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쫓으려던 유지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추격을 포기하고 화무결에게 다가갔다. 상세가 가볍지 않아 보였다.
“괜찮냐?”
“지독하군. 그래도 천마 때 보다는 한결 낫네.”
“당장 죽진 않겠네.”
안색은 창백했지만, 표정은 편안했다.
화무결의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내공을 끌어올려 내상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유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내상을 입었을 때보다 더 위험한 순간이었다.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치료할 때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 주화입마에 들 수 있었다. 무인에겐 죽음보다 가혹한 결과였다.
사마염의 추격을 접어두고 화무결에게 다가온 이유였다.
가장 큰 위험 요소인 실험체 여인은 이자걸에 의해 무난하게 제압당하고 있었다. 아예 노리개로 전락한 양상이었다.
왼팔과 오른 다리가 잡아 뜯겼다. 오른팔은 어깻죽지가 짓이겨졌고, 왼 다리는 발목이 돌아갔다. 절정의 신체 능력이 무용지물이 됐다.
괴인 이자걸은 실험체 여인의 머리를 잡아 뽑으려는 중이었다.
실험체 여인이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뿌리치고 있었지만, 그리 머지않은 듯했다. 몸부림이 부질없어 보였다.
그때 화무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색이 어느 정도 원래 색깔을 되찾았다.
“휴우. 한 줌 내공만 부족했어도 낭패를 볼 뻔했네.”
“미안하다. 잠시 딴 생각하는 바람에···.”
“아닐세. 나도 방심했네. 피할 수 있었는데, 오기로 부딪혔지. 자네한테 공격의 여지를 준다는 생각에···.”
화무결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넨 나를 돌보기보다 놈을 추격했어야 했네. 어디로 도망가서 뭘 할 줄 알고···.”
“무슨 소리야! 네가 우선이지. 무림에서 잘 살던 녀석 여기로 데려온 게 난데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
“그래도···.”
“괜찮아. 튀어봤자 벼룩이야. 내 손바닥 안에 있어.”
“으응?”
“어디로 가는지 훤히 아니까 저놈 걱정은 할 것 없어.”
그러는 사이 괴인 이자걸이 실험체 여인의 목을 잡아 뜯었다.
콰지직!
실험체 여인의 목과 신체가 분리됐다.
육신의 무한 재생 능력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머리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나머지 육신은 죽음의 영역을 향했다.
“이것도 되나 한번 볼까?”
머리를 잃은 육신이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머리를 찾아 다시 목에 붙이려는 몸부림인 듯했다.
괴인 이자걸이 피식 웃더니 머리를 손에 쥐여줬다.
머리가 목에 닿는 순간, 붙기 시작했다. 분리됐던 목과 신체가 다시 하나가 되는 모양새였다.
“에잇! 징그러워. 확인했으니까 됐다.”
입가에 번진 냉소와 함께 괴인 이자걸은 다시 목을 잡아 뜯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시 붙일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테니.
이자걸이 분리된 머리를 들고 다가왔다. 머리채를 움켜쥐었기에 덜렁덜렁 흔들리는 모습이 영 흉측했다.
심지어 머리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연신 괴성을 질러댔다.
“짱개 놈들이 엄청난 걸 만들었네요. 제대로 애 좀 먹었습니다.”
“애먹은 거 맞아요? 가지고 노는 것 같던데요?”
“티 났습니까? 안 그렇게 보이려고 나름 애썼는데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자걸은 여전히 핏빛 괴인의 모습이었다.
괴인이 살아있는 머리를 흔들흔들 들고 있는 장면은 사뭇 괴기스러웠다. 비위가 약한 사람에겐 격한 구토를 유발할 법했다.
역시 야마무라 레이코를 비롯한 감염자들은 뱃속의 음식물들을 게워내 확인하고 있었다.
“그거 계속 그렇게 들고 있을 겁니까? 원래 모습으로는 언제 돌아와요? 둘 중 하나라도 정리 좀 하시죠?”
“아. 이건 연구 목적으로 가져갈 생각입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건 10분 정도 더 걸리겠네요. 제 의지와 상관없는 거라···.”
정돈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이자걸의 소유가 된 연구소부터 정리해야 했다.
야마무라 레이코 등 이제 식인 괴질에서 벗어난 자들을 앞장세워 연구소로 향했다.
“와~. 목불인견이 여기 또 있었네.”
수십 개의 침상 위에 처참한 몰골의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감염자, 이제는 회복된 자들이 연구소 구석에 모여 있었다. 공포에 질려 옴짝달싹 못 하는 양상이었다.
“다 끝났으니까 집으로들 가요.”
“정말 그냥 가도 됩니까?”
다들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간 저지른 짓이 있으니, 선뜻 걸음을 내딛기 힘들겠지.
그러고 보니 치유된 이후에도 기억은 보존되는 모양이었다. 이지를 상실한 식인 괴물은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이자걸이 가장 유심히 관찰한 대목이기도 했다.
“그럼 그냥 가지 어쩌시려고? 아니구나. 가기 전에 여기 청소 좀 해요. 시체들 싹 치우고, 핏자국도 깨끗하게 닦아요.”
뒷정리를 맡겨놓고 연구소를 나서려 했다.
야마무라 레이코가 유지훈의 소매를 가만히 잡아끌었다.
“저기요.”
“뭡니까?”
“저희들 집이 다 오사카에 있어서요. 여기서 한참 먼데, 차비가 없어요. 올 때 걸어왔거든요.”
“올 때 걸어왔으면 갈 때도 걸어가요! 물에 빠진 거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지긋지긋한 일본과 완전한 작별의 시간이었다.
아니지. 홋카이도의 주인이 됐으니, 수시로 들락거리긴 하겠구나.
“혈마 놈 괜찮겠나? 제법 시간을 지체한 것 같은데···.”
화무결이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추적의 골든 타임을 놓치진 않았나 적잖이 신경 쓰는 눈치였다.
“괜찮아. 어디로 갔는지 안다고 했잖아.”
“어디로 갔는데?”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안다면서?”
“응. 알아보면 돼.”
“당최 무슨 소리인지···.”
***
미국이 본격적인 핵 투하 작전에 돌입했다.
일본 거주 미국인 전원 귀국이 이뤄졌고, 주일 미군 또한 철수를 마쳤다. 작전에 동참하는 공군과 해군 일부만 인근 해역에 머물렀다.
마지막으로 주일 미 대사관 인력까지 송환을 마쳤다.
포 호스멘의 남은 둘, 흑기사 엘라니스 잭슨과 청기사 데이비드 포스터의 귀국이 완료된 시점이었다.
“최초 감염자를 확보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감염자를 생포했으니 연구에 엄청난 진전을 기대하게 됐습니다.”
이번 감염자 확보 작전에서 미국은 국가 전략 자산을 둘이나 잃었다. 포 호스멘의 백기사 로버트 미첨과 적기사 마커스 수아레스.
북미 최강의 초인 둘을 잃었지만, 장엄한 희생으로 간주했다. 생포한 감염자로 슈퍼 솔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이들을 능가하는 초인 군단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저스틴 로저스를 통해 감염자 하나를 더 확보했습니다. 별도 연구를 추진할 예정입니다. 상호 보완 관계가 될 것입니다.”
CIA 블랙 조직에서 다크 디멘션과 협력을 통해 손에 넣은 감염자도 미국의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요인이었다.
저스틴 로저스는 오사카를 빠져나오면서 납치한 감염자를 CIA에 넘겼다. 1억 달러라는 거액을 챙겼다.
당초 다크 디멘션에서 직접 연구할 생각이었지만, 거액의 대가와 완성된 슈퍼 솔져를 제공받는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작전은 이틀 뒤 개시합니다. 사흘에 걸쳐 진행됩니다.”
일단 감염자가 분포된 도시 위주로 핵미사일을 때려 박고. 이후 전투기를 동원해 나머지 도시까지 타격하는 수순이었다.
사실상 일본 열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드는 흉험한 작전이었다.
작전 개시를 앞두고 마지막 점검에 한창일 때, 일본 정부로부터 긴급 연락이 왔다.
[이유 없는 핵 투하 계획을 당장 폐기하시오! 오늘 중으로 중단하지 않으면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고발하겠소.]
“어째서 이유가 없다는 거요? 일본 전역에 만연한 식인 괴질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요. 미국은 인류의 구원자로 나선 거요.”
[식인 괴질이라니 무슨 말이오? 일본에 그런 일은 없었소. 괜한 모함으로 국제 사회의 공적이라도 되고 싶은 거요?]
일본은 강력하게 발뺌했다.
동영상 하나를 전송하며 통화를 마쳤다.
유지훈이 촬영한 동영상이었다.
[일본에 내 땅도 있어. 홋카이도가 내 땅이야. 만일 내 땅에서 티끌 하나라도 상하는 일 있으면 대통령 이하 관련자들 모조리 목을 썰어버릴 거야. 못할 것 같아? 그럼 확인해보던가.]
미국 정부는 어이가 없었다.
직접 가서 확인한 사실인데, 저토록 뻔뻔하게 발뺌하다니.
유지훈의 협박도 어처구니없었지만, 정보기관을 총동원해 파악해보니 근거 없는 협박은 아니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작자였다.
“증거가 있지 않소. 감염자를 둘이나 확보했는데.”
“감염자를 공개하면 연구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일본 놈들의 억지부터 제압해야···.”
일단 감염자 상황부터 살핀 뒤 대응책을 정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 압박용으로 사용할지, 국제 사회에 공개해 일본 핵 투하에 협조를 구할지는 다음 문제로 남겨뒀다.
그런데.
“멀쩡합니다. 열 번이나 검사했는데 결과가 음성입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건강에 전혀 특이점이 없습니다. 감염자가 아닙니다.”
포 호스멘이 확보한 감염자에 이어, 다크 디멘션이 1억 달러에 팔아넘긴 감염자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감염자 둘을 얻는 과정에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포 호스멘 중 둘을 비롯해 북미각성자협회 전력 상당수를 잃었다. CIA 아시아태평양 조직도 와해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 거주 미국인들 귀국과 주일 미군 철수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손실도 수천만 달러에 달할 정도였다.
망연자실한 상황에 동영상 하나가 더 도착했다.
유지훈이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당장 핵미사일 뚜껑 안 닫으면 당장 쳐들어갈 테니까 알아서들 해.]
“저 작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협박에 굴복해야 하냔 말입니다!”
“모든 정보기관이 입수한 자료와 포 호스멘의 전언을 종합해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결과 무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됐습니다.”
“각성자 전력을 총동원하면 되지 않습니까? 군대까지 동원해서 압살해 버리면···.”
“어떻게 되긴 하겠죠. 다만 그 과정에서 피해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입니다. 단언컨대 작전 관련자들의 목은 싹 사라질 겁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핵 투하 작전은 폐기됐다.
***
결전의 날 (1)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시 외곽 카라친쭤이 몽골족 자치현.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넝마를 방불케 하는 복장에 머리도 산발을 한 채였다. 거지를 보는 듯했다. 다만 안광은 형형했다. 뿜어내는 기세도 예사롭지 않았다.
사마염이었다.
야심 찬 일본행이 유지훈 일행으로 인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 뒤 중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귀국길은 험난했다.
양팔을 잃은 채 도주한 뒤 팔이 재생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다. 완전한 회복까지 한나절이 걸렸다.
바로 공항으로 달려갔지만, 중국행 항공편은 없었다. 아니 항공편 자체가 없었다. 모든 항공편이 무기한 운행 중단 상태였다.
항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객선은 물론이고, 화물선도 운항 중지 상태였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완전히 차단된 상황이었다.
작은 어선 하나를 탈취해 귀국길에 올랐다.
동해를 시작으로 한국의 남해를 지나 황해로 접어드는 항로였다. 목적지는 랴오닝성 후루다오항. 꼬박 사흘 걸리는 장거리 항해였다.
남해를 지날 무렵 선원들이 한국 해경에 구조 요청을 보내다가 걸렸다. 모조리 죽여버렸다. 항해까지 사마염이 도맡아야 했다. 익숙지 않았기에 여정이 하루 더 길어졌다.
그렇게 후루다오항에 도착한 뒤 향한 곳이 카라췬쭤이. 5년 전 주화입마의 폭발로 무림을 떠났을 때 눈을 뜬 장소였다.
카라췬쩌이와 네이멍구 자치구 접경의 외진 숲속.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깨어났었다. 정신없이 걸어 도착한 마을에서 광인 취급을 받고 공안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낯선 시간, 낯선 장소.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사마염은 무림의 거인이었다. 공안들을 모조리 때려죽이고 마을을 벗어났다.
어렵사리 시대에 적응한 뒤 지금에 이르렀다.
시간의 흐름에 고전했다. 빠른 노화는 그에게 형벌과도 같은 고통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겨냈다.
활강시의 공능을 얻은 지금의 그는 세월마저도 극복한 불로불사의 존재였다. 유지훈이라는 훼방꾼만 아니었으면, 21세기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었을 터였다.
“문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했었지.”
귀환에 관한 유지훈의 발언이 단서였다.
무림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온 귀환자. 심지어 한 번 더 다녀왔다고 했다. 무림의 절세 고수를 데리고 오기까지 했다.
사마염 역시 귀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무림으로.
“그래. 무림으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좋지. 아수라혈염기의 완성에 활강시의 공능까지 지녔으니 그 누가 나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모두를 발밑에 둘 수 있을 테지.”
심지어 21세기 문물의 지식까지 머릿속에 가득했다. 엄청난 효용을 발휘할 수 있는 지식들이었다.
비록 무림은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예전의 혈교 세력은 사라지고 없겠지만,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혈교 뿐만 아니라 무림 모든 세력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일단 문부터 찾아야지. 왔던 곳이 가는 곳일 게야.”
어디 가지 않는 문. 사마염에겐 낙원으로 향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무림의 지배자가 된 뒤 수하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와 21세기마저 지배할 대계까지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