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수상한 무역회사
진욱은 부산 일대를 보면서 박 사장이 알려 준 무역회사들을 하나하나 찾아봤다.
‘저희가 중국, 일본, 동남아까지는 되는데 바로 미국을 뚫기는 힘들어요. 물론 믿고 거래해 주시면, 차차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사장님, 무역판 너무 모르신다~ 미국은 직행 안 돼요. 일단 맡겨 보시면 저희가 이후 진행할거라니까요?’
‘저도 대윤인터내셔널로 대기업 상사맨 해 봐서 압니다. 지금은 이런 규모지만, 맡겨 주신다면 최고의 중개무역 파트너가 되겠습니다!’
대부분은 영세한 업체들.
그리고 딱히 구미가 당기는 곳도 없었다.
“후우-.”
카페에서 스마트폰으로 리스트를 하나하나 ‘X’자를 추가로 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은 상사맨 찾기도 힘들다니까…….”
진욱이 과거의 삶에서 즐겨 봤던 원작 웹툰, 그리고 드라마화까지 된 작품 ‘미생’이 떠올랐다.
그게 무역업 종합상사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대기업 내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으려고 하는 상사맨들.
그리고 상황이 안 돼서 결국 퇴사 후, 자기만의 회사를 차려서 사무실 하나에 쪼그만 사업장을 만들고 발로 전 세계를 뛰는 인물들.
‘흔히 전 세계를 돌며 라면에서 로켓까지 판다.’라는 자부심의 무역회사들의 모토였지만, 역시 현실은 달랐다.
진욱은 어느 정도 발품을 팔고 인맥을 통해 알아보면 괜찮은 업체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취소하고 고민에 빠졌다.
“애매하네 진짜.”
그렇다고 다시 회사에 연락해서 ‘역시 조그마한 데는 안 되나 봐요. 아쉽지만, 다시 대기업 종합상사에 손 내밀어야겠습니다.’라고 꼬리를 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욱은 그 상황에서 두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부산 일대에 무역회사들 속에서 ‘협동조합’을 이용하는 것이다.
비슷한 업종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조합 가입만 하면 대기업 만큼은 아니어도 수십 년간 노하우가 쌓인 고인물들이 모여서 수출에 대해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는데, 조합에 가입하는 거 자체가 주변에 추천장을 받아야 하고, 윗사람들에게 기름칠로 술값 돌리는 문화가 있으니, 졸지에 진욱이 영업 상무가 되는 거다.
그런 로비를 혐오까지는 아니어도 내키지 않아 하는 진욱인 데다가 2주 안에 끝내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그건 보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써먹었다가는 회사 자체가 한번 나랏밥 먹는 분들하고 면담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불법은 아니고 단지 귀찮아질 뿐이었다.
하지만, 성사만 된다면 대기업 상사맨 이상으로 해외 노하우가 빠싹한 인간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물밑에서 환상적인 공작으로 수출을 진행할 수 있었다.
“진짜 써먹어 봐?”
진욱이 생각하는 쪽은 후자였다.
리스크는 크지만, 성공하면 수수료 떼고도 선진국 시장에 바로 진출할 수 있고, 품질이야 절대 밀리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딱 이번 주까지만 더 돌아보자. 그리고 안 되면 뭐…….”
진욱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찾기로 했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그 방법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 * *
나쁘지 않은 강소기업이나 몇십 년 동안 잔뼈가 굵은 수출 1세대 역군의 상사맨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욱과 협상을 하는 가운데,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업이라는 것이 웃긴 게 처음에 사료를 가지고 ‘반려동물 시장’이라고 띄워 주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이거 팔 루트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많다.’라는 말이 많았다.
진욱은 할 수 없이 그 방법을 위해서 호텔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알아봤다.
이것이 지금도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삶에서 동기가 가르쳐 줬던 것이었다.
진욱이 지난 삶에서 서울대 동기들 중에서 고시에 합격한 친구들을 만날 때였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등 수많은 합격자가 모인 자리에서 동기 중 한 명은 외무고시를 봤고 합격해 연수 이후 재외공관으로 떠났다.
그렇게 아프리카다, 인도다, 미국이다, 여기저기 떠나던 친구는 어느 순간 매년 나오던 동문회에서도 소식이 끊겼고, 그 뒤로는 갑작스럽게 사고를 쳐서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진욱이 지난 이름인 ‘재철’의 삶으로 나이를 먹고 4급으로 승진했을 때, 그 친구의 근황을 들었고 시골 항만에서 일을 하다가 아는 선배 이야기를 듣고서 무역회사 취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았던 그 친구는 상상도 못 한 정체를 밝혔다.
* * *
부산 내에서도 외곽에 있는 공단.
진욱은 그중에서 찾아본 곳을 하나하나 찾아봤다.
주말에 찾아와서 대부분의 공장은 문을 닫았는데, 몇몇은 나와서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다.
“일단 주말에도 분주하게 일을 하고, 외곽에서 무역업을 한다고 하지.”
진욱은 그 친구가 전에 알려 줬던 대로 그런 곳을 찾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일부러 발로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기웃기웃거린다.
처음에는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었지만, 아예 이 길을 숙지하겠다는 듯이 돌아다니는 진욱의 움직임.
그리고 간간이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계속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는다.
물론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진욱이 먼저 확인했던 무역회사들 리스트 이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될 때쯤에 진욱은 불이 켜진 공장과 회사들만 사진을 찍은 채, 차를 타고 지나갔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하겠지만, 일단 오늘 임무는 끝이다.
그리고 다음 날도 똑같이 왔다.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돌아가는 회사들이 많았고 몇몇은 담배를 피러 나왔다가 진욱을 보고서 이상하게 보는 경우도 있었다.
진욱은 눈이 마주쳤을 때 수고한다면서 인사를 했고, 그들은 누군지는 몰라도 인사를 하니 일단 같이 맞대응했다.
그리고 그날도 똑같이 이리저리 뺑뺑 돌다가 저녁이 돼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별안간 경찰 순찰차가 나왔고, 거기서 차에서 내린 두 명의 경찰이 진욱에게 다가왔다.
“뭡니까?”
“수고하십니다. 신고를 받고서 왔습니다.”
“신고요? 누가요?”
경찰들은 먼저 인사하고는 신분을 밝혔다.
“기장지구대에서 왔습니다. 공단 일대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며칠간 주변을 둘러본다고 하셔서 산업스파이 의심이 된다는 연락입니다.”
“누가요? 저요?”
“죄송합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그런데 혹시 신분증 확인 할 수 있겠습니까?”
정중하게 말하는 부산 경찰을 보고 진욱은 반쯤 성공했다면서 신분증과 함께 수첩을 꺼냈다.
“저도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사상에서 사료공장을 하고 있고요.”
“아,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왜 기장에…….”
“지금 무역회사를 찾느라고 주변에 리스트를 추리고 있거든요. 여기 적힌 거 보이시죠?”
진욱이 수첩을 펼쳐 보여 주자 정말 이곳 일대에 있는 무역회사들 이름이 빼곡하게 써졌고, 휴대폰에 있는 사진도 전부 ‘무역’, ‘물류’, ‘세관’,‘부산 상공회의소’등의 이름과 번호만 적혀 있자 그들은 잘못 짚었다면서 진욱에게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저희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주말에 와서 업체들 찾으니 좀 이상하게 보였죠? 인터넷 검색을 할걸.”
“아닙니다. 그래도 신고가 들어왔으니 신원 요청을 했습니다.”
경찰들은 별것 아니라고 여기고 인사하며 순찰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리고 진욱은 지금 불이 켜진 업체 중에서 한 곳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곳의 이름은 중안무역.
자신의 차에 타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니 99년에 만들어진 회사라고 하는데, 홈페이지도 단촐했다.
하지만 홈페이지에 회사에서 수출 건에 대한 사진은 많았고, 어찌저찌 잘 운영되는 것 같으면서도 오대양 육대주 어디든지 수출/수입 루트를 뚫은 기묘한 회사였다.
“이렇게 실적이 좋고, 안 뚫리는 사업처가 없는데 이런 구석에서 이름도 모르는 회사라고?”
누가 봐도 수상한 무역회사.
그렇다고 유령회사인지 내용 증명을 해 보려고 하니 부산 상공회의소에도 등록된 정식 업체인데다가 이제껏 만난 사장님들과 경윤수산 박 사장도 건너건너 이름은 들어 본 회사라고 했다.
진욱은 이것을 두고 확신했다.
남은 것은 내려오기 전부터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였다.
* * *
다음 날.
월요일부터 새 정장을 맞추고 미용실 가서 머리도 제대로 한 채로 BMW 차량을 타고 다시 기장군 공단에 도착한 진욱이었다.
그리고는 출발 전에 미리 그 회사에 연락을 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혹시 그곳이 중안무역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사료업체인 아성사료라고 합니다. 수출 문제로 중개업 파트너를 구하고 있는데 혹시 얘기가 가능하실지 연락을 드렸습니다.”
[…어느 쪽에서 연락받고 전화 주셨습니까?]
“네? 아~ 어디 소개는 아니고 부산 일대에서 직접 발품 팔다가 이력을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반려동물 식품으로 미국과 캐나다 쪽 수출을 보고 있습니다.”
그 말에 수화기 너머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몇 시쯤 가능하십니까?]
“글쎄요. 혹시 오늘 가능하십니까?”
진욱은 바로 약속을 잡고서 통화를 마친 다음 수첩으로 핸들을 톡톡 치다가 시동을 걸었다.
“상사맨이 고객 보고서 어디서 연락을 했냐고 말해?”
이제 확신할 수 있었고, 진욱은 이미 마음속으로 중안무역이라는 곳을 파트너로 삼기로 했다.
* * *
“안녕하십니까? 하진욱이라고 합니다.”
“어서오세요. 김도영이라고 합니다.”
50대 중후반에 상당히 깔끔한 인상으로 악수한 김도영 사장은 사무실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후줄근한 사무실 안에는 무역업체의 특징인 책상 위 컴퓨터, 지구본, 그리고 벽에 붙은 세계지도가 익숙했다.
“부산에서 수출 업체를 알아봤는데, 북미 진출에 펫푸드 사업을 맡길수 있는 파트너를 찾고 있었습니다.”
“사상구에서 오셨다면 그 일대도 좋은 무역회사가 많으실 텐데요.”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연락을 해 봤는데요. 일단은 동남아나 중국을 먼저 뚫자는 이야기를 하거나, 당장 미국은 힘들다고들 하더군요.”
진욱은 그러면서 슬그머니 자신이 지난번 경찰들에게 보였던 수첩을 보였다.
“제가 이렇게 발품 팔고 다녔습니다. 북미 쪽 찾기가 이렇게 힘듭니까?”
“요새 해운업이 불황이라 적절한 운임료와 전문 바이어 찾기가 힘들기는 하죠.”
사무적으로 대하는 김 사장의 말에 진욱은 자신이 부산에서 괜찮은 무역업체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해 말하고, 원래 대기업 삼정물산을 통해 수출입을 맡을 때 중개업으로 엄청난 수수료를 물어서 부담되니 저렴한 중견업체를 찾는다는 설명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 하는 김 사장은 진욱을 보고서 이 사람이 진심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처음에 굳었던 얼굴과 다르게 양해를 구하면서 담배도 같이 태우면서 점점 썰을 풀었다.
“저희가 99년에 처음으로 팔았던 게 콘돔이었거든요. 근데 일제도 겨우 뚫었는데 아시아제 콘돔 어디에 쓰냐면서 할 때 거기 포르노배우들에게 무료로 샘플 나눠 주고, 그러면서 차이나타운 기준으로 수출 성공했죠.”
“하하하하! 콘돔이요? 그걸 중개무역으로 하셨어요?”
“콘돔 다음에는 호미였어요. 그거 미국 가옥 특성상 이층집에 텃밭 가꾸는 데가 많아서 이름만 알리면 바로 히트 칠 아이템이었죠.”
“아이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저희 수제 간식은 충분히 가능하겠네요? 미국이나 캐나다나 동물 좋아하기로 유명하잖아요?”
“하하하, 그렇죠.”
초반의 이미지와 다르게 하나둘씩 이야기를 해 주는 김 사장.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나왔다.
“일단 국내 HACCP인증은 받았으니 미국에서 필요한 규제가 뭐가 있죠?”
“동물 사료라고 해도 식품으로 분류되니 미국 FDA인증을 받아야죠.”
“그거 수수료로 합해서요.”
“저희 쪽에서 부담하는 겁니까? 이거… 너무 할 게 많은데.”
“해주실 거죠?”
“검토해서 견적서 올려 보겠습니다.”
진욱은 그 말에 웃으면서 잘 부탁한다고 손을 내밀었고, 김 사장과 악수하면서 자리를 나섰다.
김 사장은 진욱이 떠난 뒤로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어, 나야. 회사 하나만 알아봐 줘. 아성사료라고… 들어본 곳이야? 흐음…….”
영업용 웃음이 사라지고 진욱이 지나간 자리를 보면서, 담배를 물고는 중얼거리는 김 사장.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알고 온 건 아니겠지?”
분명 어제 경찰까지 불러서 상황을 살펴봤는데,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짜 평범한 사업가였다.
수출 거래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보기로 하고 문제가 될 것이 없다면 대기업 종합상사 절반 정도의 수수료로 그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