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랴오위안허가 헛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목적을 달성한 게 맞는지 모르겠군. 이놈이나, 저놈이나···.”
한편으로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나저나 인질은 잡아두라 했는데, 죽여버렸네. 유지훈 초인한테 한 소리 듣겠어. 그냥 튈까? 망명까지 한 마당에 그럴 수도 없고···.”
***
혈마 일당이 마침내 야마가토제약 건물 앞까지 진출했다.
철저한 통제 덕분에 별다른 사고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10시간 이상의 고된 행군이었지만, 이탈자도 없었다.
“여기가 맞긴 해? 엄청 근사할 것처럼 말하더니 너무 구리잖아.”
야마무라 레이코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건물을 바라봤다.
최첨단 연구가 이뤄진다길래 초현대식 인텔리전트 빌딩을 예상했는데, 너무 볼품없는 건물이었다.
“이런 데 영감님이 말한 연구소가 있긴 할까? 지하 벙커는커녕 지하 주차장도 없을 것 같은데?”
“틀림없이 있으니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거라. 그나저나 오사카에서는 아직 연락 없느냐?”
“없어. 연락도 안 돼. 무슨 일 생긴 거 아닐까? 가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가더라도 작업부터 마치고 가도록 하자. 여기까지 온 이상 작업이 최우선이다.”
야마무라 레이코의 우려를 대수롭지 않게 눌러 앉혔다.
혈마 사마염이 앞장서 건물로 들어섰다. 야마무라 레이코가 바로 뒤를 따랐고, 감염자 돌격대가 줄지어 따라 들어갔다.
후방 통제를 담당한 실험체 여인이 맨 뒤에서 경계하며 따랐다.
일당 90여 명이 로비에 집결했다.
실험체 여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사마염에게 다가갔다.
“이상하지 않아? 너무 조용해. 아무도 없는 것 같아.”
“그런 것 같구나. 미리 빼돌린 모양이야. 우리가 올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걸까?”
사마염도 눈살을 찌푸렸다.
연구소를 폐기하기라도 했으면 낭패였다. 먼 거리를 이동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어지게 되니.
“살펴보고 올 테니, 잠깐 여기 좀 지키고 있거라.”
기억을 더듬어 지하 연구소로 향했다.
비밀 통로를 지나 지하 벙커에 자리 잡은 연구소. 폐기됐거나 봉쇄됐으면 큰일이었다.
기억하기로 1m 이상 두께의 철문이었다. 잠기면 안에서 열어주지 않는 한 진입이 불가할 터. 관계자를 잡아 문을 열게 할 계획이었는데, 아무도 없으니 잠겨 있지 않기만을 바라야 했다.
쾅! 쾅! 쾅!
지하 벙커로 향하는 통로의 문은 모두 박살 냈다. 굳이 아수라혈염기가 아니고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구불구불 통로를 지나 당도한 지하 벙커 입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연구소 출입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닫혀있긴 했지만, 힘을 줘서 밀었더니 ‘구구궁’ 열렸다.
“으음···.”
연구소 내부 전경은 예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약품 저장소도 텅 빈 상태였다.
“급하게 치우고 도망친 모양이군. 아무렴 어떤가. 내게 필요한 건 연구소 자체인 것을···.”
필요한 약품은 중국에서 건너올 때 가지고 왔다. 장비만 온전하면 작업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기억보다 좁은 감이 있군. 한꺼번에 작업하긴 힘들겠어.”
대략 30명~40명 정도 작업 가능한 공간이었다.
두 번 또는 세 번에 나눠서 작업해야 했다.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의미였다.
“첫 번째 작업만 무사히 마치면 시간 따위 상관없지. 괴물 서른 마리가 철통같이 지킬 텐데···.”
로비로 돌아가 일행을 불러들였다.
하나둘 긴장한 표정으로 연구소에 들어섰다. 불로불사의 신체를 얻게 되는 상황에 적잖은 중압감을 느끼는 분위기였다.
“이곳이 너희들을 절대 강자로 만들어줄 장소다. 지금부터 바로 작업을 시작할까 한다.”
사마염이 작업의 서막을 알렸다.
연구 기기 작동을 위해 메인 스위치를 올렸다. 마치 준공식 테이프 커팅이라도 하듯 절도있는 동작이었다.
우우웅. 파팟!
전기가 들어오는 웅장한 진동음과 함께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에서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았다. 동시에 전기가 끊겼다.
“콜록콜록. 뭐야!”
“어떻게 연구소가 먼지 구덩이야!”
“켁켁. 먼지 때문에 전기가 나간 거야? 작작 좀 하지.”
기침 소리와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사마염이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스위치를 올렸다.
이번엔 끊기지 않고 전기가 들어왔다. 기기들도 이상 없었다. 전원 표시등에 불이 들어와 대기 상태를 알렸다.
뭔가 찝찝하긴 했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작업이 우선이었다.
“작업은 3개 조로 나눠서 진행한다. 레이코 양은 서둘러서 조를 편성하도록. 가급적 신체 능력이 뛰어난 사람 우선이다.”
“오케이.”
야마무라 레이코가 1조에 속할 대상자를 분류했다. 서른두 명을 지목해 사마염 앞에 세웠다. 일단 자신은 제외했다.
“레이코 양은?”
“나는 다른 애들 결과 보고 한다고 했잖아. 어떻게 될 줄 알고···.”
“그것도 나쁘지 않지. 경계 설 인원도 필요하니.”
작업이 시작됐다.
대상자들이 침상에 누웠고, 사마염이 일일이 돌아다니며 기기를 작동시켰다. 약물을 주입하고, 전류를 흐르게 하는 등의 작업이었다.
서른둘 모두에게 작업을 마친 뒤 나머지 인원을 모았다.
“이틀 정도 소요될 예정이다. 너희들은 두 조로 나뉘어 연구소 안팎을 경계하도록 한다.”
“이틀이나?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해?”
“각 조에서 두 명씩 먹을 걸 구해오는 담당자를 정하도록 해라.”
“인육은? 사람 잡아먹어도 돼?”
“불가! 두 번째 조까지 작업을 마치기 전엔 인육은 허용할 수 없다. 이후엔 원 없이 먹어도 상관하지 않겠다.”
“에이~.”
투정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진정성이 담겼다기보다 의례적으로 내뱉은 듯 보였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었지만, 사마염은 대수롭지 않게 흘렸다.
“그럼. 너희들끼리 연구소 안과 밖을 경계할 인원을 나누거라.”
야마무라 레이코의 주도 아래 조 편성이 진행됐다.
대부분 연구소 내부 경계를 원하는 양상이었다. 작업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실랑이가 빚어진 이후 야마무라 레이코가 정리했다. 여섯 시간씩 교대하는 방식으로.
“대신 연구소 밖을 담당한 조는 건물 벗어나서 바람도 쐴 수 있는 것으로 하겠다. 영감님. 그 정도는 괜찮지?”
“좋을 대로. 사람만 잡아먹지 말거라.”
조 편성이 마무리되고, 조별로 맡은 장소로 이동하려는 찰나.
사마염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다들 움직이지 말고 자리를 지키도록 해라.”
실험체 여인에게 손짓했다.
“손님이 온 것 같구나. 같이 가서 맞이하자.”
“심심했던 차에 잘됐네.”
연구소를 나가려던 사마염이 야마무라 레이코를 돌아봤다.
“레이코 양도 같이 가는 게 좋겠군.”
“나도? 나는 여기서 작업 지켜보고 싶은데.”
“손님이 셋이다. 우리도 셋이 나가야 하지 않겠나.”
문단속을 확실히 한 뒤 연구소를 나섰다.
지하 통로를 지나 로비에 도착하니 이들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다.
“딱 맞춰서 나왔네! 안 나오면 쳐들어가려던 참이었어.”
유지훈이 빙글빙글 웃으며 혈마 일행을 맞이했다.
화무결과 이자걸이 함께였다.
“흐음···. 재미있군.”
사마염이 눈매를 좁혔다가 묘한 미소를 그렸다. 시선은 유지훈을 거쳐 화무결에 머문 상태였다.
화무결의 표정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림 천하제일인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과거 천마와 마주했을 때나 드러냈을 법한 긴장감이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치솟았고, 상의가 펄럭였다. 안광은 불을 뿜는 듯했다.
“자네. 이곳 사람이 아닌 듯하군. 무림에서 왔는가?”
사마염의 시선이 화무결을 떠나 유지훈에게로 돌아왔다.
“한국에 귀환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대인 모양이군. 무림에서 귀환한 것이었나?”
사마염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진한 반가움과 깊은 관심이었다.
건곤일척
유지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내 미소로 바뀌었다.
“맞아. 무림에 다녀왔어. 그쪽이 여기 왔을 때, 나는 거기로 갔어.”
“5년 전···. 그대가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인가?”
사마염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21세기로 건너온 이후 고통의 세월이 새삼 상기된 듯했다.
유지훈은 무심한 미소로 반응했다.
“아니. 50년 전이야. 그리고 그쪽이 나를 거기로 보냈다고 해야겠지. 아수라혈염기의 저주라고 해야 할까? 혈마 양반.”
“하하하. 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군. 그래 50년, 여기와 거기 시간의 흐름은 열 배 정도 차이 나는 듯했어. 노화의 속도···. 그대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 모양이야.”
유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마염의 시선은 화무결을 향했다.
“자네 기운이 왠지 낯설지 않군. 제법 애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패선(覇仙)과는 어떤 관계인가?”
“스승님 되시오. 선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소. 제거하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셨소.”
도발이었다. 심기를 흔들려는.
하지만 사마염은 유쾌한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하하하. 맞아. 죽을 뻔했지. 내 인생 최악의 위기였어. 한동안 자네 사부 피해 다니느라 체면 많이 구겼네. 갚아줄 기회는 영영 없을 줄 알았는데, 자네가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군.”
“스승님께서 마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거요.”
“하하하.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나저나 자네는 여기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군. 패선의 제자면 칠순은 거뜬히 넘었을 텐데.”
“눈이 제법 정확하네.”
대답은 유지훈의 몫이었다.
“그쪽 처치하려고 내가 가서 데리고 왔거든.”
“데리고 왔다···. 그대가 원하면 드나들 수 있다는 의미인가?”
“나야 그렇지. 문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 그런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괴물한테도 해당할지는 모르겠네.”
“호오! 지금 내 상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사마염의 눈빛이 이채가 번졌다.
스스로에게 활강시의 공능을 입힌 사실이 드러난 점을 사뭇 놀랍게 여기는 눈치였다.
유지훈은 대답 대신 빙긋 웃을 뿐이었다.
사마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제 나는 시간마저도 초월한 존재가 됐거늘. 그래. 패선의 제자 실력이나 한번 볼까?”
“기다렸소.”
“사부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이길 바라지.”
사마염이 느긋한 동작으로 손을 털었다.
손에서 뿜어져 나가는 기운은 느긋하지 않았다. 묵직하고 강렬했다.
“듣던 대로 음험하시군.”
화무결이 여유로운 자세로 손을 뻗어 막아냈다.
웅혼한 장력이 패도적인 혈마의 기운을 어렵지 않게 밀어냈다.
“제법이군. 패선을 능가하겠어. 그럼 이것도 한번 받아보시게.”
이번엔 번갈아 양손을 내질렀다.
묵직한 기운이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화무결도 여유를 내려놓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공력을 끌어올렸다.
쾅! 쾅! 쾅!
굉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마염이 건물 밖의 몸을 날렸고, 화무결이 뒤쫓았다.
“도망갈 생각 따위 집어치우시오.”
“그럴 리가. 건물이 무너진 틈에 자네가 도망칠까 봐 장소를 옮기려는 것뿐일세.”
건물 밖에 전장이 형성됐다.
혈마와 무신, 무림의 두 절대자가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갔다.
기교 따윈 필요치 않았다.
무학의 본질, 순수한 강함 간의 격돌이었다.
마(魔)와 정(正)의 충돌. 확연히 다른 성질의 기세가 맞붙었지만, 순수한 강함의 공방은 잘 어울렸다.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유지훈은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균형은 이뤄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