마시설들이 있는 곳이고 그 마케팅이 대성공을 거뒀으니 말이다.
은은한 가야금 소리와 함께 고풍스럽고 정갈한 한정식 메뉴들이 하나하나 올라왔고, 한복을 입은 직원들이 안내해 주는 음식을 진욱이 하나하나 먹었다.
“한잔하시겠어요?”
“아, 네.”
도자기 주전자로 서로 한 잔씩 채우며 쭉 마신 뒤로 그들은 훈훈한 분위기에서 사업 이야기가 나왔다.
“요새 아성사료는 별일 없죠?”
대기업이 협력사 경영인하고 으레 말하면서 인사치레로 한 말.
하지만 진욱은 거기서 바로 김규완 팀장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회사에 좀 별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네?”
“잘못하면 회사가 넘어갈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
딸그락-
순간 훈훈한 분위기에서 웃으면서 술 한잔하려고 온 김규완의 웃는 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의 눈썹이 이리저리 꿈틀거리면서 진욱을 바라봤고, 그러다가 뒤늦게 질문을 했다.
“당황스럽군요. 좋은 자리인 줄 알았는데, 아성사료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팀장님께서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회사의 이야기입니다.”
“아니요. 무슨 일인지 한번 이야기나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동안 아성사료 괜찮은 회사라 생각했는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저도 이런 말씀을 갑자기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말씀해 주시죠? 아성사료에 지금 무슨 위기가 있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거라면 도움을 드릴 수도 있는데요.”
정색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던 김규완이 도와주겠다는 말에 진욱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역시 이 사람도 이용철과였어. 빙빙 돌리지 않고 직구로 던지면 일단 상황 파악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바로 해답을 내놓겠지.’
진욱은 표정 관리를 하면서 씁쓸하단 얼굴로 천천히 운을 띄웠다.
“저희가 외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사업을 성공하고 있는데, 또 다른 곳에서 위기가 생기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증권가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데…….”
진욱은 천천히 운을 띄우면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놨다.
증권가에서 아성사료 인수 썰이 들린다, 해외에서도 아성을 먹어 치우려는 외부 자본이 있다.
그리고 김규완을 처음 만나기 전 제일식품이 아성사료의 펫푸드 사업부만 600억으로 매각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뒤로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놨다.
김규완은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정색하다가 이내 이해, 그리고 납득, 그런 다음 해결을 위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그래서 현재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 자사주를 계속 늘이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알았다면, 좀 더 도움이 될… 아니, 아직 썰로 퍼진다면 충분히 지금도 가능하겠군요.”
“네?”
“그동안 아성사료라는 회사가 그룹 내에서 많은 도움이 된 것 잘 압니다. 그럼 저희도 뭐가 있어야겠죠.”
“……!”
대화유통 펫푸드 간식 납품.
갤럭시아 백화점 명품관에 수제 간식 프리미엄 상품 전시전.
대화아쿠아리움 희귀동물, 관상어 사료 납품 및 친환경사료 국산화.
그리고 오너의 장남이 추진하는 테마 카페 사업에 공동 사업자.
생각해 보니 진짜로 국가지원만큼이나 대기업과의 인연이 많았고, 그 몫은 거의 다 하진욱이 만든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하죠. 저희가 백기사가 되겠습니다. 뭐, 말도 안 되는 자금 공세가 있지 않고서는 저희를 막기 힘들 겁니다.”
재계서열 8위의 대화그룹이 직접 아성사료의 백기사가 되어 주겠다고 나섰다.
진욱은 원래 그럴 건 알았지만, 확정되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것으로 삼정이나 현기급의 재계서열 1, 2위의 초거대 기업이 아닌 이상 아성사료를 날름 처먹을 수 있는 적대적 인수합병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화그룹이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도 있겠지만 그것은 또 그것에 따라 대비책이 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그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아성도 이제 전문적으로 재무컨설팅 회사가 있어야겠군요?”
“아, 전에 팀장님이 추천해 주신 유리금융지주에서 유리투자증권쪽으로 자문 계약을 준비 중입니다.”
“준비 중이요? 흐음, 진작 알았다면 우리 쪽도 유능한 분들 많은데…….”
“……!”
“혹시 생각 있으면 이쪽도 알아보세요.”
김규완은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 진욱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줬다.
거기에 적힌 이름은 [대화투자증권 투자자문부문 이경원 사장]이라는 명함이 있었다.
‘어이구, 다이렉트로 증권사 사장 명함을?’
재벌 찬스라는 게 이럴 땐 참 대단했다.
이 명함으로 바로 연락하고, ‘김규완 팀장님 추천으로 연락했습니다.’ 한마디 하는 순간 상록시의 아성사료 본사로 바로 금융맨들이 달려올 것이다.
“자~ 그럼 다시 한잔할까요?”
“오늘 큰 도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한 잔 올리죠.”
“하하하, 그래요.”
진욱은 이것으로 아성사료를 노리는 녀석들에게 한 방을 먹일 준비를 마쳤다.
시간 끌 것도 없이 오늘 자리 끝나는 순간 바로 새벽에 출발해서 오피셜을 때릴 거다.
* * *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대화리조트에서 특색 있는 테마카페로 아쿠아리움 카페를 오픈했는데요? 협력사인 아성사료에 400억을 추가 투자했다고 합니다.]
[네, 이번 일은 단순 기업 상생뿐만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경영에 나서는 대화그룹 김 회장의 장남, 김규완 팀장의 행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성사료의 하진욱 부사장은 최근 내외적으로 매각설이나 인수합병설이 들리는 가운데,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직접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하진욱(아성사료 부사장): 기업이 아이디어를 만들고! 새 시장을 개척하는데, 그것을 날름 먹을 수 있는 양아치는 없을 겁니다. 아! 죄송합니다. 양아치 워딩은 방송에 못 나오나요?]
생방송 중에 한 말에 기자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오는 순간, 제일그룹 회장실에서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콘을 든 이현욱이 있었다.
삑-
TV가 꺼진 순간 이 회장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움켜쥔 채 손사래를 쳤다.
“이제 됐어. 저기 건드리지 마.”
“회장님!”
“그만해라. 언제까지 악감정 가지고 계속 그럴 거냐?”
“이미 물밑에서 수습한 거 보면 대화 들이받고 그냥 먹어 치울 수 있습니다. 저 새끼들 개털된 거 대화가 돈 꿔 준 게 딱 보이지 않습니까?”
이성철이 어떻게든 다시 움직이려고 했지만, 이현욱은 여기선 회장의 직권으로 딱 잘라 말했다.
“됐어, 그만해.”
“회장님!”
“너 진짜 그놈의 개밥 하나로 평생 싸울래? 제약 계열사랑 방송은 아예 안 갈 거야? 그렇게 원한다면 제일식품 내에서 사료 회사 내가 한번 떼어 줄까?”
“…….”
재벌 오너 아들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움직이기엔 이미 판이 너무 커졌다.
그래도 한 방은 먹이고서 다른 사업에도 손을 쓰려고 했는데, 1년에 가깝게 ‘그놈의 개밥 공장’ 문제로 아들놈이 집착하니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정말 미치도록 짓밟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어디서 원군을 데려와서 방패를 들이미는 회사가 괘씸하긴 했지만, 제일그룹은 딱 여기까지 하고 끝내기로 했다.
이것으로 제일그룹의 아성사료 적대적 인수합병 계획은 완전히 백지화됐다.
그리고 아성사료는 무난하게 대화의 자금을 받고 성장하고, 유예 기간 이후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산하 법인을 분할하고 기업 집단으로 순조롭게 달려갈 수 있었다.
제일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라고 생각했는데, 긁어 부스럼으로 늑대를 만들어 준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