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신의 무위는 화무결이 반수 정도 우위였다.
강(强)과 유(柔)를 넘나드는 장력이 사마염을 휘감고 몰아붙였다.
패(覇)와 강(强)으로 맞선 사마염의 마기는 화무결의 정순한 장세에 서서히 갇히는 양상이었다.
화무결의 무위는 무신(武神)이라는 별호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강과 유 사이에 예(銳)를 일으켜 파고들기까지 했다.
사마염이 공격을 허용하는 빈도가 늘어갔다. 몸 곳곳에 상처가 생겼다. 입가로 희미한 핏줄기가 번지기도 했다.
화무결이 우세를 점하는 형국이었지만, 유지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조금씩 어두워졌다.
‘아직 아수라혈염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절세의 마공을 꺼내 들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라면···.’
게다가 활강시의 공능을 보유한 사마염에게 상처는 의미 없었다. 빠르게 재생돼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내상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거기에 아수라혈염기가 더해진다면···.
“재주는 이쯤 봤으면 충분한 듯하군. 이제 내 차례일세.”
역시 사마염이 아수라혈염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전신에서 피어오르더니 이내 핏빛 기운으로 짙어져 사방으로 뻗어갔다.
혈마의 현신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거침없이 밀어붙이던 화무결이 처음으로 주춤했다.
“으윽!”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표정에도 당혹감이 번졌다. 예상하고 준비하긴 했지만, 아수라혈염기가 생각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지훈이! 이거 비무 아닐세!”
“안 그래도 대기하고 있었어!”
유지훈이 뛰어들 차례였다.
심검을 일으켰다. 손에서 묵빛 기운이 치솟았다. 3m 길이로 형성된 빛의 검이 아수라혈염기의 핏빛 공간을 가르고 들어갔다.
“정파 놈들이 졸렬하게 협공인가?”
“나 정파 아니야. 무림 공적이었어.”
심검은 모든 걸 가르는 공능을 지녔다.
아수라혈염기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의 혈염의 영역도 여지없이 갈라졌다.
시전자 혈마의 팔뚝까지 베고 지나갔다.
혈강시의 신체를 완전히 베진 못했다. 깊은 상처만 남겼다. 물론 의미는 없었다. 이내 재생될 테니.
다만 사마염의 심기는 흔들 수 있었다.
“뭐지? 그대에게선 내공이 느껴지지 않았거늘···.”
빛의 검, 심검.
무림인의 관점에서 볼 때 검강 정도로 여겨질 형태였다.
검도 없이 검강이 형성된 점도 놀라웠지만, 내공이 감지되지 않았기에 경악할 상황이었다.
검도, 내공도 없이 검강이라니···.
“그쪽이 무림을 떠나 이 동네로 온 것만 하겠어?”
유지훈이 피식 웃음과 함께 빛의 검을 휘몰아쳤다. 혈염의 공간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화무결의 웅혼한 장력이 위세를 더했다. 화염이 세차게 흔들렸다. 거센 바람에 소멸할 듯했다.
“이것들이 기어코 나를 괴물로 만들려 하느냐!”
사마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괴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핏빛 기운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갔다.
폭주였다. 시전자 혈마마저도 집어삼킨 아수라혈염기가 주위 공간을 혈염으로 가득 채웠다.
“으음···.”
혈기에 휩싸인 화무결이 침음을 흘렸다.
유지훈이 빛의 검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 심검은 요지부동이었다.
십 성을 넘어 십이 성에 다다른 아수라혈염기는 무시무시했다. 무림 천하제일인 화무결의 공력과 유지훈의 심검을 압도했다.
‘반사기가 통할까?’
유지훈이 고민에 빠져들었다.
결정적인 특성 반사기. 통하기만 한다면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 텐데. 확신은 없었다. 아니 회의적이었다.
반사기는 특성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이능이었다. 무림에선 내공을 실은 공격을 되돌릴 수 있었다.
활강시가 된 혈마의 아수라혈염기는 내공의 영역일까?
일단 아니라고 판단해둔 상황이었다. 반사기로 받아칠 수 없다는 전제하에 대적하고 있었다.
‘써볼까?’
밑져야 본전이면 써볼 텐데. 아니었다.
반사기를 발동하면 심검의 기세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통하지 않으면 가까스로 이뤄놓은 균형이 무너진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면 아수라혈염기를 고스란히 허용하게 되고, 중상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재생 능력으로 회복되긴 하겠지만, 무너진 균형 속에서 화무결 혼자 극성의 아수라혈염기를 상대하긴 무리였다. 자칫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릴 수 있었다.
‘도박이라도 해야 하나?’
반사기의 발동을 고민할 때 뜻밖의 지원군이 나타났다.
연구소에서 작업 동향을 지켜보던 감염자들이었다. 야마무라 레이코에게 몰려들었다.
“사령관님!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다니 누가?”
“작업에 들어갔던 자들이···. 머리가 터지고,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죽어간다는 말입니다!”
“뭐야! 왜!”
야마무라 레이코가 상황을 알린 감염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요! 왜 나한테···!”
감염자가 야마무라 레이코의 손을 뿌리쳤다.
야마무라 레이코가 힘없이 내던져졌다.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동그래진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어? 뭐지···?”
야마무라 레이코만 놀란 건 아니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뿌리친 감염자는 더 놀랐다.
최초 감염자인 야마무라 레이코의 신체 능력은 나머지 감염자들보다 우월했다. 뿌리친다고 뿌리쳐질 리 없었다.
지금은 무기력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연약한 여대생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양상이었다.
이들보다 더 놀란 자도 있었다.
“뭐라! 죽어간다고! 어째서···.”
사마염이었다.
감염자들에게 혈강시의 공능을 심어주는 작업. 실패해선 안 됐다. 아니 실패할 수 없었다.
무한 재생 능력에 초인급 신체 능력을 보유한 감염자들이 작업을 견디지 못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작업의 실패는 곧 거사의 붕괴를 의미했다.
심기가 극도로 흔들렸다. 견고하기만 했던 아수라혈염기의 영역에도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놓칠 유지훈이 아니었다.
균열의 틈을 파고들었다. 벽에 가로막혀 있던 심검이 다시금 예기를 뿜어내며 사마염의 육신을 엄습해갔다.
서걱!
빛의 검이 혈염의 공간을 갈랐고, 기세를 몰아 사마염의 팔목까지 베고 지나갔다.
“아악!”
사마염의 왼팔 팔꿈치 아래가 사라졌다.
비명이 터져 나온 동시에 실험체 여인이 몸을 날렸다.
“영감님!”
여태껏 사마염의 절대적인 우세를 한가롭게 지켜보던 실험체 여인이 전장에 뛰어들려는 찰나였다.
“그건 아니지. 아가씨 상대는 나야.”
시뻘건 괴인이 실험체 여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이자걸이었다. 어느새 3m 신장의 괴인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어마어마한 신체 능력의 실험체 여인을 장난감 다루듯 패대기쳤다.
실험체 여인이 다급한 몸부림으로 이자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눈빛에 공포가 깃든 표정이었다.
야마무라 레이코를 바라봤다. 도움을 청하는 시선으로.
“뭐해! 빨리 돕지 않고!”
야마무라 레이코의 눈빛에서 광기는 사라진 상태였다. 광기와 함께 괴기스러운 신체 능력 또한 소멸했다.
힘없이, 아니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자걸의 백신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야마무라 레이코에게도, 연구소 내부에 있던 감염자들에게도. 작업에 들어간 감염자들 역시···.
치유된 감염자들은 혈강시의 공능을 심어 넣는 급성 작업을 견딜 수 없었다. 신체가 찢어지고 머리가 터진 채 죽어가야 했다.
“으아악! 다 망쳤구나!”
사마염이 분노해 절규했지만, 당장의 수습도 만만치 않았다.
왼팔을 잃었다. 재생이야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한쪽 팔로 버텨야 했다. 아수라혈염기의 위력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실험체 여인의 도움도 바랄 수 없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시뻘건 괴인이 수제비 뜨듯 잡아 뜯고 있었다.
“영감님! 뭐해! 나 좀 도와줘!”
“너희 영감님, 제 앞 가리기도 쉽지 않다. 그냥 나랑 놀자.”
유지훈과 화무결의 협공이 몰아칠 태세였다.
한쪽 팔을 잃은 사마염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기세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사마염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전신을 감싸고 도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핏빛 기운이 거무죽죽해지더니 다시금 붉어졌다. 기존과 다른 양상이었다. 선홍색이었다.
“조심해야 하네! 선천진기를 끌어올리는 듯하네.”
화무결의 진중한 외침.
유지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선천진기라고? 그럼 내공의 영역이라는···.”
순간 유지훈이 멈칫했다.
본능에 의해 움직이다가 두뇌가 개입하는 상황이 됐다.
전략적인 공격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였다. 유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번민 끝에 해답을 찾은 미소였다.
다만 순간적인 공백은 피할 수 없었다.
극단적으로 짧은 공백이었지만, 사마염에겐 실낱같은 기회였다.
사마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절대자의 조건
“선천진기라고? 그럼 내공의 영역이라는···.”
중대한 의미가 찾아든 순간이었다.
내공의 영역에 존재하는 아수라혈염기. 유지훈의 특성으로 처리할 수 있는 범위 안이라는 뜻이었다.
소멸기로 사라지게 할 수도 있고, 반사기로 돌려줄 수도 있고. 무림의 관점에선 화공대법과 두전성이가 통하는 상대가 된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심검을 베어가던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반사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소멸기 발동까지 머릿속에 그렸다. 전략적인 사고로 격전을 매조지려 했다.
다만 본능과 전략적인 사고 사이 공백은 어쩔 수 없었다.
찰나의 공백이 사마염에겐 절대적인 기회로 주어졌다.
선천진기까지 끌어올린 아수라혈염기, 선홍색 기운이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한쪽 팔에서만 쏟아냈기에 크기는 작았지만, 예리했다.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의 혈염은 아니었다. 대신 뚫어버릴 듯했다.
쐐애액!
날카로운 혈염이 화무결의 장력이 쇄도하는 방향으로 향했다.
쩌어억!
충돌이 아니었다. 뚫고 들어갔다. 장세 속으로 파고들었다.
유지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뇌는 반사기의 발동 기회를 노리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본능은 달랐다. 심검을 내질러 화무결을 보호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니다. 소멸기인가?’
두뇌의 판단을 따를 때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본능이 가리킨 대로 움직여야 했다.
내지르는 사마염의 팔을 향해 심검을 내리쳤다.
파악!
서걱!
“크헉!”
“아악!”
둔탁한 타격음과 소름 끼치는 절단음 그리고 두 차례의 비명.
화무결이 피를 토했다. 예리한 아수라혈염기의 불꽃이 장심을 강타한 결과였다. 최대한의 공력으로 밀어냈지만, 적잖이 허용해야 했다.
장심을 통해 밀려든 아수라혈염기에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선혈을 토하기까지 했다.
“우욱!”
사마염은 오른 팔꿈치 아래가 사라졌다.
왼팔에 이어 오른팔도 잘렸다. 화무결을 향한 공격에 성공한 순간 유지훈의 심검이 팔을 베어버린 것이었다.
두 팔을 모두 잃은 상황. 재생되긴 하겠지만, 그때까진 아수라혈염기는 봉인되는 처지였다. 사마염의 선택은 도주였다.
계획했다는 듯 화무결의 장심을 때린 반탄력에 몸을 실어 멀찍이 날아갔다. 공력을 끌어올린 경신술로 바람같이 사라져갔다.
“하하하. 또 보자꾸나. 아니 앞으로 볼 일 없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