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잔잔바리 모으기
아성사료는 상당한 위기의 상태였다.
비상대책 경영팀이 만들어졌고, 당장에 제일식품 OEM에 대한 큰 빵꾸를 메꾸고 기업을 정상화시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대기업 재채기 한 번에 중소기업은 폐렴이라고… 진짜 큰일이긴 합니다.”
“아, 이 이사! 그러니까 비상경영팀 만들어진 거 아니야?”
상만은 벌써부터 축 늘어진 임원들을 달래면서 개선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받았다.
“일단 제일식품과 다음 분기 계약을 앞두고서 미리 사 놓은 게 많이 있습니다. 그걸 보관 잘해서 다음 분기 원자재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겠습니다.”
자원팀 유 이사의 말에 상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홍보팀은 이 기회에 소셜 커머스 등의 오픈마켓과 기존 대리점에 있는 제품을의 특별 할인전을 해서 당기 현금을 마련해 보는 기획안을 준비했습니다.”
사장 경리로 시작해서 지금은 홍보팀장에 올라와 있는 이한미 부장의 말에 상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승낙했다.
“그래, 일단 월급 줄 돈은 모아놔야지. 할인전 진행하고, 재고 생각하지 말고 아낌없이 뿌려. 내가 2공장 김원식이한테 수제 간식하고 습식 사료 위주로 생산하라고 말할 테니까.”
원래 아성의 본사이자, 지금은 2공장으로 격하된 곳에서 공장장으로 있는 김 상무를 통해 당장 팔 수 있는 물건들 위주로 생산을 돌리기로 했다.
“사장님, 그럼 저는 농협과 수협 쪽으로 추가 융자를 한번 진행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신제품을 조건으로 프로젝트당 대출을 받는다면, 이번 분기 넘어가는 데 문제없을 겁니다.”
순간 멘탈이 나갔지만, 그 뒤로 차분하게 다잡은 이 이사가 재무 파트에서 움직이겠다는 말에 상만은 서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이거 이번에 수출 준비하는 업체들이야.”
“아, 네! 사장님.”
“정 안 되면 이걸로 수출신용보증 떼서 수출 관련 대출 받을 수 있으니까 잘해 보자고.”
물론 이건 진짜로 최후의 수였다.
수출용으로 만든 공장의 제품을 가지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 수출하는 수출대금을 담보로 잡고서 당장에 불을 끄기 위해 대출로 당겨쓴다는 것. 하필 환율도 점점 내려갈 때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한 명이 있었다.
“자~ 다들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제 비상경영팀장님 이야기 한번 들어 볼까?”
메인 이벤트는 역시 마지막에 봐야 제맛이다.
진욱은 지금 나온 회의 내용을 모두 적어 놓은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가 생각한 건 일단 여러 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빨리할 수 있는 거는 역시 정부 지원이죠.”
“네? 정부 지원이요?”
“상무님 그건…….”
다른 임원들의 얼굴에 염려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미 아성사료는 중기청과 지자체의 지원을 최대한으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이 이후로는 손을 내밀어 봤자 내년 예산 편성을 기다리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당장에 국회 내에서도 기업지원정책으로 추경예산 나오는 것만 해도 여야가 멱살 잡고 싸워 대는데 어디서 또 나랏돈을 받아오겠는가?
“하 상무, 그거 우리가 많이 도움 받기는 했어도 더 이상 받을 데가 없잖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나라 곳간이 말라붙은 거 보셨나요?”
“아니 그럼 어딜 또 알아보려고?”
재정경제부, 환경부, 농림수산식품부, 경기도청, 상록시, 부산광역시, 서울시청, 이렇게 받아 놓고 또 긁어 받을 때가 있다?
과연 진욱이 또 어디서 펜대 공무원들한테 혀놀림으로 예산을 받아올지 이건 정말로 궁금했다.
“일단 관련 기획 오늘까지 준비하고, 내일 바로 움직일 겁니다.”
“뭐?! 야, 무슨 기획을 하루 만에 뚝딱하고 정부 사람을 만나?”
“그만큼 간단한 거니까요.”
“……!?”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남들이 팀 단위로 야근해 가면서 낑낑거리는 회사 사업 기획안을 혼자서 암산 때리듯이 한 다음에 바로 처리하겠다고 나서는 저 자신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이미 상만을 포함해 모든 임원과 간부들은 이번에도 진욱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기대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진욱 역시도 무수한 시선 속에서 자신을 믿으라며 엄지를 올렸다.
* * *
그날 밤.
진욱은 이번 사태에 대해 제대로 멘탈 깨진 용철의 전화를 받았다.
얼마나 술을 먹었는지 혀가 꼬여 있는 목소리인데, 그러면서도 할 말이 많은지 진욱에게 많은 하소연을 했다.
[미안하게 됐다. 이성철이 그 개씨…….]
“어우- 욕 안 하셔도 돼요. 저도 열받을 일이지만.”
큰집 회장 일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로 현재 있는 케이블 인터넷사업부는 조만간 매각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사실상 매각 이전의 회사에 짬처리로 보내고 그 뒤로 자리 몇 개는 주겠지만, 그 상황에서 용철과 부회장은 다시는 요직을 차지하지 못하고 임원 자리 전전하며 먹고살 수준만 되는 거고 왕권은 이성철에게 넘어갈 것이다.
“뭐, 제일식품이 나중에라도 다시 거래 요청을 하겠죠.”
“한국 마쓰모토를 OEM 공장으로 쓸 거래.”
용철의 말을 들은 순간 진욱 역시 순간적으로 혈압이 올랐다.
“와~ 진짜 양아치네?”
그동안 제일과 아성사료의 관계, 그리고 대립했던 한국마쓰모토와 그 뒷배에 로타유통을 생각하면 진짜 팽해 버린 다음에 지들끼리 짝짜꿍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쪽이 단가도 더 싸게 불렀다고, 그동안 너네 회사 왜 푸쉬해 준 거냐고 쫑코 겁나게 먹었다.]
“아니, 그놈들이 더 싸게해 준다는 건 당연히 하청에 재하청 둔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후우-.]
그 뒤로 용철은 수많은 이야기를 진욱에게 털어놨다.
사료사업부 단독 상장 없이 계속 키워 나가다가 제일식품 CEO에 오른 성철을 위해 일감을 잔뜩 몰아주고, 최고조에 올랐을 때 상장해서 자연스럽게 다른 계열사들과 통폐합하면서 지주회사 지분을 점점 늘려나가고, 안정적으로 이현욱이 이성철에게 물려준 다음 명예회장으로 간다.
전형적인 삼정그룹의 방식이었는데, 본가나 분가나 그 패턴이 언제나 똑같나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어?]
“잔잔바리 모으기 좀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뭐 도와줄 게 있겠냐?]
“아닙니다. 지금은 푹 쉬세요. 다음에 또 술 한잔하죠.”
진욱은 통화를 마친 다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제일그룹 이 회장하고 그 아들 이성철이 이놈에게 제대로 엿을 먹일지 구상했다.
일단 급한 불을 다 끈 다음 서서히 폭탄을 만들어서 그 잘난 제일그룹에 연달아서 터트려 줄 것이다.
“그러려면 이거부터 해결해야지.”
진욱은 자기 방에서 나와 거실에 계신 아버지에게 다가와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요새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아 무릎 위에 강아지 올려놓고서 연신 쓰다듬고 있던 상만은 아들의 즉석 제안을 두고서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내일 바로 간다고?”
“사료협회 통해서 연락 요청했어요.”
“그래도 이동호 그 양반이 협회장 돼서 그건 편하네?”
“말씀드렸잖아요? 우리가 미는 협회장 되면 앞으로 창구 하나 더 늘어나는 거라고.”
이미 농수산식품부에서 내정하기로 한 인물을 대화그룹-전남대-아성사료라는 연합으로 인해 투표를 뒤집어 버려 올라온 이동호 협회장.
그는 아성사료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고, 언제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 했는데, 진욱이 그 찬스를 썼다.
“내일 바로 출장 갈 겁니다.”
“걔들도 그거 빨리 만들어 준다?”
“그럴 일이 있죠.”
“그나저나 이젠 과천도 아니고 세종이잖아?”
상만의 말대로 그렇게 뻔질나게 들락날락했던 정부과천청사는 이제 주요 부처가 전부 세종특별자치시로 넘어가 국가부처에 관한 사업 논의를 하려면 일일이 세종으로 가야 했다.
진욱은 미소를 지으면서 내일을 위해 이만 들어가기로 했다.
* * *
정부세종청사.
진욱은 그곳에 왔을 때, 두 번째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으로 푸른 공기를 만끽했다.
“여기서도 별별 일이 다 있었지.”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자신이 과장님 소리 들으면서 서류 뭉치에 치이던 게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들을 상대로 일을 해야 했다.
“하진욱 씨?”
“네, 안녕하십니까?”
고용노동부에서 온 인물들이 바로 손을 내밀었다.
“고용복지센터관 이범일이라고 합니다.”
“미래고용분석관에 양은지라고 합니다.”
악수 이후 바로 명함을 교환했을 때, 고용 분야 파트 5급 과장과 6급 계장이라는 것을 확인한 진욱은 이 정도면 적어도 산하단체 연락과 윗선에 대한 이야기는 할 만한 인물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성이 그래도 많이 성장하고, 근로기준법을 진욱 입사 이래로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서 그런지 방문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게다가 아성사료와 정부 간의 표창과 사업 아이디어는 공무원들 사회에서도 승진이나 요직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이제는 그들이 더 반겼다.
‘맨 처음 7급 한 명 왔을 때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지.’
진욱은 두 남녀 공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빈 회의실에 들어왔다.
“이번에 사료협회를 통해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드디어 저희도 아성사료와 일을 할 기회가 생기는군요.”
“아성 로또 터진 겁니까?”
“하하하! 로또까진 아니더라도 좋은 거 하나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과장이 농을 섞으면서 말하자 진욱 역시도 크게 웃었다.
그리고 커피를 가져온 양 계장은 진욱의 앞에 대접하면서 자리에 앉아 질문했다.
“안 그래도 최근 직군별 고용 동향 쪽 분석을 올리는 게 저희 업무인데, 사료협회 이야기를 듣고서 그쪽 일에 대해 뭐가 있나 여쭤봤습니다.”
“네~ 정확히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을 먼저 찾아가야 할까 생각했습니다만, 우선 중앙부처에 제안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직접 왔습니다.”
“네, 자료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진욱은 바로 그 자료를 넘겨줬고, 두 공무원은 어떤 흥미로운 게 있을까, 하고 보다가 점점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눈이 다시 가늘어지다가 연신 ‘이거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쪽 업계는 잘 모르는데 취업지원에 도움 되겠냐?’, ‘우리가 여기서 홍보비랑 지원금을 얼마나 써야겠냐? 통과될지 모르겠다.’라는 지극히 고용노동부다운 질문들을 계속 물었다.
진욱은 조리 있게 모든 것을 대답해 줬고, 며칠에 걸친 회의와 프레젠테이션을 고용노동부 간부들에게 선보였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나 세종시 호텔에 있는 진욱은 아버지에게 바로 사실을 알렸다.
[됐어?]
“네~ 내년부터 그쪽에 신설학과 생길 거고 외부인사 초빙 역시 사료협회와 아성사료 사람들로 나올 겁니다.”
[휴우- 그래도 다행이네.]
“이제 시작이죠. 며칠만 더 있을 겁니다. 장관님도 직접 보자고 하시네요.”
[아이구야! 그거 영광이다! 잘하고 와!]
“네~ 사장님.”
통화를 마친 뒤로 진욱은 아직도 아타셰케이스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들을 지켜봤다.
이건 원래 천천히 기획하면서 나중에 복지재단이나 정부사업안 큰 거 나오면 써먹으려고 했는데, 당장에 회사 빵꾸 메꾸기 위해 먼저 써 버렸다.
“쯧, 어쩌겠어?”
가방 서류 안에는 한눈에 봐도 그쪽 관련 내용이 많았다.
[장애인 근로복지를 위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아성사료 간의 협약.]
[산업인력공단-아성사료 간 폴리텍대학에 반려동물식품학과 신설 및 인력 지원.]
[신사업 개발 및 청년취업 기술지원 수제 간식사업 계획안]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조경제를 위한 반려동물사업 아이템 전시회.]
이건 일부로 지금 대통령의 그 ‘슬로건’을 빌린 나라에서 아주 좋아할 기획안이었다.
“그래도 이건 이때 아니면 절대 지원 못 받지.”
물론 이때 저 창조라는 단어 붙였다고 나중에 국감 나올 일은 전혀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