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핏빛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것을 휘감아 태워버릴 정도로 강렬한 기세였다.
십이 성 공력이 실린 아수라혈염기의 화염이었다.
“기다렸다!”
아껴뒀던 반사기를 꺼내 들 순간이었다.
사마염의 아수라혈염기가 최대치에 이르렀을 때, 최대한의 위력을 지닌 화염을 쏟아냈을 때 되돌려주려 아껴둔 반사기였다.
그래야 사마염이 입을 피해 또한 극대화될 수 있을 테니.
“돌려주마. 받아라!”
반사기가 발동했다.
핏빛 화염이 고스란히 사마염에게 되돌아갔다.
아수라혈염기의 벽을 뚫고 사마염을 덮쳤다. 집어삼켰다. 전신을 태우기 시작했다.
“크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적잖이 당황한 듯 소각의 기세를 잠재우려는 사마염의 손놀림이 어지러워졌다.
“두전성이! 네놈 모용가의 사람이더냐?”
“모용씨 찾는 사람이 여기 또 있었네. 하긴.”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무림 다녀왔을 때 그쪽 제자를 자처하는 놈을 만났어. 아수라혈염기 어쩌고 하길래 그대로 돌려줬거든. 지금 그쪽한테처럼. 그놈도 모용씨 찾더라. 그 사부에 그 제자인지···.”
물론 무림에서의 상황과는 달랐다.
그때는 반사기가 작렬해 소각시킬 수 있었지만, 사마염에게까지 똑같이 적용되진 않을 터였다.
활강시의 공능을 지닌 사마염에겐 무한 재생 능력이 있으니.
화염이 잦아들자 재생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까맣게 타버린 육신에 서서히 새살이 돋는 모습이었다.
두 번째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숨겨뒀던 소멸기를 발동해 아수라혈염기를 없애버릴 기회였다.
접촉. 붙잡고 늘어져야 했다. 다만 여전히 사마염의 주위엔 아수라혈염기의 벽이 형성돼 있었다.
기세가 한풀 꺾였기에 뚫고 들어갈 순 있겠지만, 유지훈 또한 화염에 휩싸이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물론 유지훈에게도 재생 능력이 있었다. 전신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재생 능력에 맡긴 채 접촉할 순간이었다.
“끄으윽···.”
사마염의 양팔을 붙잡았다.
전신의 살갗이 녹아내리는 통증. 상상 이상의 고통이 밀려들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소멸기를 발동했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기분이 머리 꼭대기까지 전율을 일으켰다.
“뭐 하는 짓이냐!”
당황해 고함치면서도 사마염은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거세게 아수라혈염기를 일으켰다. 유지훈의 장심에 쏟아부으려는 양상이었다.
스스로에게도 고통일 터였다.
화염의 기세는 여전히 그를 휘감고 있었으니. 재생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으킨 화염의 기운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서로 간에 고통을 감내하며 기세를 뿜어내는 형국.
시간은 유지훈의 편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길어야 10초 남짓이었으니. 소멸기가 완성되기까지.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기운이 사라졌다.
소멸기가 완성됐다. 동시에 주위를 휘감았던 혈기의 벽 또한 사라졌다. 아수라혈염기가 소멸한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사마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유지훈을 노려봤다.
유지훈은 사마염의 팔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유를 두고 화염에 당한 화상을 다스리는 모습이었다.
“화공대법! 네놈 성수파의 제자였더냐?”
“성수파? 혹시 성수노괴 타령하려는 거야? 그건 좀 신박하네.”
이제 시간과 공간 모두 유지훈의 차지였다.
아수라혈염기를 잃은 사마염은 그냥 활강시였다.
무한 재생 능력과 절세의 신체 능력은 여전하겠지만, 아수라혈염의 벽 없이는 심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심검이 트릭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최종 병기로 탈바꿈할 차례였다.
“어, 어떻게 평생의 공력이 한순간에···.”
사마염이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양손을 내려다봤다.
화염에 당한 상처는 거의 회복된 모습이었다. 다만 안간힘을 써봐도 아수라혈염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다 방법이 있어서 혼자 온 거라고. 조금만 기다려 손만 멀쩡해지면 바로 끝장내줄게.”
유지훈의 손도 상당히 재생된 상태였다.
화상으로 뒤덮인 채로도 심검을 발동할 순 있었지만, 약간의 고통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그의 편이었으니.
여유를 부렸다.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의 여유였다.
“으으으. 네놈이!”
분노를 토해내려던 사마염이 멈칫했다.
순간 유지훈 또한 주춤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마염을 쳐다봤다.
주위를 감싸고 도는 기운이 사뭇 기묘했다. 나른한 열기가 일렁이는 느낌이었다.
“뭐지? 설마···?”
사마염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쳤다.
이내 사라졌다. 애써 당황한 기색을 유지하려는 인상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유지훈이 상황을 읽었다.
아수라혈염기가 재생되고 있었다.
내공의 영역에만 속한 게 아니었다. 아수라혈염기는 활강시의 공능에도 적용된 것이었다.
“눈치챘느냐? 네놈 화공대법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다시금 혈기가 피어올랐다.
사마염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괜찮아. 늦지 않게 눈치챘어. 강을 건너기 전이잖아. 그 정도면 끝장내기 충분해.”
아수라혈염기의 재생이 진행되는 과정이었다.
재생이 완성되기 전이면 심검으로 파고들 여지가 충분했다. 불완전한 벽을 뚫고 들어가 목을 날리면 끝이었다.
다만 사마염에게도 최후의 비책이 있었다.
“선천진기가 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과 끝장을 보겠다!”
아직 불완전한 아수라혈염기. 선천진기를 끌어올려 메우려 했다.
사마염의 전신을 타고 선홍색 기운이 폭주했다. 거대한 기둥을 형성하더니 유지훈을 덮쳐왔다.
몸을 내던지며 심검을 내지르던 찰나, 손이 주춤했다.
본능이 필사적으로 지시했다. 두뇌를 따르지 말고, 본능을 좇으라고. 심검이 아닌 반사기를 꺼내 들어야 한다고.
“다시 가져가라!”
돌진하는 자세 그대로 반사기를 발동했다.
선홍색 기운의 거대한 기둥이 사마염에게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사마염 또한 준비하고 있었다. 선천진기를 모조리 끌어올려 돌아오는 아수라혈염기를 밀어냈다.
유지훈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틈에 손에는 묵빛 빛무리, 심검이 쥐어진 채였다.
콰콰쾅!
거대한 기운이 충돌했다.
콰콰쾅!
천지가 뒤흔들리는 폭발음과 함께 땅이 가라앉고 산이 무너져내렸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전신에 휘몰아쳤다.
정신을 잃었다.
***
“으으음···.”
온몸이 으스러진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흙더미 속이었다. 가까스로 헤치고 몸을 일으켰다.
폭발의 영향 때문인지 옷은 넝마가 돼 있었다. 전신이 상처로 뒤덮였지만, 어느 정도 회복된 모습이었다.
곳곳의 뼈도 부러진 듯했지만, 아물어 붙고 있는 느낌이었다.
재생 능력은 이상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혈마, 혈마 놈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흙더미가 들썩이는 장면이 포착됐다.
꾸역꾸역 흙더미를 뚫고 몸을 일으키는 상처투성이 괴인. 사마염이었다. 상태는 유지훈보다 안 좋아 보였다.
하긴. 선천진기까지 다쳤으니, 재생 능력이 작동하려면 한결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
“질긴 놈···.”
이제야말로 끝장낼 시간이었다.
심검을 일으켰다.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통증이 짜릿한 전율로 다가왔다.
“그래. 고통도 짜릿한 순간이지.”
사마염의 주위로 옅은 선홍색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제 끝장을 봐야 할 때라고. 결사적으로 아수라혈염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미약했다. 선천진기가 재생되지 않아서인지 희미한 불씨에 그치는 모습이었다.
“잠,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다오.”
“무슨 개소리야! 빨리 끝내고 집에 갈래.”
당혹한 기색의 사마염이 맹렬하게 양손을 휘저었다.
사마염의 머리통을 겨냥해 빛의 검을 내리쳤다.
쾅! 쾅! 쾅!
손이 으스러지고, 팔이 꺾였다.
활강시의 단단한 육신도 아수라혈염기 없이는 심검에 무너졌다.
쾅! 쾅!
마침내 머리가 으깨졌다.
사마염의 몸이 축 처졌다.
서걱!
기세를 몰아 목을 날려버렸다.
머리를 짓밟았다. 터져버린 뇌가 한 줌 뇌수로 흘러내렸다.
끝이었다.
“하아. 징글징글하네. 이제 집에 가자.”
걸음을 옮기는데, 뭔가 이상했다.
눈에 들어온 풍경이 폭발 전과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수풀이 우거진 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 주위엔 기암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폭발로 땅이 솟구친 건 아닐 텐데···.
멀찍이서 인기척이 감지됐다.
여러 사람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제법 빨랐다. 경신술이라도 발휘하는 듯했다.
잠시 후 검은 도복을 입은 도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이 성성한 노도사를 선두로 다섯 명의 청년 도인들이 뒤를 따랐다.
유지훈을 발견한 노도사가 포권으로 인사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요란한 소리가 들려서 달려왔습니다.”
유지훈은 말없이 노도사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험한 일을 겪으신 모양입니다. 수배 중인 흑도 수괴 놈이 산채를 접수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여기, 여기가 어디죠?”
“으음···.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여긴 감숙의 기련산입니다. 빈도는 공동의 청진이라고 합니다.”
“공동···. 공동파!”
아악! 무림으로 돌아왔다.
***
아름다운 방문객 [完]
“요즘 기련산 일대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빈번하다고 들었습니다. 빈도가 제자들과 알아보러 오는 길이었습니다.”
노도사, 청진은 공동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정의로운 성품을 지닌 정파 무림의 원로였다.
기련산에 흑도 무리가 기승이라는 소식에 제압하기 위해 몸소 나선 상황이었다. 흑도 무리에게 당한 것처럼 보이는 유지훈을 안쓰러워하며 도와주려 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많이 바빠서···.”
유지훈은 애써 외면하며 현장을 벗어나려 했다.
이유가 있었다. 청진과는 구면이었다. 좋은 인연이긴 했지만, 지금 엮여서는 몹시 귀찮을 것 같았다.
역시나 청진이 유지훈을 붙잡아 세웠다.
“대협이 영 낯설지가 않습니다. 빈도와 인연이 있지 않으신지요?”
“아닐 겁니다. 저는 이곳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럼 이만.”
유지훈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있는 힘껏 달렸다. 한시바삐 도착해야 할 곳이 있었다.
유지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진이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