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쯤이었더라···. 그때 원체 정신없이 내려와서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 게 아쉽군.”
산길로 접어들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숲속을 헤맸지만, 5년 전 과거의 그 장소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외진 숲속을 샅샅이 뒤지고도 성과는 없었다. 이따금 비슷한 장소에 도달하긴 했지만, 무림으로 향하는 문은 없었다.
“이 산이 아니었던가···.”
일단 산을 내려왔다.
옆 산으로 이동하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키득키득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나야.”
영준한 용모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나 봐?”
“네, 네놈이 어떻게···!”
“내가 그랬잖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괴물은 차원을 넘나들 수 없다고. 아무리 용을 써도 그쪽한테 문은 존재하지 않을 거야.”
유지훈이었다.
혈마 사마염의 행로를 정확하게 읽었다.
길목을 차단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
식인 괴질을 해결한 뒤 유지훈 일행은 뿔뿔이 흩어졌다.
사마염은 한국으로 향했다. 사마염과 격돌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내상은 어느 정도 다스렸지만, 외상도 가볍지 않았다. 한동안 입원 치료가 불가피했다.
“혼자 가도 되겠는가? 혼자 상대하기에 버거울 걸세.”
“그래서 같이 가겠다고? 지금 네 상태로는 짐밖에 안 될 것 같은데. 잔소리 말고 가서 치료나 잘 해.”
화무결은 단신으로 혈마 처단에 나선 유지훈을 염려했다. 첫 대결에서 둘의 협공으로 간신히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유지훈은 여유롭기만 했다.
“걱정할 것 없어. 아수라혈염기가 내공의 영역에 있는 걸 확인했잖아. 이제 화공대법이랑 두전성이 다 동원하면 돼.”
반사기로 받아치고, 소멸기로 없애버리면 된다고 자신했다.
“그래도 조심하게. 놈에겐 활강시의 공능이 있네.”
화무결은 떠났고, 이자걸은 당분간 일본에 머무르기로 했다. 야마가토제약 인수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남는 김에 홋카이도 문제도 말끔하게 정리해주세요. 약속 지켜지는지 문서 절차 확실히요.”
“걱정마십시오. 신화 인력 불러들여서 현지답사까지 진행할 생각입니다. 쪽발이 놈들 딴소리하면, 녀석들 싹 데려다 놓으면 될 테고요.”
거대 왕도마뱀 가족의 일본 상륙. 미국의 핵 투하 작전보다 무시무시한 결과로 이어질 터였다.
“그나저나 진짜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제가 같이 가도 되는데요. 아니면 나연이라도 합류시키시든지요.”
“아니에요. 저 혼자가 가장 유리합니다.”
이나연이나 유지연의 합류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화무결 못지않은 강자들이었다. 분명 도움은 될 터였다.
하지만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혈마의 아수라혈염기에 당하면 회복이 불가할 테니.
둘의 안위를 신경 쓰며 싸울 바엔 혼자가 낫다는 판단이었다.
“나는 일단 자치국으로 돌아가겠소.”
곤륜의 사부 랴오위안허는 조선족 자치국으로 가기로 했다.
랴오위안허는 망명을 요청한 상태였는데, 최종 망명지로는 한국을 원했다. 함께 망명을 원한 연구소장 쉬웨이칭도 마찬가지였다.
이윤성에게 문의한 결과 흔쾌히 수용하기로 했다.
랴오위안허는 우선 조선족 자치국으로 간 뒤 쉬웨이칭을 데리고 한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알아보란 건 어떻게 됐어?”
“안 그래도 드리려던 참이오. 쉬웨이칭 박사에게 자료가 있었소.”
랴오위안허가 서류 몇 장을 건넸다.
쉬웨이칭이 전송한 자료를 출력한 서류들이었다.
혈마의 신상 자료였다. 북부전구에 합류할 때 신분인 장리펑의 자료.
“연구소에 합류할 때 신원 조사를 확실히 한 모양이오. 출신지부터 행적까지 비교적 상세히 기재돼 있소.”
“랴오닝성 출신으로 돼 있네.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가까운 곳이군. 공안 몰살 사건···. 사고도 제대로 치고 다녔네.”
“북부전구 각성자 부대는 능력 위주로 뽑는다 들었소. 살인 정도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였을 거요.”
필요한 건 출신지였다.
무림에서 건너온 장소가 되겠지. 대규모 살상까지 저질렀으면, 어느정도 앞뒤가 맞기도 했다.
유지훈의 목적지는 랴오닝성과 네이멍구 자치구 접경 카라친쭤이 몽골족 자치현이었다.
출발하기에 앞서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선 이광진 대통령의 축전.
[소식 들었네. 다시금 일본의 영웅이 됐다지? 일본 총리가 감사 차원에서 특사를 보낸다고 하네. 수고했네. 대한민국의 국격을 한껏 높여줬어. 고맙네.]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보다 홋카이도를 획득했다고 하던데?]
“아, 그건 일본 정부에서 작게나마 성의를 표시한다고 해서요···.”
[유지훈 초인 덕분에 대한민국의 영토가 넓어졌군. 대마도나 오키나와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아! 그건 아닙니다. 홋카이도는 제가 따로 받은 겁니다.”
[자네가 따로 받았다고?]
“일본 영토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제가 앞으로 50년간 홋카이도의 땅 주인이 되기로 한 겁니다.”
[아···.]
“대통령님 온천 생각나시면 언제든 건너오십시오. 할인 세게 넣어드리겠습니다.”
[할인···.]
낙심한 대통령과 통화가 끝나자마자 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강은영이었다.
[잘 지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죠?]
“나야 잘 지내지. 다쳐봤자 바로 낫고. 은영이야말로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요. 며칠 전부터 출근도 시작했어요. 협회 업무는 좀 벅차서 길드 일만 보고 있어요.]
“그래. 쉬엄쉬엄해. 보고 싶네. 일 마치는 대로 서둘러서 갈게.”
[유지훈 씨한테 보고 싶다는 말을 다 듣고···. 기분 좋네요.]
“그런 걸로 기분 좋다니, 나를 나쁜 남자로 만드네. 그나저나 왜 전화한 거야? 안부 물으려고?”
[할 말이 있어서요.]
“할 말? 뭔데?”
[전화로 말할 건 아니고요. 얼굴 보고 해야 해서···. 언제쯤 오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뭘까? 엄청 궁금하네. 늦어도 닷새 후면 갈 거야.”
[많이 궁금해해요.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일 거예요.]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음성의 분위기가 묘했다.
뭘까? 궁금해서라도 서둘러서 혈마를 처치해야 했다.
무림에서 건너온 혈마의 21세기 출신지 카라친쭤이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혼자인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유지훈과 마주친 사마염은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둘러봐도 일행이 없자 놀라움이 자신감으로 바뀌어 갔다.
“보시다시피.”
“하하하. 어리석군. 아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맙다고 하면 내가 미안해지지. 죽이러 왔는데···.”
“혼자? 하하하. 둘로도 힘들었을 텐데? 심지어 패선의 제자 녀석이 진짜던데. 그 녀석 없이 네놈 혼자 될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야마가토제약에서 격돌 당시 유지훈과 화무결은 고전했다.
사마염이 극성으로 아수라혈염기를 끌어올린 이후에는 혈염의 영역을 뚫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동수만 이뤘을 뿐이었다.
활강시의 공능을 보유한 사마염을 공략할 방법도 찾지 못했다. 상처를 입혀도 바로 재생되니, 모든 공세가 도돌이표에 불과했다.
게다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사마염의 공력. 만일 연구소에서 감염자가 뛰어나오지 않았으면, 화무결은 화를 면하기 힘들었을 터였다.
맞대결 양상에선 유지훈 역시 곤경에 처했을 테고.
“단세포적인 생각이야.”
사마염의 득의양양한 태도에도 유지훈은 여유롭기만 했다.
“뭐라?”
“그쪽은 나를 잘 모르잖아. 나는 그쪽을 잘 알고. 그런데도 혼자 왔어. 숨어서 암습하려는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앞을 가로막았지.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흐음. 나를 잘 안다?”
“응. 혈마. 아수라혈염기를 완벽하게 연성했고, 스스로 활강시가 돼 노화를 막았지. 무한 재생 능력을 얻기까지 했고.”
유지훈이 입을 비쭉 내밀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약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괴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걸 알면서도 혼자 왔어. 처리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겠지.”
“하하하.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사마염이 광오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네놈 덕분에 내 선택지가 한층 넓어진 듯하구나.”
“선택지가 사라졌을 텐데. 어쨌거나 어디 들어나 볼까?”
“눈엣가시를 제거하고 여기 남아도 되고, 원래 계획대로 무림으로 돌아가도 되고. 아. 영원히 가는 건 아니지. 혈교를 이끌고 돌아와 21세기를 혈교의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니.”
“괴물 따위에게 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말했을 텐데.”
유지훈이 심드렁하게 힐난하자, 사마염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받아쳤다.
“네놈을 앞세워서 무림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지. 네놈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문을 통해서 말이야.”
“지랄도 풍년이네. 안 되겠다. 말이 너무 많아졌다. 귀가 더러워진 것 같아. 빨리 끝내고 귀부터 씻어야겠다.”
우렁찬 기합과 함께 유지훈의 손에서 묵빛 기운이 솟구쳤다. 거대한 빛무리가 검의 형상을 이뤘다.
심검의 발동이었다.
“그깟 검강 따위···.”
사마염 또한 전신을 휘감은 핏빛 기운으로 응수했다.
아수라혈염기가 악귀의 형상으로 사마염 주위를 뒤덮었다.
결전의 서막이 올라갔다.
***
결전의 날 (2)
유지훈은 알고, 사마염은 모르는 사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마염의 믿음을 무너뜨릴 결정적인 차이였다.
유지훈이 보유한 소멸기와 반사기 그리고 내공의 영역에 존재하는 사마염의 아수라혈염기. 유지훈의 전략이 여기에 초점에 맞춰져 있음을 사마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반사기는 거들고, 소멸기로 끝낸다. 심검은 트릭이다.’
결전에 임하는 유지훈의 기본 전략이었다.
소멸기가 결정적인 최종 병기였다. 반사기도 위력적이겠지만, 사마염의 무한 재생 능력까지 제거할 순 없으니.
게다가 무한 재생 능력은 활강시의 공능이라 내공의 영역도 아니었다. 반사기와 소멸기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결국엔 소멸기로 아수라혈염기를 없애버려야 했다. 보통의 활강시라면 심검으로 충분히 끝장낼 수 있을 테니.
다만 근원적인 핸디캡을 극복해야 했다.
소멸기의 기본 조건, 접촉. 사마염 정도의 심후한 내공이면 7초 이상의 접촉이 필요했다. 어쩌면 10초까지도.
사실상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관건은 접촉이었다. 아수라혈염기의 벽을 뚫고 접촉해 소멸기의 완성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였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반사기와 소멸기는 숨긴다. 심검은 트릭이다.’
유지훈은 두 차례의 결정적인 순간을 설정했다.
반사기로 사마염에게 타격을 가하는 순간과 소멸기로 아수라혈염기를 제거하는 순간이었다.
아껴둔 반사기로 아수라혈염기를 되돌려줘 사마염에게 부상을 입힌 뒤 숨겨둔 소멸기로 아수라혈염기를 제거. 그런 다음 활강시의 목을 날린 뒤 뇌를 압살하는 수순이었다.
일단 심검만으로 대적에 나선 이유였다.
“검강 따위로 내게 상처라도 입힐 수 있을 것 같으냐!”
사마염은 기세등등했다.
아수라혈염기로 주위에 거대한 벽을 세운 뒤 핏빛 화염을 뿜어내며 공세를 펼쳤다.
아수라혈염기는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인 동시에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이었다.
“바보냐? 검강은 실존하는 검에서 비롯되는 거잖아. 검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검강이냐.”
“오호! 심검이로군. 그래 봤자 쓸모없긴 마찬가지다.”
쓸모없다는 사마염의 폄하가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했다.
사마염은 휘몰아쳤고, 유지훈은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이따금 내지른 빛의 검은 아수라혈염기의 벽에 막혀 튕겨 나오기 일쑤였다.
든든한 방어벽 안에서 사마염은 기세를 올렸다.
내지르는 핏빛 화염이 강렬해졌다. 크기도 커졌고, 혈기도 짙어졌다. 유지훈의 전신을 집어삼킬 듯했다.
필사적으로 심검을 휘둘러 버텨내긴 했지만, 빛무리의 기운이 점차 흐릿해져 갔다. 심검이 축소되는 양상이었다.
“실망스럽구나. 그토록 큰소리치더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냐.”
사마염이 혈염의 공세를 잠시 멈췄다.
“어떠냐? 나를 무림으로 데려다주겠느냐? 그럼 살려는 주겠다.”
“헛소리 집어치워! 죽여 없애야 할 놈을 무림에 왜 데려가?”
“어리석은 놈. 끝까지 주제 파악이 안 되는구나. 그럼 죽어야지.”
사마염이 다시금 공력을 끌어올렸다.
전신을 휘감은 아수라혈염기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혈기로 이뤄진 악귀의 형태도 거대해졌다. 유지훈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혀를 날름거리는 형상이었다.
“그럼 이만 가거라!”
사마염이 힘차게 양손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