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인연을 막 갖다 붙인다
이곳은 전남 여수.
강의하는 학교가 있는 서울도 아니었고, 집 근처인 상록도 아니었다.
그런데 누나가 여기서 왜 나왔을까?
“지, 진욱아!?”
“맞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옆에 있는 남자의 등 뒤로 확 숨는 걸 보고서 큰누나 진미가 여기에 있는지 물어보려다가 그 앞의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181 전후의 진욱보다 큰 키에 꽤나 미남이었다.
“누구시죠?”
“아, 저기 뒤에 계신 분 남동생이요.”
“…아!”
그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뵈네요. 진미 씨 남자친구입니다. 이수현이라고 합니다.”
“아, 네. 하진욱입니다.”
수현이라 불린 누나 남자친구는 서글서글한 미소로 먼저 진욱에게 말했다.
“고향에 와서 데이트 왔는데, 남동생분을 여기서 뵈네요.”
“아, 여기가 고향이시군요.”
“여수 밤바다가 보고 싶다고 같이 왔다가, 아쿠아리움 한번 보러 왔습니다.”
“하하, 말 편히 하세요. 제가 한참 어립니다.”
“초면에 그래도 되려나?”
진욱은 예비 매형이 될 수 있는 수현에게 싹싹하게 인사했고, 결국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돼서 셋이서 인근 커피숍으로 향했다.
* * *
“저기, 진욱아. 엄마 아빠한테는 내가 말할게.”
“그래.”
진욱은 가족 연애사에 대해서 뭐라 할 것 없이 쿨하게 대답했고, 수현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나도 상록으로 올라가려 했어.”
“아, 그렇군요.”
“나도 상록에서 일하고 있거든.”
알고보니 누나 진미와 같은 안암대학교 출신, 그것도 의사여서 현재 상록시 유일의 대형병원인 안암대 안산병원에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사귄 지 3년 정도 됐어. 이제는 우리 둘 다 나이도 있고 정식으로 결혼 논의 드리고 싶다.”
“네~ 응원할게요.”
졸지에 누나 남자친구와의 자리를 가진 진욱은 거기에 대해서 자신이 온 것에 대해 말했다.
“대화 아쿠아리움 여수에서 특별사료를 만들어 달라는데, 그거 개발이 좀 걸릴 거야.”
“그걸 너한테 말했어? 아빠가 아니라?”
“신제품 납품에 대해서는 내가 맡게 됐어.”
“학교 다니면서 회사 일까지 같이 한다니 굉장하네요.”
자신보다 어리지만, 직접 발로 뛰는 진욱을 보고 수현이 박수를 쳐 줬다.
“온 김에 누나 나 좀 도와줘. 식품공학 쪽에서 전문가 없을까?”
“으응?”
진미도 그쪽 계통이니 지난번에 이어서 이제 아성사료에서 일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녀는 직접 나서지 않고 뭔가를 고민했다.
그때 누나의 남자친구 수현이 조용히 진욱에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도 그쪽 일 하시는데.”
“네?”
“친환경 사료 개발하신다고, 학교 내에서 연구실 만드셔서. 어떻게 여수라면 이야기가 통할 것 같기도 한데.”
그 순간 진욱은 뭔가 삘이 와서 손가락을 튕겼다.
“누나! 나, 매형하고 이야기할게.”
“야! 하진욱!”
여수 밤바다 보러 오붓하게 온 데이트는 남동생 때문에 모두 파토 나고 사업 논의의 자리가 되었다.
* * *
얼마 후 진욱의 집안은 큰누나 진미의 결혼식 문제로 양가 인사 자리가 열렸다.
진미나 수현이나 둘 다 학업 때문에 이미 결혼 적령기는 지난 상태였고, 덕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공부만 시킨 딸이라 집안일을 잘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 내외도 학업 때문에 결혼이 늦었어서 다 이해합니다.”
앞으로 매형이 될 수현의 집안은 호남 일대에서 유명한 학자가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전남교육청 공무원으로 은퇴했고, 사돈은 전남대병원 간담췌외과 과장, 그리고 사부인은 수현이 말한 대로 전남대 농업생명대학 교수라고 한다.
“호호호, 저도 결혼하고 박사학위를 뒤늦게 땄어요. 저는 둘이 괜찮다면 마음껏 학업에 대해 지지하고 싶습니다.”
결혼 이야기는 후다닥 진행되고, 호텔에서 식사가 나온다.
원래였다면 상만과 원숙이 사돈과 같이 대화를 해야 하는 게 정상일 거다.
하지만 진욱이 끼어들어서 사돈댁 사모님과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이목을 집중했다.
“그러니까 대화그룹을 통한 사료 납품이라는 거죠?”
“네, 그런데 저희가 어류나 강아지, 고양이 사료는 했어도 파충류에 소형 포유류 사료까지 다 준비해야 하니까 전문가 분을 찾고 있습니다.”
“그거 내가 연락 한번 해보면, 우리쪽 연구소에서도 만들 텐데.”
“그런가요?”
“네~ 식품공학 쪽에서 친환경 사료 만든다고, 연구하는 게 있거든요. 국립대라서 연구비 지원도 풍족한 편이고요.”
“그럼 일단 어분과 크릴새우 베이스로 자료 공유를 해서 공동개발을 요청할 수 있을까요?”
“어머, 그거 좋지요. 대화그룹 관련 납품 사업이고 여수라면 그쪽에 대해서도 많이 교류가 될 거예요.”
이게 거래처 현장인지, 결혼 앞둔 양가 부모님 인사인지 모를 정도였다.
“크흠! 큼!”
“어머머! 내가 이런 자리에서 별말을 다했나?”
“아닙니다.”
상만과 사돈어른 둘 다 헛기침을 하면서 진욱을 제지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수현 역시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진미 씨 집안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받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그거는…….”
“어머, 그래?”
별안간 예비 시어머니가 진미의 손을 덥썩 잡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진미 씨가 나랑 같은 농대 쪽이니 서로 이야기할 게 많을 거야. 안 그래요?”
그렇게 말하자 상만 역시도 큰딸을 보고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지원해 줬는데, 이제 정교수 자리를 앞두고 회사 일을 하라는 건 아버지 입장에서는 좀 아쉬웠지만, 자리 생길 때까지 도와준다면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그렇게 양가 인사는 별안간에 농대 동문인 고부 사이에, 사돈 총각까지 껴서 괴상한 프로젝트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욱은 집에 들어와 어머니에게 한 소리는 들었어도, 아버지는 진미까지 아성사료로 합류한 데다가 이야기가 잘돼 적어도 시집살이는 없겠다면서 넘어갔다.
* * *
“원래 사료 개발은 가장 지원 많이 해 주는 곳이 농림수산식품부랑 농협이거든.”
“흐음, 그렇구나?”
진욱은 진미와 같이 그동안 개발했던 자료들을 넘겨줬고, 큰누나는 빠르게 숙지했다.
“최근에는 환경부 쪽에도 관심이 많아. 생사료보다는 배합사료가 더 친환경적이라고 해서.”
“이야기 들었어. 아빠… 아니, 아버지랑 너랑 환경부장관 표창받은 것도 있잖아?”
진미는 이왕 집에서 같이 모여 가족 같은 경영을 하게 된 순간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관련 논문 자료를 모으고, 그쪽 진로를 선택했던 동문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일단 연구 개발은 내가 맡을게. 여기 직원들도 베테랑이고, 식품산업기사 있으신 분들도 있으니 잘되겠다.”
진욱은 공장 한구석에서 시작한 자그마한 공방에서 시작해 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 인력이 와서 연구 개발을 부탁했다.
그리고는 자신은 개발비를 구하기 위해서 서울로 향했다.
그동안 과천에 있는 정부청사의 사람들하고 숱하게 요청을 받았던 진욱은 아버지하고 같이 오랜만에 반포동에 도착했다.
“여기도 진짜 자주 오게 되네요?”
한국사료협회에 도착한 진욱과 상만은 도착하자마자 관련 사업 지원을 위해 움직였다.
“파충류 사료 지원이요?”
“네, 현재 국산 파충류 사료라고 해야 애완동물 샵에서 청거북 먹이 정도 빼고는 없는데, 이번에 기획안을 만들어 봤습니다.”
PPT는 언제나 진욱의 몫이었고, 이번에 간부들을 통해서 자료를 보는 인물은 사료협회 임원 이동호 이사였다.
그는 연달아서 언론에 사료사업에 대한 이름을 오르내리게 해 줬던 아성사료, 그 중에서도 진욱의 발표에 눈을 떼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마쳤을 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짝짝-
이동호 이사가 박수를 치자, 다른 간부들도 눈치껏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는 협회 내에서 검토를 해 보겠다고 한 다음, 잠시 진욱과 상만을 불렀다.
“농림수산식품부에 예산 받아오는 거야 힘들지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지원만 잘된다면 앞으로 협회를 위해서 저희가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허허허-.”
상만이 이동호 이사와 악수를 나눴을 때, 그는 잠시 한 가지를 말했다.
“근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무슨 조건입니까?”
이 이사는 활짝 웃으면서 현재 사료협회 내부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이번에 협회장이 2선까지 해서 다음에 또 투표가 시작됩니다.”
“아이고, 그분하고도 일한 지 오래됐는데, 이제 임기가 다되시는 군요.”
“다음 협회장으로 상공회의소하고 농협에서 밀어주는 양반이 김만우라고…….”
“아, 김만우 전무 말입니까?”
진욱은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협회들이야 대부분 정부 내의 기관들에서 자리 필요하신 분들이 감투받는 용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게 정말로 중요한 커리어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말만 잘하고 투표만 잘하면 앞으로 탄탄대로가 될 수 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사님.”
“응?”
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 이동호 이사에게 다가가자 상만은 갑자기 저 놈이 왜저러나 싶었다.
“이미 이 이사님이 저희 아성사료를 지원해 주신 걸 생각하면 저희는 협회장 투표로 이사님을 지지할 것입니다.”
“오, 그래요?”
“이미 아버지와 저 역시 소중한 한 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상만은 저놈이 뭘 말하냐면서 일어나려다가 진욱에게 제지당했다.
“사실, 제가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사업가 인터뷰 하면서 사료협회 초대받는 것도 다 이사님 덕 아닙니까?”
“하하하하! 역시 하 사장님이나 하 이사는 진짜로 믿을만한 분들이라니까! 그래, 좋아요! PPT도 잘 봤고, 국산화 사료 문제라니 내 위에 한번 이야기해 보리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이렇게 해서 진욱은 또 하나의 길을 잡을 수 있게 됐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을 하는 진욱 옆자리에 앉은 상만은 툴툴 거리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저 양반, 협회장 못 해! 아웃사이더인데, 어쩌자고 지지한다는 말을 했냐?”
“일단 그래서 1차 지원 정도는 받을 수 있잖아요?”
“그거 한번 타먹고 사료협회랑 발 끊을래? 이쪽은 윗선에서 낙하산 내려온 놈이 푸쉬받아서 협회장 되는 거라고.”
이미 농림수산식품부가 픽을 한 인물이 차기 협회장으로 정해진다는 걸 잘 아는 상만은 아들이 경솔했다면서 아까 일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진욱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거면 됐어요. 이미 그걸로 저희는 또 지원 땡길 수 있습니다.”
“뭐? 그게 뭔 소리야?”
진욱은 대쉬보드를 한번 열어 보라고 이야기 했고, 상만은 그 안에서 아들 녀석이 만든 기획서 서류를 집어들고는 손에 침을 발라서 천천히 넘겨 봤다.
“뭐야… 이거!?”
“기가 막히죠? 예비 사돈인데, 나 그 교수님 진짜 존경할거 같아요.”
[전남대학교 농식품생명공학부 국산 친환경 사료에 대한 지지안.]
[전남도청-전남대학교 농수산사료연구소 공동사업 지원 개발안.]
[대화리조트 아쿠아리움, 파충류 사료 납품에 대한 국산기술 개발 기획안.]
많이도 준비한 내용이었고, 그것들의 조건은 일단 인정받을 수 있는 ‘보증인’식의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진욱이 거기에 대고 대한사료협회 이름을 적어 놨다.
“천~천히 진행해 볼게요.”
“이 자식이 진짜…….”
연구개발을 누나에게 맡겼다고 아예 발에 모터를 달고 움직이는 진욱이었고, 상만은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아버지 이 건 해결되면 중소딱지 내년 안에 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