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150)

“아뿔싸! 은공을 몰라봤구나! 오체투지해도 부족할 판에···.”

“저분께선 사부님보다 한참 아래 연배이신 듯한데, 어찌 은공이라 하시는지요.”

제자의 질문에도 청진의 시선은 유지훈이 사라진 방향에 고정돼 있었다. 입으로는 연신 원시천존을 되뇌었다.

“설명하기 힘들긴 하나 사실이다. 무림 공적으로 몰렸음에도 마교 침공 때 천마를 쓰러뜨려 중원을 구한 분이다.”

청진은 마교 침공 당시 참전한 결사대의 일원이었다.

몰살에 가까운 피해 속에 몇 안 되는 생존자이기도 했다. 유지훈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인사를 드릴 기회가 없어 못내 아쉬웠거늘···. 서두르자. 한 놈이라도 많은 악적을 처단하는 게 은공에게 보답하는 길이니라.”

***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닷새를 달렸다.

처음 무림으로 넘어왔을 때 도착한 곳을 향했다. 무림과 21세기를 드나든 통로가 존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한순간이라도 빨리 21세기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거지꼴을 한 채 도착한 외진 숲속. 통로가 있어야 했지만 없었다.

잘못 찾았나 싶어서 다시 사흘 밤낮을 뒤졌지만, 역시 없었다.

혈마의 폭발로 인해 넘어왔기에 이전의 통로는 사라진 모양이었다. 넘어온 문을 통해서만 돌아갈 수 있는 원칙이라도 있는 건지···.

“나 돌아갈래!”

무림에 갇혀 버렸다.

***

다시 50년이 흘렀다.

21세기로 향하는 출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친 세월이었다.

과거 지인들 대다수가 세상을 떠났기에 지독스러울 정도로 고독한 50년이겠거니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아니었다.

무림 공적으로 살았던 앞선 50년 못지않게 치열한 삶이었다. 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무림의 지형을 바꿔놓기까지 했다.

혈마로 인해 무림으로 건너왔으니, 출구의 단서는 혈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강호를 누비며 혈교의 잔당들을 찾아다녔다. 닥치는 대로 때려잡으며 단서가 될 만한 정보를 캐냈다.

그 과정에서 혈교의 잔당들이 마교로 숨어들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당장 마교 총단으로 달려갔다. 혈교 잔당 때려잡으러.

때마침 혈교의 잔당들은 마교를 접수하는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교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다. 마교가 혈교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네놈들이 뭘 하든 나는 네놈들을 때려잡을 테다!”

마구 조졌다.

마교 내에 암약한 혈교 일당의 씨를 말렸다.

뜻하지 않게 혈교의 음모에서 마교를 구하게 된 결과였다.

“은공께선 누구신지요?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알 거 없고. 혈교 놈들 더 없어? 좀 더 조져야 할 것 같은데.”

신분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마교를 구한 건 21세기로 향하는 출구를 알아내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촌극인 셈이었으니.

하지만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성화령의 수호자 아니십니까?”

“응? 그건 또 뭔 소리야?”

배화교의 장로 위지천이었다.

지난번에 잠시 무림에 다녀갔을 때, 천마의 복수를 위해 화무결을 찾아왔던 인사였다.

당시 천마의 제자와 혈교의 사도는 죽였지만, 위지천은 살려 보냈다.

소멸기를 성화령의 무공 건곤대나이신공이라 호들갑을 떨고, 유지훈을 성화령의 수호자라 떠받든 덕분이었다.

파사로 떠났다가 마교가 혈교의 손아귀에 넘어갈 위기에 도움을 주러 방문한 상태였다.

“넌 또 여기 왜 와 있냐···.”

“성화령의 수호자께서 교를 구하셨습니다. 교의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화령의 수호자가 교를 위기에서 구하기까지 했으니. 위지천이 바람을 잡고, 교도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교주가 돼 주십시오!”

“교를 맡아주십시오! 만세 만세 만만세!”

교주로 추대됐다.

처음엔 뿌리치고 가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혈교 관련 자료들이 남아 있을 테니, 잘 분석해 보면 21세기로 향하는 출구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좋아. 대신 앞으로 중원 침공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교주님. 저희도 중원에서 살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이 척박한 땅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겁니까.”

“침공 같은 거 하지 말고 조용히 가서 살면 되잖아.”

“정파 놈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잘 타이르면 돼.”

총단부터 중원으로 옮겼다.

과거 유지훈이 무림에 도착했던 장소 인근 지역을 터전으로 했다.

지금은 통로가 사라졌지만,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수시로 드나들며 확인하기로 했다.

혈교 자료 분석과 예전 통로의 확인까지 투 트랙으로 출구 확보 계획에 들어간 셈이었다.

물론 중원의 정파 인사들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어딜 감히 마교 놈들이 중원을 넘보느냐!”

“여기가 전부 너희 땅이냐? 땅덩어리도 넓은데 같이 좀 살자.”

“닥쳐라!”

“그럼 몇 대 맞자.”

몇 대 쥐어박으면 대체로 얌전히 물러났다.

개중에 무식하게 의기충천한 놈들도 있었다. 한참 처맞고도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별수 없이 반사기로 호된 맛을 보여줬다. 그래도 안 되면 소멸기, 여전히 못 알아 처먹으면 심검까지.

“쥐어패서 안 되면 목을 날려야지. 어쩌겠어.”

이삼 년 그렇게 지내고 나니 그럭저럭 잠잠해졌다.

이후 마교의 중원 적응 방식은 나쁜 놈들 조지기였다.

약자를 괴롭히고 수탈하는 나쁜 놈들은 정사 불문하고 때려잡았다.

명문 정파의 고위 인사라 할지라도, 나쁜 짓을 하면 가차 없이 응징했다. 화산의 장로, 무당의 후기지수, 남궁세가의 차남···.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중심으로 다시금 발악들을 해댔지만, 그럴수록 강력하게 처단했다.

30년쯤 지나니 그러려니 하게 됐고, 50년이 되니 마교의 뜻을 높이 사는 인사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사가···.

“교주님. 소림에서 방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소림사 방장 혜광이었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교주께선 변함없이 헌앙하십니다.”

“어서 와. 요즘 편한가 봐. 이마에 주름이 싹 사라졌네.”

혜광은 수염이 허연 노승이었다.

반면 유지훈은 30대 초반의 모습. 그럼에도 유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하대했고, 혜광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유지훈이 혜광보다 50년은 더 살았다. 21세기와 무림에서 산 세월을 다 더하면 125년이 넘으니.

유지훈과 처음 만났을 때, 혜광은 약관을 막 넘긴 젊은 승려였다. 하대는 당연했다.

“형님! 저도 왔습니다.”

“또 왔냐? 공동의 장문인이라는 놈이 너무 한가한 거 아니냐?”

공동파 장문인 경문도 친마교 인사였다.

경문은 기련산에서 유지훈과 마주쳤던 청진의 제자였다. 당시 열여덟에 불과했던 청년 도사가 지금은 칠순을 앞둔 장문인이 됐다.

사부의 사연에 감복해 유지훈을 찾아왔고, 형님 형님 하며 쫓아다녔다. 백발이 성성한 노도사가 된 이후에도 형님 형님이었다.

“어쩐 일이야? 말썽부리는 놈들이라도 있어?”

“하북팽가와 사도련이 심상치 않습니다. 전쟁이라도 벌일···.”

“그건 팽가주 셋째 망나니 놈이 사도련 여자 무인 희롱해서 그런 거 아냐. 팽가주한테 사과하라고 해.”

“사도련에서 팽가 삼남을 내놓으라고 해서요···.”

“내놓으라면 내놓아야지. 잘못한 놈이 대가를 치러야지 않겠어?”

“아무리 그래도···.”

“팽가주한테 전해. 망나니 놈 안 내주면, 내가 직접 가서 조각조각 찢어서 넘겨둘 거라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유지훈이었다.

덕분에 한결같이 평화로운 중원 무림이었다.

***

지루할 정도의 평화가 이어지던 어느 날. 총관이 사색이 된 채 유지훈에게 달려왔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성지 인근에서 미친 여자가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성지에서?”

성지는 유지훈이 무림과 21세기를 드나들었던 통로를 의미했다.

사람들이 함부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조치했더니, 수하들이 교주의 성지로 지정해버렸다.

“다섯 살쯤 된 꼬마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인데, 무시무시합니다. 이기어검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어디서 여자 협객 하나가 등장했나 보네. 그런데 왜 미친 여자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타나서는 교도들의 옷을 강탈하고···. 그런데 아름답습니다.”

이기어검에 홀딱 벗고 나타났다니. 거기에 아름답기까지···.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당장 가자!”

도착한 곳엔 여인이 있었다.

강탈한 교인의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지만,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왼팔로는 아이를 안고, 오른팔을 휘저어 이기어검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따금 아이의 등을 토닥이기도 했다.

유지훈은 굳어진 듯 멈춰섰다.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왔구나···.”

유려하게 오른팔을 휘젓던 여인의 시선이 유지훈에게 멈췄다.

눈빛이 반짝였다. 환희의 광채였다. 환하게 웃었다. 볼을 타고 또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훈 씨···.”

강은영이었다.

굳어진 듯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교도들 역시 멈춰섰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유지훈이 강은영에게 다가갔다.

강은영 또한 마주 다가왔다. 발걸음은 눈빛만큼이나 아련했다.

“보고 싶었어.”

“나도요.”

부둥켜안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강은영은 여전히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환하게 웃더니 아이를 유지훈에게 넘겨줬다. 안아보게 했다.

“현진이에요. 유현진.”

“유현진? 야구 시키면 잘 하겠네. 뭐! 유현진?”

“그래요. 당신 아들이에요.”

***

그날 밤이었다.

미친 마녀에 의해 산 채로 매장당했던 강은영을 구출한 날.

유지훈은 공포에 질린 강은영과 밤새 함께했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강은영을 꼭 끌어안았다가···.

“그럼 그때 할 말 있다고 전화했던 게···?”

“맞아요. 현진이 갖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려던 거였어요.”

“아···. 전화로라도 말하지 그랬어. 미안해.”

“괜찮아요. 이제라도 책임지면 돼요.”

“책임은 진작부터 지려고 했어.”

무림의 세월 50년, 21세기의 시간 5년.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밤새 주고받아도 끝이 없었다.

“지연 씨랑 나연 씨는 둘 다 초인이 됐어요. 대한민국 서열 1위랑 2위예요. 세계 랭킹도 마찬가지고요.”

“누가 1위고, 누가 2위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요. 처음엔 나연 씨가 위였는데, 지연 씨가 화 어르신한테 무공을 배운 이후엔···.”

“무결이 제자는 나연 씨 아니었나? 역시 지연이 욕심 많아. 사부까지 빼앗다니.”

“나연 씨가 추천했어요. 지금은 둘 다 제자예요. 서로 사자, 사매라고 불러요. 화 어르신이 시켜서요.”

“무결이 녀석 무림에선 제자 안 둔다고 그러더니···. 미인계에 홀딱 넘어간 모양이네.”

그러고 보니 홋카이도 문제도 궁금했다.

혹시 일본 놈들 유지훈 안 보인다고 딴소리한 건 아닌지.

“왜 아니겠어요. 유지훈 씨 행방 묘연하다는 소식 들리니까 바로 무효라고 지랄을 해댔죠.”

“그래서?”

“화 어르신이랑 이자걸 대표가 가만히 있을 분들인가요. 바로 쳐들어가서 일본을 발칵 뒤집어놨죠. 빨주노초파남보 싹 데리고 가서요.”

“저런···.”

“홋카이도는 앞으로 100년 동안 지훈 씨 땅이에요. 반은 화 어르신 거겠네요. 사업권은 이자걸 대표 소유고요.”

무림 못지않게 치열하면서도 평화로운 21세기 대한민국이었다.

그럼 가장 중요한 대목. 강은영 모자는 어떻게 무림으로 건너올 수 있었을까?

“현진이 생일 때마다 7호 던전에 갔어요. 혹시 아빠 돌아올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런데 이번에 다섯 살 생일에는 현진이가 내 팔을 잡고 어디론가 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아! 현진이한테는 내 피가 흘러서 통로가 보인 모양이네.”

유지훈에겐 보이지 않는 통로가 아들한테는 보인다는 의미였다. 21세기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돌아가야지. 빨리 가자.”

“그건 그런데요···.”

강은영이 살짝 난색을 드러냈다.

“현진이가 또래 아이들한테 맞고 다녀요. 누굴 닮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렸을 때 많이 맞고 다니긴 했어.”

“아···. 어쨌거나 무림에 온 김에 무공 좀 가르친 다음에 돌아가면 어떨까 싶어요.”

“무공을?”

“여기 10년 있어도 거긴 1년밖에 안 지난 거잖아요. 10년 정도 무공 익히게 하면 돌아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것 같은데···.”

“기왕 무공을 가르치려면 내공부터 쌓게 해야 하는데···.”

마교의 심법은 마공이라는 난제가 있었다.

아들에게 마공을 가르치긴 찝찝하다는 문제였다.

“에잇! 소림이나 공동 같은 데서 불러다가 가르치면 되지. 뭐. 그래 10년 정도 더 있다가 가자.”

“좋아요. 나도 교주 부인으로 사는 건 어떤지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유지훈이 빙긋 웃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에서 아들이 뛰놀고 있었다. 호위들과 어울려 병정놀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저 녀석은 소교주가 되는 건가? 나중에 교주 되겠다고 하면 큰일인데···.”

“안 가겠다면 떼놓고 우리 둘만 가죠. 뭐.”

“그럼 저 녀석 혼자 외롭지 않을까? 동생이라도 있어야···.”

“서둘러야 해요. 저 내일모레면 마흔이에요.”

“급하게 됐군. 현진이 노느라 정신없을 때 얼른 합시다. 험험.”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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