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밥 공장의 천재 아들-84화 (84/200)

84화 아성사료, 태풍을 만나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야, 2차 가고 싶었는데 집안에 일이 남아서.”

진욱은 용철이 초대해 준 제일그룹 회장 생일 파티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 엄청난 분들을 많이 만났고, 그중에서는 대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건실한 중견기업이나, 사학재단 거부, 그림자 실세라 불리는 정치인들이나 지역 유지들도 볼 수 있었다.

“명함 한번 잔뜩 받았네.”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

하지만, 이제는 아성사료의 이름이 커진 덕분에 받을 수 있는 대우였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긴 했지만, 적어도 2년만 지나면, 아버지가 하 사장이 아닌 회장님 소리 들으면서 서울 쪽에도 번듯한 건물 하나 매입해서 쓸 수 있을 거다.

“이대로만 가면 좋은데, 요새 너무 조용하단 말이지. 흐으음-.”

“…….”

“아, 제가 좀 시끄러웠죠?”

“아닙니다.”

제일그룹이 통이 크긴 했다.

오늘 차를 타고 온 사람 중, 거나하게 마신 사람들을 위해 외부에서 따로 고용한 고급세단 전문 운전수들을 배치해서 집까지 안전하게 모셨다.

“지금 어디까지 왔죠?”

“이제 서울 벗어나고 과천 지나갑니다.”

“흐음, 네.”

진욱은 와인으로 살짝 취기가 들었을 때 눈을 감았다.

아마 한숨 자고 일어나면 상록시에 도착할 것이다.

기사 역시도 안전운전을 하면서 늦은 밤 여유있게 달릴 때였다.

과천을 지나 안양 쯤 도달했을 때,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아, 죄송합니다.”

“천천히 받으세요.”

진욱은 쿨하게 손을 흔든 다음,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연신 존대를 하던 운전기사가 갑자기 차를 멈췄다.

“알겠습니다. 네! 네, 전달하겠습니다.”

“……?”

진욱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서 다시 눈이 떠 졌다.

그리고는 기사가 차에서 내린 다음, 바로 뒷좌석에 있는 진욱에게 고개를 숙였다.

“뭡니까?”

창문을 열고 물어본 진욱에게 당황함이 가득한 얼굴의 운전기사가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하진욱 상무님을 뵙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누가요?”

“제일그룹 비서실이라고 합니다.”

“……!?”

진욱은 잘 보내 놓고 갑자기 비서실에서 또 연락이 왔다는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막상 자기 휴대폰에는 아무것도 온 게 없었다.

지금이라도 용철에게 슬쩍 물어볼까 싶었지만, 이야기가 따로 없는 것을 봐서는 다른 쪽 사람인 것 같았다.

“제가 안 간다면요?”

“상록시로 차 한 대 따라온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꼭 보겠다는 건데… 좋습니다. 가지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제일그룹 내에서 뭔가 있다는 것을 확실했다.

기사는 진욱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바로 차를 돌렸다.

상록시에서 목적지를 바꿔 향한 곳은 최근 핫플레이스로 유명한 동탄 신도시.

그중에서도 이스턴-고려 호텔 산하인 호텔 동탄에 VIP로 초대받는 길이라고 했다.

‘제일그룹은 진짜 호텔 테라스 회담 좋아한다니까.’

용철도 그랬지만, 제일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차에서 내린 뒤로 바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막 냉장고에서 꺼낸 헛개차와 숙취해소제 알약을 건네줬고 그것을 먹은 뒤 구강청정제까지 뿌려서 술냄새를 지운 상태로 올라가게 됐다.

“근데, 저 보자고 한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나요?”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제일그룹 비서실 직원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진욱을 안내했고, 문이 열린 순간 그곳은 동탄 신도시 야경이 보이는 고풍스러운 카페였다.

“어서오십시오.”

카페 직원들이 공손히 인사한 다음 자리를 안내했고, 그곳에는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있는 중년 남성이 있었다.

“부사장님. 모셔 왔습니다.”

‘부사장?’

용철이 아니었다.

그와 비슷하긴 했지만,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였고 카페 안에서 담배 한 대를 태연하게 태우고 있는 인물을 보고서 진욱은 잘못하면 잡아먹힐 거라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용철 말고 다른 제일그룹 집안 사람이라니, 이거… 큰일인데?’

“하진욱 씨?”

“네, 아성사료 하진욱이라고 합니다.”

“앉아요. 술 좀 들었을 텐데 시원한 커피 한잔하시고.”

진욱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준비한 아이스 카푸치노 한 잔.

진욱은 일단 앉으면서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는 비서실을 통한 명함을 받았다.

[제일그룹 비서실. 이성철 전무]

‘이성철!’

진욱은 그 이름을 듣고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했다.

오늘 생일 파티를 거하게 했던 제일그룹 회장 이현욱.

그리고 그의 장남인 이성철은 현재 유력한 제일그룹의 승계 1순위 황태자였다.

용철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면서 본사 비서실부터 착실히 테크를 밟아 온 사람인데, 이렇게 진욱을 따로 불렀다는 건 뭐가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흐음.”

손가락을 까딱이자 그 짧은 테이블 거리에서 굳이 비서실 직원이 받아다가 직접 성철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정중하게 꽂아 준다.

“요새는 개밥이 가성비가 좋더군요?”

“하하, 네. 그렇습니다.”

익숙한 구도였다.

분명 처음에 용철도 차 안에서 자신을 부르고, 뭔가 존대인데도 기분이 나빠지는 틱틱 쏘는 말 위주로 대하던 것.

그리고 여기서 이 사람 역시 본론부터 꺼낼 거다.

아마도 같은 제일그룹 사람이라면 첫 시작을…….

“이것저것 수식어 붙이는 거 싫어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용철이 도와서 재미 좀 보셨다는데, 이젠 그동안 수고했어요.”

“네?”

아닌 밤중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다짜고짜 집에 가는 사람 밤에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그동안 수고했다니.

그것도 담당자 용철도 아니고 다른 인물이 말이다.

“슬슬 중견 올라간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빨아먹을 만큼 빨아먹었잖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거요.”

“하, 하하! 부사장님. 너무 갑작스런 말이군요. 혹시 무슨 사유라도 있습니까?”

“그걸 내가 왜 말해 줘야 하는데?”

“…….”

진욱이 용철에 대해 너무 편하게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재계서열 10위 안의 대재벌 사람들과 중소기업 자제의 대화이다.

“할 말 다 했으니 이제 가 보세요. 기사 새로 불러서 상록시까지 안전하게 보내 주죠.”

“…부사장님.”

“더 할 말 없는데요?”

진욱은 순간적으로 퓨즈가 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동의라고 하셨습니까?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고요?”

“하진욱 씨, 용감하네? 부사장 대 상무니까 뭐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

진욱은 싸늘한 성철의 말에 입술을 짓씹으면서 바로 돌아섰다.

그 뒤로 성철은 손가락 한 번 까딱이는 걸로 제일그룹 비서실 두 명을 바로 동행시켰다.

그리고는 담배 한 대를 물자 바로 옆에 직원이 불을 붙여 줬다.

“후우- 용철이 새끼는 뭐 저런 것들을 끌고 대권을 노렸냐?”

생각해 보니 웃긴지 피식 웃으면서 사촌 동생을 마음껏 비웃는 성철이었다.

* * *

“제일식품 사료사업부… 이번 분기 끝으로 위탁생산 종료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얼마 전에 3년 계약 추가로 한다면서요?”

“위약금은… 섭섭하지 않게 준단다.”

위약금이라도 챙겨 주는 게 진짜 제일식품의 마지막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이사나 유 이사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어떻게 된 거냐고 한 시선이 진욱에게 쏠렸다.

진욱은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연신 한숨만 내쉬었고, 상만 역시도 그 모습에 뭐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뒤 아성사료의 가장 큰 거래처였던 제일그룹에서는 대대적인 인사개편과 사업 다각화로 TF팀이 발족되었다.

그리고 임원들이 대규모로 갈려 나가며 역시 대기업의 인사는 다르단 것을 모두에게 알렸다.

* * *

얼마 뒤 아성가 사람들끼리 모여 조촐한 술자리가 큰아버지 집에서 벌어졌다.

“그러니까… 이 회장이 지 아들 힘 실어 주려고, 동생이랑 조카가 가진 회사들 싹다 물갈이했다 이거지?”

“네, 그렇게 됐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회장 생일까지 초대해 놓고서 그렇게 말한 겁니까.”

상규 옆에 진성 역시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상만 역시도 한숨을 푹푹 내쉬며 끊었던 담배를 다시 집었다.

“상만아. 모두가 다 화목한 가족기업은 아닌가보다?”

그게 ‘큰아버지가 할 말이십니까?’ 싶긴 했지만, 적어도 틱틱거리면서 해 줄 건 다 해 주던 분이니 곧바로 생각을 정정한 진욱이었다.

그리고 진욱은 제일식품 사료사업부에서 바로 초고속인터넷 사업부인 제일케이블넷의 상무로 옮겼다는 용철의 카톡을 마지막으로 그와 연락이 끊겼다.

“이제껏 저희를 도와줬던 이용철 이사가 계속되는 성과로 제일식품 내에서 사료사업부를 제일사료로 상장시키려고 했었대요. 그쪽 지분하고, 그 사람 아버지인 이현재 부회장이 많은 지분을 가진 제약, 홈쇼핑, 요식업 사업부랑 같이 해서 우호지분을 늘렸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거 보고서 더 크기 전에 바로 조카랑 동생 쳐냈다 이거냐?”

“네, 사료사업부는 독립 상장 없이 다시 식품 산하로 남고, 대표이사도 이현욱 회장 라인 사람들로 바뀌었답니다.”

그것이 이 회장의 생일 때 이뤄진 것은, 부회장 라인이 가족 간의 행사에서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준비했던 한 수였다.

졸지에 큰아버지 생일 때, 폭탄 제대로 맞은 용철과 부회장 라인은 뒤통수 맞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박살 나서 못 일어날 수준이었다.

“거 시바랄 것! 산삼값만 아깝게!”

“큰아버지가 왜 아까워하세요?”

상규는 그 말을 듣고 분노의 담배를 태웠다.

“돈이야 상만이가 냈지만, 그거 내가 구하라고 말한 거야! 높으신 양반들은 산삼이 이거라길래 내가 지인들 통해서 겨우 구한 건데!”

담배 든 손으로 연신 진욱에게 삿대질을 하며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이 가득한 상규.

하지만 큰집이 그동안 투자해 준 게 많다 해도 당장에 회사를 운영해야 하는 아성사료가 더 위험한 상황이다.

상만이나 진욱이나 생각지도 못한 태풍을 만나서 집안 가산 죄다 날아갈 위기에 어디서부터 뭘 복구해야 할지도 멍해진 상태였다.

“하- 아 진짜! 지들 지분 싸움하겠다고, 이렇게 선을 잘라 버리냐!”

순간 분노한 진욱이 크게 소리치자, 진성이 당황해서 말리려 했고, 상규가 언더락 위스키를 들고 말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거구만, 암튼 유감이다. 진욱이 너나 상만이나.”

순간 상규의 그 말이 진욱의 인내선을 또 한 번 끊었다.

“큰아버지!!!”

그동안 많은 지원을 해 줬던 아성저축은행과 아성산업개발이었지만, 아버지와 자신의 회사를 새우등 운운하면서 혀를 차는 큰아버지에 대한 순간적인 분노였다.

“어, 이놈 보게? 지금 백부님 앞에서 목소리 높인 거냐?”

“형님!”

상만도 보다 못해 만류하자 능글거리던 큰아버지 상규는 혀를 끌끌 차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 분기까지가 제일식품 계약 마지막으로 했지?”

“네, 형님.”

“융자 기간 연장해 줄 테니까 다음 분기 아이템 한번 만들어봐.”

“네?”

“내가 발등에 불 떨어진 동생이랑 조카 회사에 빨간 딱지 붙일 일 있냐?”

“아버지! 지금 그거.”

하지만 상규는 이미 정해 둔 이야기인지 아들 진성에게 말했다.

“금감원 안 걸리는 선에서 해결해 봐. 아성사료 융자금은 당분간 안 받아도 돼.”

일단 새 거래처를 찾을 때까지 아성저축은행이 대출채무액 상환기간을 늘려 주겠다는 말.

진욱은 그러면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죽으란 법은 없다.’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새 프로젝트 준비할 사내 현금은 쌓아 둔 게 있고, 농협 쪽 손을 댄다면 국내 사료업에 관련된 것이니 분명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쪽은 국산 농수산식품이라면 뭐든 돈을 대주는 곳이니 말이다.

“뭐, 어차피 끝난 일. 술이나 마시자고. 내가 위스키 좋은 거 깠잖아?”

상규가 잔을 들자 상만과 진성도 잔을 들었고, 진욱 역시도 크리스탈 컵을 꽉 쥐면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일식품 사료하고 관계가 끝이고, 이렇게 통수를 쳤다고…….’

그의 눈에는 아직도 분노가 가득했다.

‘이성철… 너도 한번 머리 깨져 봐.’

진욱은 복수심에 불타는 눈으로 지금부터는 좀 다르게 움직일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