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토제약은 또 어떻게 알고 가는 거야?”
“내가 중국에서 뭔가 도모할 때 야마가토제약과 제휴를 논의한 적이 있었다. 놈들도 비슷한 계략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런 이야기 못 들어봤는데? 실패했나? 아님 포기한 건가?”
“모르지. 한국에 일부 하청을 맡겼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사마염이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야마가토제약 연구소만 손에 넣으면 모든 게 순조로워진다. 너희는 불사불멸의 존재가 될 테고, 나는 세상을 얻게 되겠지.”
“다 좋은데. 차지하고 난 다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한꺼번에 없애겠다고 미사일이라도 때려 박으면···.”
“중요한 연구소를 허술하게 뒀겠느냐. 지하 벙커에 있다. 내부 자폭이 아니면 문제없지. 외부 폭격엔 끄떡없게 만들어졌으니.”
야마무라 레이코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마지막 남은 의문점만 해소하면 순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사카에 남은 애들은 어떡해? 걔들도 합류시켜야 하잖아?”
“삼천이나 되는 녀석들을 어떻게 달고 다니느냐. 일단 각자도생을 추구해야지. 우리가 일을 잘 마치면 살아남은 녀석들은 얼마든지 거둘 수 있다.”
야마무라 레이코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사마염은 빙긋 웃으며 어깨를 다독였다.
“생각해 보거라. 불사불멸의 초인이 백 명이 된다. 누가 우리 앞을 막을 수 있겠느냐. 네가 원하는 해방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다. 너희들은 우월한 존재로서 해방된 세상의 지배자가 될 테고.”
“좋아. 해방은 필수야.”
“물론이지.”
야마무라 레이코가 흡족한 표정으로 감염자들에게 향했다. 사마염의 지나친 통제로 인한 불만을 다독이고 단속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사마염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단순한 녀석···.”
오합지졸 형국이던 감염자 돌격대 무리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혈마 일당의 이동에도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
“이놈들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네.”
유지훈 일행은 CIA 정보망에 접속해 혈마 일당의 행적을 읽었다. 외진 도로와 산길 등을 따라 조용히 이동하는 양상이었다.
“이 먼 거리를 걸어서 온다는 거야? 100명이나 되는 놈들이 몰려다니면 눈에 띌 텐데.”
“오사카에서 멀어지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로가 막혀서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요. 적당히 섞여서 움직이면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자걸이 오면서 겪은 과정을 들어 짐작했다.
“저도 조금만 늦게 출발했으면, 도로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 할 뻔했습니다. 지금쯤이면 피난 행렬이 더 길어졌을 겁니다.”
“식인 괴질 감염자들이 먹잇감이 널렸는데 조용히 섞여 다니는 것도 신기하네요.”
“혈마 놈이 철저하게 통제한다는 의미겠지. 감염자들도 전략적으로 사고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화무결이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내 언짢은 기색이 돼 욕설을 내뱉었다.
“몹쓸 양놈들.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지켜보고만 있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할 후레자식들 같으니···.”
“어차피 핵 투하해서 싹 날려버릴 계획이라잖아. 불필요하게 자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심산이겠지. 그래도 우리한테 시간 벌어준 양놈들도 있잖아? 선한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포 호스멘을 일컫는 말이었다.
인질을 자청해준 덕분에 핵 투하까지 시간을 벌었다.
지금은 떨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들이 일본에 있는 동안엔 미국도 핵 투하를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전략 자산을 넷이나 핵폭발에 휩싸이게 할 순 없을 테니.
“혈마 놈이 느긋하게 움직이는 덕분에 이쪽에서도 제법 시간을 벌었고. 잘 준비해서 맞이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있을 거야.”
“준비라···.”
이자걸이 뭔가 생각하더니 물었다.
“놈들이 이동하는 곳으로 백신을 투하할까요? 분량은 충분합니다. 드론도 넉넉하게 준비돼 있고요. 서너 번은 가능할 겁니다.”
“글쎄요. 그것보다는 야마가토제약에서 살포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혈마 놈이 작업에 들어갈 무렵에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놈에게 연구소를 내주면···.”
이자걸은 야마가토제약의 연구소를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변종 몬스터 연구를 위탁받아 진행했던 때였다.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지하 벙커 연구소. 일단 들어가면 제 발로 나올 때까지 끌어낼 방법이 없었다.
핵미사일을 쏟아부어도 안전하도록 설계된 곳이었다. 내부에서 자폭 외엔 없앨 수 없었다.
혈마가 차지하면, 뜻을 이룰 때까지 손을 쓸 수 없다는 의미였다.
“차라리 감염자들에게 백신을 투하하고, 연구소를 폭파시켜서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뒤 처치하는 방법이 최선 아닐까요?”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최선은 아니에요.”
유지훈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가 혈마 놈이 감염자들이 치유된 걸 알면 자취를 감출 거예요. 작정하고 숨어서 다른 계략을 꾸미면 추적이 쉽지 않을 테고요. 만일 한국으로 건너오기라도 하면···.”
“아···.”
“혈마 놈을 끌어들여서 연구소에 가둬놓고 처치하는 게 최선이에요. 연구소에 백신을 살포할 수 있으면 놈의 계획 또한 물거품이 될 테고, 제압 또한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연구소에 혈마 일당을 몰아넣은 상황에서 백신을 쏟아부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최선이었다.
혈마가 감염자를 재료 삼아 활강시 작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할 테니.
사실상 혈마와 실험체 여인 둘만 고립시켜 놓고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여차하면 연구소 내부에 폭탄을 설치해 날려버리는 방법도 있을 테고. 혈마와 실험체 여인의 재생 능력은 다음 문제가 되겠지만.
“사전에 우리가 연구소를 차지하는 게 관건이겠군요.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그렇고, 유지훈 씨도 그렇고, 야마가토에서 기피 대상 1호로 정해놓은 인물일 테니까요.”
야마가토산업을 지탱하는 양대 가문 중 하나인 야마구치 가문이 유지훈에 의해 몰락했다.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 이자걸이었다.
합작으로 진행했던 변종 몬스터 프로젝트를 이자걸이 가로채면서 야마구치 가문의 몰락이 시작됐다.
응징하겠다고 계략을 꾸몄다가 역관광을 당했다.
회장이 본사 건물의 붕괴와 함께 목숨을 잃었고, 이사진 중 둘이 한국에서 행방불명 처리됐다. 서류상 행방불명이지 죽었다. 하나는 유지훈한테 맞아 죽었고, 하나는 자폭했다.
야마구치 가문의 몰락 이후 야마가토산업은 위상이 급전직하했다.
정재계는 물론이고, 일본 사회 전반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에서 이제는 숨만 겨우 쉬는 지경이었다.
야마가토산업에게 유지훈과 이자걸은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특히 야마가토제약에겐 더더욱.
연구소 진입을 허용할 리 없었다. 꽁꽁 걸어 잠그고 결사 항전 태세에 들어가면 갔지.
최악의 경우 혈마의 편을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긴 해요. 지금쯤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유지훈의 표정이 오묘했다.
여유와 조급함, 짜증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직접 가봐야 하나.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
[유지훈 초인이 일본에 있습니까?]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도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총리를 비롯한 구성원 전체가 머리를 쥐어짰지만 소용없었다. 내각 각료 전원이 불려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목적은 총리의 중대결심을 실현에 옮길지 여부 결정이었다. 오사카부에 핵미사일 투하. 그동안 감춰왔던 핵 개발이 알려지는 위험천만한 결정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과 제재도 엄중할 테지만, 일단 일본이 살고 봐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감염자들이 통제선을 돌파했다는 소식에 핵미사일 투하 작전은 꺼내보지도 못한 채 접어야 했다.
심지어 미국이 일본에 핵미사일을 쏟아부을 거라는 첩보도 입수됐다. 일부 지역이 아니라 전역을 대상으로.
다급하게 미국 대통령과 핫라인으로 통화하려 했지만, 불통이었다. 외교 라인을 총가동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미국의 핵 투하 계획이 현실이라 받아들여야 했다. 그 전에 식인 괴질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은 사실상 멸망이었다.
그나마 다행은 미국의 초인 집단 포 호스멘이 유지훈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는 소식. 포 호스멘이 일본을 벗어나기 전까지 핵 투하 계획이 보류됐다는 정보였다.
“그 인간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도움도 받는군요.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길래···.”
“유지훈 초인을 탓할 사안이 아니지 않소. 이게 다 외무대신 그 멍청한 작자의 경거망동 때문이오. 내각정보조사실에서 극진히 모시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사실 해결책은 일찌감치 나와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해결책 따위 필요 없을 수도 있었다.
유지훈이 몸소 찾아와서 해결해주고 있는 셈이었으니. 외무대신의 병신 짓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정리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유지훈에게 읍소해야 했다.
다만 면전에서 모욕당한 당사자가 받아들일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숨만 지어야 했다.
고민 끝에 택한 방법은 우회 읍소. 한국 대통령에게 간청해 유지훈을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대통령님. 부탁드립니다! 일본이 풍전등화입니다!”
총리가 전화해 무릎 꿇다시피 했지만, 반응은 뜨악했다.
이광진 대통령은 유지훈이 일본에 있는 것도 몰랐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저도 유지훈 초인 소식 못 들은 지 몇 달 됐습니다. 연변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일본에 있었군요. 무심한 양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요구 사항은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인사라는 거 총리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러지 마시고 직접 말씀해보십시오.]
“저희가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라서요···.”
총리가 사정을 설명했다.
외무대신의 어처구니없는 헛발질.
[거참 난감하게 됐습니다. 알고 보면 상당히 옹졸한 양반인데···.]
“방법이 없겠습니까. 대통령님.”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유지훈 초인이 물욕이 상당하다는 정도입니다. 저도 그 점을 공략해서 유지훈 초인을 움직이곤 했거든요.]
“물욕···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팔다리라도 떼줄 생각으로 간청하시면···. 유지훈 초인이 온천을 좋아한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통화가 끝났다.
총리가 다시금 회의를 소집했다.
“안건은 유지훈 초인에게 내줄 만한 게 뭐 있는 지입니다. 곳간을 탈탈 털겠다는 각오로 머리들 맞대 봅시다. 참고로 유지훈 초인은 온천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
망령 분쇄 작전 (4)
야마무라 레이코의 부관 오노 마사히로는 언제부터인지 묘한 나른함에 휩싸여 있었다.
감염자들 통제에 수면이 부족한가 싶어 낮잠까지 잤지만, 깨어난 뒤에도 나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기력으로 번져갔다.
“왜 이러지. 좀 있다가 사람들 오면 출발해야 하는데.”
3000명에 달하는 감염자들을 통솔해 이동해야 하는 일이었다. 초기 감염자들의 식인 욕구를 통제할 생각을 하니 진작부터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될 텐데···.
“이러다가 잡아먹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통제 요원들을 불러 모았다.
해방군 돌격대로 분류됐던 인원들이었다. 200명은 야마무라 레이코와 동행했고, 100명 남짓이 초기 감염자 통제를 위해 남았다.
다들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왠지 맥이 풀린 모습들이었다.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축 처져서 몸놀림도 전에 없이 무거워 보였다.
“다들 왜 그래? 단체로 뭐 잘 못 먹기라도 했어?”
“모르겠습니다. 저기 식당을 싹 털어먹긴 했는데···.”
“음식은 멀쩡했습니다. 요즘 그걸 못 먹어서 아닐까요?”
그거. 인육. 못 먹은 지 며칠 됐다.
그래서인가? 하긴 그거 먹기 시작한 뒤부터 괴력이 생겼으니···.
그런데 이상했다. 인육을 탐하는 욕구가 느껴지지 않았다. 인육을 먹는다는 생각을 하니 구역질이 나기까지 했다.
‘뭐지? 이 느낌은···. 뭔가 잘못됐다. 아니 잘 된 건가?’
느낌이 어떻든지 준비는 해야 했다.
지원 인력이 도착할 때가 됐으니 서둘러야 하는 시점이었다.
“시간 됐다. 빠짐없이 광장에 집결하도록 해라. 남아있으면 안 된다고 확실히 안내하고.”
“뭔가 이상합니다. 부관님.”
통제 인력 중 하나가 미간을 좁히며 다가왔다.
“뭐가?”
“여기 인원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어디 간 거야! 당장 찾아와!”
통제 인력 또 하나가 허겁지겁 달렸다.
“이탈하고 있습니다!”
“뭐!”
“계속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게···. 통제선 방향입니다. 아무래도 오사카부를 빠져나가려는 것 같습니다.”
***
오사카부 외곽 통제선.
자위대 병력 2개 중대가 박살 난 이후 통제는 사실상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감염자들의 돌파도 이뤄졌기에 통제선 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견해가 팽배해 있었다.
그래도 자위대 병력은 통제선 곳곳에 주둔해 있었다.
미국의 지원 인력이 철수한 상황에서 큰 의미 없는 주둔이었다. 감염자들이 몰려나오면 헛된 희생만 초래할 테니.
“중대장님. 안에 있는 놈들은 왜 안 나오는 겁니까? 빨리 나가야 우리도 철수하든지 할 텐데요.”
“이쪽으로 나오면 우리 다 죽는 거야. 안에 얌전히 몰려있는 걸 고맙게 생각해.”
“가슴 졸이면서 대기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검문소는 왜 유지하는지. 빠져나갈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는데···.”
감염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검문소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한때 2~3km나 되는 행렬을 이뤘지만, 이제는 아주 가끔 한두 사람 정도 다녀갈 뿐이었다. 뒤늦게나마 가까스로 감염 지역을 빠져나온 행운아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검문소는 유지됐지만, 형식에 불과했다.
“검문소 근무만 없어도 마음 좀 덜 졸일 것 같은데요···.”
자위대 병사들에게 가장 큰 불만 요소였다.
감염자들이 몰려나올 때 최전방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탓이었다. 사실상 총알받이나 마찬가지 근무였다.
중대장은 솔선수범하는 차원에서 하루 한 번 여섯 시간씩 검문소에 나왔다. 그나마 불만을 잦아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