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쩐주(착하진 않음)
오랜만에 상록시에 돌아온 진욱은 택시에서 내려 대문에 초인종을 눌렀다.
“어서와~ 우리 아들.”
버선발로 달려 나와 자랑스러운 서울대 아들을 와락 끌어안는 원숙.
진욱은 정말 친절한 새 부모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진욱이 너 좋아하는 갈비찜 해 놨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우리 아들 살 많이 빠졌네?”
“요새 운동을 계속 해서요.”
“그래~ 지금이 보기 좋다.”
꾸준한 운동으로 점점 더 균형 잡힌 몸이 되었고, 학점도 그럭저럭 나와서 점점 더 자랑스러운 아들 하진욱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진욱은 엄마가 차려준 집밥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방에서 편히 쉬는 시간을 가졌고, 저녁에 아버지 상만이 돌아왔을 때 마중 나왔다.
“오셨어요?”
“아이고~ 너 보려고 바로 왔다!”
상만은 다 큰 아들을 와락 끌어안으면서 토닥였고, 그날 다 같이 모였을 때,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에 큰아버지 생신 때 너도 갈거지?”
“네?”
원숙의 말에 진욱은 머리를 굴려 생각했다.
상만의 형이자, 집안의 장남인 하상규.
그동안 1년 가까이 지내왔지만, 아버지만 만났지 거의 교류가 없어 얼굴은 사진만으로만 알았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해 수천억대의 자산가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인지 명절때는 제사보다는 해외여행을 떠나 골프를 좋아하는 큰아버지 이야기만 듣고 실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다른 애들은?”
“진미는 이번에 논문 때문에 못 간 대요. 그리고 진영이는···.”
“걔가 갈 리가 없지.”
상만하고도 화해한 지가 얼마 안 됐는데, 큰아버지 집안하고는 더 사이가 안 좋았고, 아예 그쪽과는 눈길도 안 주는 진영이었다.
그리고 상규의 생일 당일에는 상록시에서 제일 큰 특급호텔에서 엄청난 파티가 이뤄졌다.
상만이 직접 운전해서 온 검은색 에르쿠스에서 내린 진욱과 원숙.
그리고 초대장을 확인하자 바로 호텔 도어맨이 인사하면서, 차를 인계받아 주차하러 갔다.
“요란하게도 했구만.”
주차장부터 [-축- 하상규 사장의 축하연.]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서 그곳을 따라 들어갔다.
호텔 연회장을 통째로 대절한 곳에는 얼음으로 조각한 독수리, 그리고 각종 명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상록시 일대에서 손꼽히는 거부라고 하더니, 정말 있는대로 돈 자랑을 하는 자리였다.
연미복과 드레스를 쫙 빼입은 사람들 속에서 상만에겐 익숙한 얼굴이 많이 보였다.
“아니, 의원님!”
“음? 아아! 하 사장님!”
상록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상만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사모님도 오셨네요?”
상록시 내의 높으신 분들끼리 모인 부인회 사람들이 원숙도 맞이하고, 그 자리에서 진욱의 소개가 있었다.
“어머, 아드님이에요?”
“네, 이번에 서울대 간 그 애요.”
“아이고~ 공부 열심히 했나보네? 큰딸도 대학원 다니지 않아요?”
상만 일가의 자식 자랑.
그 속에서 향수 냄새 풀풀 풍기는 아주머니들의 수다 속에서 진욱은 잠시 자리를 피했다.
자신이 여기서 뭘 아는 사람이 있어야 이야기를 할 텐데, 앨범 사진 속에서나 나온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후우-”
그때 갑자기 뒤에서 충격음이 있었다.
딱-
“아앗?!”
누가 뒤통수를 치길래 훽 돌아선 진욱.
세게 친 건 아니지만, 기분 나쁠 상황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건 명품 수제 정장을 입은 이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진욱이 너 여기서 혼자 뭐하냐?”
“아···.”
“어허, 이 놈 보게? 오랜만에 본 큰아버지한테 인사도 없어?”
엄청난 덩치에 기름을 바른 짧은 머리, 그리고 나름 멋지다고 생각하는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
그가 바로 하씨 일가의 장남 하승규였다.
그 옛날 프로레슬러 바티스타를 보는 것 같은 덩치와 시원시원한 인상의 중년에게 진욱은 뒤늦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죠?”
“어, 그래!”
인사를 받으니 아까의 뒤통수를 친 것에 이어 이번에는 두 팔을 벌려 큰 덩치로 진욱을 와락 안으면서 등을 토닥였다.
아메리칸 스타일로 인사를 한 승규는 진욱에게 어깨 동무를 하면서 말했다.
“얘기 들었다. 네가 드디어 정신 차렸구나?”
“네?”
“이번에 서울대 입학했다며? 내 용돈은 섭섭지 않게 보냈는데 말이다.”
“아, 네. 동양사학과요.”
“크으~ 재수해서 갈 만한 곳이구만. 서울대 좋지~”
그러면서 진욱의 등을 몇 번 친 승규는 와인잔을 들고서 다른 높으신 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온 김에 많이 먹고 가라.”
“네, 큰아버지.”
그렇게 임팩트 있는 첫 만남 이후 진욱에게 다가오면서 사과하는 인물이 있었다.
“머리 맞은 거 기분 나빴지? 미안해.”
“아, 아니에요. 형!”
“음? 너 왜 갑자기 나한테 존대냐? 하던대로 편하게 말해.”
“그래도....되...나?”
아버지의 일을 대신 사과하는 작은 키에 수수한 인상의 청년은 아마 자료상 하승규의 아들인 하진성일 것이다.
과거 진욱의 비밀 블로그를 봐도 ‘개꼰대 큰아버지’ 밑에 엄청 성격 좋은 착한 아들이 있다는데 정말 그래 보였다.
진성은 사촌동생 진욱을 데리고 자리 한 곳으로 안내해 앉혔다.
그리고 음료수를 주면서 이야기를 했다.
“입학 축하해.”
“고마워. 형.”
“서울대라··· 나도 정말 가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러는 본인도 연희대 상경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집안에서 이름난 엘리트 중 하나라고 들었다.
수천억대 거부의 외아들이지만, 누나 진미와 더불어 바른생활 사나이로 유명하다고 한다.
“숙모님 말 들어보니까 무슨 개인 사업도 한다면서?”
“아, 수제 간식 사업이야.”
“진영이랑 같이 한다는데 그 강아지 옷하고, 간식이야?”
“맞아.”
“이야~ 그 나이에 사업이라. 멋지네? 사장님 소리 들을 수 있잖아.”
비꼬는게 아니라 정말로 잘 하길 바란다면서 응원해주는 진성.
그리고 둘이 이야기 할 때, 부모님이 와서 진성과 인사를 나누고 이제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케이크 커팅식을 하겠습니다.]
MC도 TV에서 간간이 보던 연예인이었고, 번쩍거리는 3단 케이크에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은 상규 내외, 그리고 진성이 모여서 촛불을 끄고 나이프을 들었다.
그리고 케이크를 자를 때 폭죽이 터지면서 박수 갈채가 이어졌고, 그때부터는 이제 먹고 마시는 자리가 되었다.
상록 일대의 이름난 유지라고 하더니, 정말 하나하나가 지역 내에서는 제법 행세 좀 하는 사람들이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은 물론이고, 고위공무원, 섭외한 연예인과 클래식 악단까지 있었다.
그리고 값비싼 보르고뉴 와인을 소주처럼 쭉 쭉 들이키던 상규는 얼굴이 벌개진 상태에서 여기저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가끔은 선을 넘는다 싶을 정도의 제스처, 그리고 그 옆에서 손바닥을 비비는 사람들.
그리고 상규가 상만 일가의 자리에 앉았다.
“상만이랑 진욱이 한 잔씩 받아라.”
“아, 네.”
유리잔에 고급 와인를 소주처럼 콸콸 따라준 상규는 디캔팅도 없이 와인을 홀짝거렸다.
그리고 잔을 잡은 다음에 능숙하게 디캔팅을 하고 향을 맡아본다음 천천히 음미하는 진욱을 보고 상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욱이 너, 학교 다니면서 일한다며?”
“아, 네.”
“상만이가 학비 안 주냐? 아니면 인생 공부야?”
“형님, 그런 거 아니에요.”
상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을 때, 상규는 다시 선을 넘으려 했다.
“진영이 그 기지배하고 같이 장사 한다며? 남매가 쌍으로.”
“네, 그렇습니다.”
“크으~ 그 기지배 유학 다녀온 뒤로 기껏 한다는게 개 옷 파는거야?”
“하하, 뭐. 지 앞가림은 그래도 합니다.”
“내 딸이었으면 그거 아주 머리 밀어서 집 안에 뒀어. 선도 안 본다며? 돈은 돈대로 처들이고.”
의상학과 나와서 유학까지 다녀온 조카를 마구 깔아뭉개는 언행의 상규.
그러면서 또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진욱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무슨 사업이냐? 개 사료 판다며?”
“아, 수제 간식이라고 강아지들이 먹는 고급 사료요.”
“그게 뭐, 돈이 돼?”
그쪽 상황에 대해는 전혀 모를뿐더러, 아예 동생의 사료 공장도 전혀 신경 안 쓰는 상규였다.
상규에게 있어서 상만은 그저 ‘개밥공장 하는 동생’ 그리고 그 아들딸은 ‘개 옷이랑, 개 간식 만드는 조카’ 정도였다.
“그··· 적어도 서울대라면 너네 아빠 일 돕는게 아니라 더 위를 노려야지. 삼정이나 현기그룹 같은곳 말이야.”
“하하하, 그런가요?”
“지금 잔잔바리 사업 해봤자. 별로 돈 안 된다. 이 나라는 앞으로 땅 아니면 주식, 펀드나 해야지. 다른 사업 죄다 답 없어.”
그 동안 수천억의 재산을 그걸로 모았다고 했으니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말 할 소리였다.
상만은 원래부터 그런 형님이라고 애써 웃으며 넘어갔고, 진욱은 왜 두 누나가 안 온지 알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올해 주식 이야기 잘못하면 큰일 날텐데.’
곧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서 미국에 여러 대기업들 우수수 넘어가고, 그 뒤로 한국도 코스피 반토막 날 위기였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상규는 투자 불패론을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설파했다.
“진욱이 너도 이 녀석아! 앞으로 투자 같은 걸 좀 배우란 말이다. 뭐, 이 놈도 그렇지만.”
그러면서 자기 아들 진성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은 상규.
그리고 가족들은 가장 큰 재산을 가지고 집안에서 힘 께나 쓰는 상규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술자리가 쭉 이어지고 각자 돌아갈 때가 됐을 때, 상규는 진욱을 불렀다.
“너 앞으로 잘 해. 임마, 쓸데없는 장사 보다는 투자 공부를 하라고.”
“아, 네.”
진욱은 오랜만에 자신의 과거의 삶 부모보다 더 꽉막힌 인물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때 상규는 지갑을 가져오라고 한 다음 안에 있던 수표를 세다가 몇장 빼줬다.
“이건 가서 용돈하고.”
“!”
하얀색과 보라색이 섞인 자기앞수표.
100만원 짜리로 세 장을 건네주자 놀라 하는 진욱의 뒤로 다시 등을 몇 번 두들겼다.
“뭘 놀래? 이놈아! 받아.”
억지로 수표 300만원을 진욱의 손에 쥐여주고는 껄껄 웃는 상규.
진욱은 거기에 대해서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저렇게 괴팍하고 꼰대인 사람이 왜 그렇게 주변에 사람이 많은지,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큰 손이라는 것을 말이다.
***
“그래서 거길 갔다 왔어?”
“마지막에 용돈도 수표로 주시더라.”
“하~ 욕받이 시키고 또 돈 쥐여줬나 보네. 나 진짜 그 인간 보기 싫어!”
가게에서 큰아버지 생신 파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질색하는 진영이었다.
“그래도 진성이 형은 사람 좋더라.”
“아이고~ 그 호구야 맨날 그렇지.”
그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손님이 있었는데··· 진성이었다.
“어?!”
“뭐야? 오빠가 어떻게 왔어?”
“안녕~”
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진짜로 아성 펫드레스와 펫푸드 가게에 찾아온 진성이었다.
그는 두 사촌인 진영과 진욱에게 인사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괜찮은 가게네? 인테리어도 좋고. 가격도 나쁘지 않아.”
“오빠, 여긴 왜 왔어?”
“우리 집도 강아지 두 마리 키우잖아?”
요크셔 한 마리랑 코카 스파니엘이라는 견종 둘 키우는 집인 상규 일가.
그리고 진성은 사촌들 가게 방문 겸 손님으로 한 번 둘러보고 있었다.
“괜찮은거 있으면 몇 개 사고, 오랜만에 여기 온 김에 저녁이나 먹으려고.”
“난 별로···.”
진영은 소혜랑 같이 별로 안 내켜 했지만, 진욱은 달랐다.
“손님이니까 저녁은 내가 사는걸로 하고, 한 번 볼래? 직접 만든거야.”
“오~ 뼈를 이렇게 훈제시킨건가?”
일단 손님을 받아주고, 제품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게 단순 사촌이자 손님으로 끝날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가 나올지는 이 사람과의 오늘 저녁 자리에서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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