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협회에서 만난 인물.
“자, 도착했다.”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대형 빌딩에서 차가 멈췄다.
이곳은 아버지가 매달 세미나로 향하던 ‘대한사료협회’였다.
농림수산식품부 산하에 있던 그곳에서는 전국에 있는 사료업체 회원사들이 모여서 가격 논의, 원자재 공동구매, 사료 가공업 기술증진과 품질 공유 등을 말한다.
···고 하지만, 사실상은 친목 단체 정도였다.
협회는 잘 이용하면 좋긴 하지만, 독단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만들어나갈때는 물밑에서 암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담합 이야기 나오면 하등 쓸모가 없기도 하고···.’
물론 농수산식품부가 바라보고 있는데 산하 단체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별거 없어~ 그냥 이번 분기 전체 매출표에다가 차후 농협이나 수협에서 지정한 원자재값 매기는거 정도지.”
“네~ 일단은 한 번 이야기 들어봐야겠네요.”
진욱은 사료협회 정회원인 아성사료의 이름으로 상만과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상만은 안에 있는 수많은 인물들 중 익숙한 인물들과 인사를 하면서 진욱에게 하나하나 소개했다.
배합사료 전문 업체 김 사장, 이 사장, 박 사장 등 전국 각지에서 사료 생산을 하는 기업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큰손들도 있었다.
“진욱아, 저기!”
“네?”
상만이 가리킨 곳에는 진욱보다 두 세 살 더 많아보이는 인물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명품 정장을 차려입고 나온 인물.
그리고 옆에서 상만 나이대의 고위 임원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보좌를 하고 있었다.
“누구에요?”
“제일그룹에서 집안 사람 한명 온다더니 저 친구인가 보다.”
“!”
“재벌이야.”
범 삼정가의 기업인 제일그룹은 유통, 화학, 식품, 미디어라는 폭넓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10대 그룹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그룹 고위 임원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인물은 이용철은 졸업 이후 바로 사업체를 맡은 제국의 황자 중 한 명이었다.
‘식품 파트에서 한 명이 일하러 온 건가?’
진욱이 알고 있는 제일그룹의 3세와는 닮긴 했지만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구지? 생긴거 봐선 범 삼정가 사람은 맞는거 같은데.’
일단 처음 사료협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혹여라도 같이 대화할 시간이 된다면 적당히 포섭해볼 생각이었다.
***
[자, 모두 자리에 착석해주십시오. 회의 시작합니다.]
마이크 소리와 함께 협회 정회원들로 모인 사료회사 사장들이 모두 모여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협회장이 나와서 인사를 할 때, 그의 스펙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진욱이었다.
‘고위 공무원 출신이구만.’
이사관에서 사임하고, 각종 공공기관에 이런저런 대표를 맡다가 올라온 사람이어서 원론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에, 올해 사료협회에 대해서, 국내에 있는 시장에서는 작년 대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으며 향후 10년 내에 대한민국의 사료 시장을 세계적으로 만들겠습니다. 또한···]
인기 없는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는 것 같았다.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면서 ‘우리 협회가 지금 잘하고 있다.’, ‘조만간 시장 개발해서 수익 증대를 생각한다.’, ‘방법은 신기술이다.’ 등의 이야기를 해서 진욱은 빨리 이 훈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상입니다.]
짝짝짝짝짝-
길었던 연설이 끝나고, 그 뒤로 나온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네, 다음은 이번 분기 우수 사료업체에 대한 시상이 있겠습니다.]
“시상?”
“뭐, 돌려먹는 상 있어.”
매달 하는 시상이라고 하는데, 상만의 말대로 각종 업체들을 나누고서 그 사장들에게 ‘우수개발상.’, ‘수출 증대상.’, ‘우수매출상’, ‘친환경개발상’ 등의 표창이 나왔고 그 중에서 친환경개발상은 아성사료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인물이 있었다.
[네, 다음은 이번달 우수매출상의 YN바이오입니다.]
“!?”
YN바이오라는 이름을 보니 그때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나다를까 바로 올라오는 인물은 그때 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깐죽거리다가, 농협 관계자들하고 납품비리로 물먹었던 그 인물이었다.
[네, 이영남 대표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영남이 상을 받으면서, 슬쩍 옆자리에 있는 상만을 바라보며 썩소를 지었다.
하지만 상만은 어디서 개가 쳐다보냐는 투로 눈길도 안 주면서 ‘친환경상’을 받으면서 협회장에게 인사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수상이 끝이나고 박수갈채가 다시 한번 크게 이어졌다.
협회 회의가 끝이 나고 친한 사장들끼리 모여 이야기할 때 진욱은 잠시 자리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겉돌았다.
“어우~ 이게 누군가?”
“?!”
진욱이 고개를 돌렸을 때 다가오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이영남이었다.
진욱은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앞으로도 오다가다 볼 사람이니 인사는 했다.
“아, 이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겠나? 누구 때문에 납품 물 먹은게 몇 건인데 말이야.”
“···.”
이영남은 상만에게도 시비를 걸더니만, 이제는 그 아들인 진욱도 살살 긁으려고 했다.
진욱은 일단 인사는 했으니 그 다음부터는 그대로 맞대응하기로 했다.
“이제는 겁나서 누구랑 술도 못 마시겠어?”
“금주가 건강에도 좋습니다.”
“···하? 그래? 그럼 자네가 내 생각해줘서 술자리 제보했나?”
이미 서로가 누구를 어떻게 찔렀는지는 다 알고 있었고, 배 이상으로 신문사에 광고를 올려서야 겨우 매출을 확인했던 이영남은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도 와이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 안 걸리게 조심하라고.”
“나오기만 하지 드러난 건 없죠. 그냥 찌라시 같은 겁니다.”
“오~ 그래? 자네가 관리하나?”
“그리고 와이로는 제가 알기로 일본어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우리가 요새 일본 회사하고 큰 사업을 해서 말이지.”
“네, 덕분에 로타 마트 납품 물 먹은 회사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 순간 이영남의 눈썹이 씰룩거리면서 ‘이 새끼 봐라?’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비만 체형에 대학 떨어져 재수했다는 띨띨한 놈인 줄 알았는데, 불과 1년 사이에 확실히 달라졌다.
여기서 ‘어린놈이 감히!’ 라고 밀어붙이면 자기만 꼰대가 되고 뒷말 나올 상황이고, 살살 긁으면서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이영남이 다시 한 마디했다.
“좋은 제품 만들어 보라고, 납품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일단 홈쇼핑은 뚫었고, 백화점도 뚫으니 하나하나 잘 될겁니다.”
“아~ 중소유통 거기?”
거기 납품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면서 자리를 떠나는 이영남.
진욱은 잘 받아쳤다고 생각하면서 마쓰모토를 등에 업고서 어디까지 날뛰는지 보자면서 피식 웃었다.
“에휴~”
진욱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중앙 홀에 있는 의자에 대충 앉아 아버지를 기다렸다.
이번에 배합사료 납품 수량을 올려서 타 업체에 납품한다는 이야기로 인해 말이 좀 길어지는 것 같았다.
진욱은 주변을 둘러봐도 전부 나이 지긋하신 아재들만 가득한 분위기에서 조용히 휴대폰을 살펴봤고, 스마트폰 세대도 아닌지라 문자로 상황을 확인했다.
진성이 새 지점으로 동탄 신도시 쪽에 지점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그쪽 괜찮으니 좋은 자리 찾아보자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진욱의 주변으로 나이 지긋한 임원들이 다가왔다.
말 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에 뒤통수가 따끔거려서 그들을 보다가 멋쩍게 일어나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대답은 그 뒤에서 오는 인물을 보고서 알 수 있었다.
“이사님. 이 친구입니다.”
‘이 친구···?’
누군가 싶어서 보니 나이든 임원들을 제치면서 다가오는 젊은 청년이 있었다.
그 순간 진욱의 두 눈이 커졌다.
“의외로 어려 보이네?”
그가 한 첫 마디였다.
제일그룹의 일가인 이용철 이사.
그가 진욱을 보고 관심을 가지며 다가온 것이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 넷입니다만···.”
“어우- 한참 어리네? 나 다섯 살 위인데 말 편하게 해도 되나?”
“아, 네. 그러세요.”
그 말에 용철은 피식 웃으면서 잠시 진욱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진욱은 졸지에 재벌가 자제를 따라가서 뒤에서 따로 이야기를 하게 됐다.
“담배 태우나?”
“안 핍니다.”
“그럼 나나 한 대 피지 뭐.”
차 안에까지 불러서 담배 한 대 물고 불을 붙이는 이용철 이사.
그러자 운전석에 있던 수행비서가 재빨리 에어컨을 틀고서 조용히 나와 정중히 인사했다.
“그래, 아성사료에··· 이름이 하진욱 맞지?”
“아, 네. 저를 아십니까?”
초면에 대뜸 자신에 대해 물어보는 이용철은 담배를 뻐끔거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내가 제일식품 사료제조업 쪽을 맡게 됐어요. 집안에서 기대가 크긴 한데··· 여기 오기전에 보니까 수제간식 특허를 낸 유망한 기업이 있다길래 찾았지.”
“!”
제일그룹이 냄새를 맡았는지 일가 사람을 사업부에 투입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나도 어렸을때는 강아지 키웠는데 말이지.”
“하하, 지금은··· 안 키우시나요?”
“죽었어. 14년 살았지. 노환으로···”
“아···.”
“뭐, 그런 이야기 할 건 아니고, 아무튼 사료 사업 맡았는데, 돈 될만한거 찾다가 딱 아성사료에 대해 알게 됐어요.”
“저희 제품에 대해 말인가요?”
“음, 여기서 계속 말할건 아니고···.”
이용철은 품 안을 뒤적거리면서 명함 케이스를 꺼내 자신의 명함 하나를 넘겼다.
“조만간 한 번 보지? 혹시 와인 마실 줄 아나?”
“아, 네. 좋아합니다.”
“그럼 조만간 한 번 연락할게요. 그 얌 푸드라는거 제품 관리 잘 해놔요.”
아무래도 수제 간식이 가격대비 상당한 고부가가치라는 것을 알고 대기업 단위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진욱은 용철의 명함을 받고서 경우의 수를 모두 생각하면서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대기업 후계자가··· 우리쪽 관심을 보인다라···.’
아무리 아성사료가 성장했어도 재벌가 앞에서는 동네 공장 중 하나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이야기 하자고 명함은 받았으니 이걸 가지고 집안에서 이야기를 한 번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이사님.”
“뭐죠?”
진욱이 떠난 뒤로 제일의 임원 한 명이 차 안으로 들어와 용철에게 보고했다.
“알아봤는데, 아성사료가 최근에 현기홈쇼핑하고 전속홍보 계약을 한 거 같습니다.”
“그래요?”
“저희가 한 발 늦은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 순간 용철의 미간이 찌푸러들었다.
“···전무님, 그게 할 말이에요?”
“아,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희가 현기에서 제일 홈쇼핑 쪽으로 아성사료 데려 오겠습니다.”
용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여차하면 내가 저 친구 한 번 불러보고요.”
아성사료가 꽤나 유망한 회사로 성장하면서 그들을 좋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다.
***
한편 진욱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명함을 보고서 곧바로 휴대폰을 열어 진성에게 ‘제일그룹 이용철’에 대해 알아달라고 연락했다.
스마트폰만 있었다면 원클릭으로 바로 알아볼수 있는데, 요금 폭탄 생각하면 폰으로 인터넷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시대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바로 진성의 답장이 왔다.
“어이구~ 지금 제일 회장 조카야?”
“음? 누구? 이용철?”
“네.”
“그럼 아마 지금 제일 회장 동생일거다. 이름이··· 이현재였나?”
현 제일 회장 이현욱의 동생 이현재 제일그룹 부회장.
그 사람의 자제라면 제일그룹 내에서도 꽤나 권한이 있을 거다.
“근데 왜? 누구한테 물은건데? 진성이.”
“네.”
“그 친구 관심이라도 생겼어?”
“뭐, 정확히는··· 그쪽에서 저한테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뭐?”
진욱은 대답대신 그가 줬던 명함을 꺼내 보였다.
“조만간 술 한 잔 하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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