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훈을 기함하게 했다.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로버트 미첨은 진지했다.
“우리가 인질이 되면, 미국도 한동안은 핵을 투하할 수 없을 거요. 유지훈 씨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소.”
포 호스멘의 나머지 셋 역시 진지했다. 한편으로 진솔했다.
“원래 로버트 혼자만 남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둘 수 없었네. 우린 넷이 함께할 때 포 호스멘이거든.”
“미국은 좁은 세상이었어요. 우리보다 강한 자를 만날 수 없었죠. 이번 기회에 강자들이 수두룩한 세상을 경험하고 가려고요.”
“우리 백기사를 저 지경으로 만든 자를 제거했다면서요. 인질이 된 김에 보면서 배우고 싶네요.”
적기사 마커스 수아레스에 이어 흑기사 엘레니스 잭슨, 청기사 데이비드 포스터도 로버트 미첨과 함께할 뜻을 밝혔다.
유지훈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양반들이네.”
포 호스멘을 죽 둘러보고는 다시금 웃었다.
“하하하. 나쁘진 않네. 잣 같은 양놈들만 보다가 이런 양반들 보는 것도. 괜히 기사라 불리는 게 아닌 모양이야.”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소. 그나마 내가 놈들한테 상극이라 할 수 있었는데···.”
로버트 미첨이 부목을 댄 팔을 들어 보였다.
특성 헬파이어를 발동하기 마땅치 않은 상황을 알리는 동작이었다.
“그래도 저분을 보니 옆에 있는 것만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오.”
로버트 미첨이 랴오위안허를 가리켰다.
곤륜의 사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긴 하지만, 타인의 특성을 습득해 쓰는 재주가 있소. 로버트 미첨 초인의 특성도 부족하게나마 재현할 수 있을 거요.”
“그것도 괜찮네.”
유지훈이 랴오위안허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영감이 우리랑만 다니면 그다지 쓸모가 없거든. 그쪽 넷이 같이 다녀주면 효용이 확 올라가겠네.”
“철인 3종 경기 선수라고 했소.”
“그래. 잘 달리긴 하더라.”
화무결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 기세가 예사롭지 않군. 지금껏 만나본 자들 중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야.”
“영감님은 지금 미국에서 가장 강한 네 사람을 인질로 잡고 계신 거예요. 미국에 전해지면 절망할 소식이라고요.”
엘라니스 잭슨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고, 화무결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화답했다.
“처자는 아름답기까지 하군. 영광일세.”
“시답잖은 수작 관두고, 이야기나 마저 들어보자.”
유지훈이 화무결에게 핀잔을 준 뒤 로버트 미첨에게 말을 청했다.
“아는 거 있으면 말해봐요. 아는 만큼 잘 싸울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댁들도 빨리 풀려나서 집으로 갈 수 있을 테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시오. 아는 대로 답해 드리겠소.”
“일단 감염자 규모는 어떻게 돼요? 감염자들 수준은 어떻고요?”
“랭글리에서 일본 정부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3000명 안팎이라고 하오. 감염의 정도에 따라 수준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후미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퇴근길에 폭도들의 습격을 당해 집단 폭행을 당한 사건이었다. 적잖은 경호 인력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경찰 병력이 투입돼 폭도를 제압했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병원에 실려 간 외무대신은 2시간여 만에 숨을 거뒀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왜 폭도들이 외무대신을···?”
총리 와타나베 츠요시의 침통한 질문에 도쿄도 경시총감이 대답했다.
“외무대신께서 미국 각성자들의 철수를 조장하는 경거망동을 하셨다고 폭도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외무대신이 미국 각성자들을 철수하게 했다고요?”
금시초문이었다.
외무대신으로부터 미국이 작전을 취소했다는 보고는 받았다. 미국의 초인이 감염자들을 처치하다가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석연치 않긴 했지만, 외교력을 총동원해 미국을 설득하는 중이었다. 사건이 나던 때도 총리는 주일 미 대사를 만나 간청하고 있었다.
“경거망동이라니···?”
“미국의 초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유지훈 초인이 나타나서 구해준 모양입니다. 외무대신께서 그걸 모르고 유지훈 초인을 질책해서···.”
외무대신이 유지훈을 쫓아 보낸 탓에 미국의 초인이 분개해 작전 취소를 선언했다는 설명이었다.
외교 책임자가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국가와 합동 작전을 할 수 없다는 게 미국 초인의 입장이었다고 했다.
“또 유지훈 초인인가···?”
와타나베 츠요시가 탄식했다.
한편으로 외무대신의 경거망동에 관한 사실관계부터 확인했다.
외무대신의 수행원들을 불러 조사했다. 처음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더니, 조사의 강도를 높이자 털어놓았다.
폭도들의 주장이 사실이었다. 외무대신이 보고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누락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유지훈 초인은 내각정보조사실에서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오사카부로 못 가게 막았다고 들었는데?”
알아보니 요원들이 놓쳤다고 했다.
보고를 씹은 것이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외무대신의 경거망동이 폭도들에게 전해진 부분도 석연치 않았다.
분명 수행원들은 확실히 입단속이 됐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려진 것일까? 총리도 모르는 사실을 어찌 폭도들이 먼저···?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현장의 미국 관계자들이 흘린 것이었다.
정부 모르게 폭도들에게만 알린 것으로 보아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잘 통제됐던 식인 역병에 관한 소식도 국민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또한 미국의 소행이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뭔가 꿍꿍이가 있음이 분명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미국 대사관과 주일 미군의 동향을 파악해보시오.”
내각정보조사실에 지시했고, 답변이 돌아왔다.
비밀리에 일본 내 미국 거주민들에게 출국 지시가 내려졌다는 소식이었다. 주일 미군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미국 놈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오사카부가 감염자들에 의해 돌파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상황이었다. 통제 지역을 넓히긴 했지만, 뚫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와타나베 츠요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중대 결심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꿈에서라도 떠올리기 싫었던 위험천만한 결심이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해야겠습니다. 내각부 대신 전원 참석하도록 하세요.”
***
CIA의 정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혈마과 실험체 여인 그리고 감염자들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포착해냈다. 심지어 다크 디멘션의 마지막 남은 수장 저스틴 로저스가 합류한 사실까지 파악했다.
“저스틴 로저스는 만만치 않은 능력자요. 솔직히 일대일로는 나도 한 수 접어줘야 한다고 보고 있소.”
“다크 디멘션이 세계 제일의 빌런 조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저스틴 로저스 덕분이네. 나머지 세 수장이 힘을 합쳐도 그 자식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했으니 말일세.”
로버트 미첨과 마커스 수아레스는 저스틴 로저스의 상대 진영 합류를 극도로 경계했다.
당장은 스물 남짓의 수하들과 합류지만, 장차 다크 디멘션 전체가 노인 및 감염자 무리와 연합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흑룡회도 가세한다는 첩보도 들려왔다. 수뇌부 몰살로 와해 지경이긴 했지만, 여전히 엄청난 규모의 저변을 자랑하는 흑룡회였다.
이들의 연합이 완성되면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빌런 조직의 탄생이었다.
“CIA 놈들 온 동네 쏘다니면서 헛짓만 하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정보력은 무시할 수 없네요. 이렇게 좌표까지 딱딱 찍어줄 정도라니···.”
유지훈은 거대 빌런 연합체 결성에 관해선 그다지 관심 없는 눈치였다. CIA의 정보력에 연신 감탄했다.
CIA는 노인과 실험체의 동태, 감염자들의 분포 등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해 정보망에 올리고 있었다. 혈마의 진짜 정체를 제외한 모든 정보가 사실에 근접하게 파악됐다.
형식적이나마 인질이 된 포 호스멘은 CIA 정보망에 접속해 인지한 상황을 유지훈에게 전달했다.
“탐지 계열 각성자들을 일찌감치 선발해 훈련한 결과요. 위성까지 활용하니 신속성이나 정확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거요.”
CIA의 분석에 따르면 혈마 일당은 둘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었다.
혈마와 실험체 여인, 감염자들 대다수가 무리를 이뤘고, 저스틴 로저스와 수하들 그리고 나머지 감염자들이 또 한 무리를 형성했다.
저스틴 로저스와 나머지 감염자들은 다시 오사카부로 진입을 꾀하는 상황이었다.
“얘들이 오사카부에 격리된 감염자들을 구해오려는 모양이네요.”
“다른 한 무리는 뭘 하려는 것 같소? 치바현 방향으로 이동 중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긴 한데···.”
“치바현이요? 치바현에 뭐가 있길래···.”
그때 화무결이 뭔가 생각난 듯 끼어들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야마가토 어쩌고 하는 놈들 회사 중 하나가 치바현에 있는 걸 본 것 같네. 그때 무너뜨려 버리려다가 자네가 귀국을 서둘러야 한다고 해서···.”
“맞다! 야마가토 뭔가가 있었다. 뭐였더라···.”
대답은 엘라니스 잭슨에게서 나왔다.
“야마가토제약이에요. 유전자 연구에 관해선 세계 제일의 기업이죠. 각성 전에 방문한 적 있어서 잘 알아요. 제 전공이었거든요.”
“야마가토제약! 이런! 놈들이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는 모양이네.”
“무슨 일을···?”
“감염자들에게 슈퍼 솔져 프로젝트를 적용하려는 겁니다.”
“아···.”
“그 노인네가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창시자나 마찬가지니, 야마가토제약의 기술력을 강탈하면 바로 작업 가능할 거예요.”
유지훈이 혈마의 계획을 읽었다.
혈교의 활강시 제조에 현대 의학을 더한 중국의 슈퍼 솔져 프로젝트. 식인 괴질 감염자들은 최고의 재료였고, 야마가토제약의 기술력은 날개를 달아줄 터였다.
“우리도 나눠서 움직여야겠습니다. 네 분께선 오사카부로 가서 감염자 구출을 저지해주세요.”
“가능할지 모르겠소. 내 상태가 이래서···.”
로버트 미첨이 부목을 팔에 댄 양팔을 들어 보였다.
특성을 발동하기 힘든 형편을 알리는 모습이었다. 로버트 미첨은 포 호스멘 전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능력자였다. 나머지 셋으로 저스틴 로저스와 감염자들을 대적하긴 무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지훈이 빙긋 웃었다.
계획이 다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저 영감이랑 같이 가요. 어느 정도 공백은 메울 거예요.”
랴오위안허를 가리켰다.
습득기를 보유한 초인. 로버트 미첨과 함께 있으면 헬파이어를 습득해 발동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숙련도나 강도는 로버트 미첨에 못 미칠 테지만, 나머지 셋의 특성 또한 습득해 발동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미력하나마 함께하겠소. 특성의 활용법을 일러주시면, 아쉬운 대로 로버트 미첨 초인의 빈자리는 채울 수 있을 거요.”
일단 한 부분은 해결됐다.
혈마 일당의 야마가토제약 강탈은 유지훈과 화무결이 맡아야 했다.
“두 분만으로 위험하지 않겠소? 아무래도 놈들의 주력은 그쪽인 것 같은데 말이오.”
“오사카부 쪽이 더 중요해요. 재료가 될 놈이 수천이나 되는데, 확실히 박멸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유지훈과 화무결은 포 호스멘과 헤어졌다.
치바현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화무결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우리 둘로 되겠는가? 지난번에도 남의 특성 빌려 쓸 줄 아는 녀석 아니었으면 낭패를 볼 뻔하지 않았는가.”
“응. 괜찮아. 도와줄 인간이 합류할 거야.”
“도와줄 인사가 합류한다고? 누가?”
“응. 있어. 무시무시한 작자.”
화무결은 도무지 짐작이 안 되는 듯 눈알을 굴렸다. 반면 유지훈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최 누가 온다는 건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은근슬쩍 운전석에 올라타 운전대를 잡은 화무결이었다.
“뭐야? 네가 운전하려고? 안돼!”
“이미 늦었네. 재주 있으면 끌어내 보게.”
“제길. 가기도 전에 객사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
망령 분쇄 작전 (2)
공항을 빠져나온 사내가 여권을 들여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Jang, Sam Tae]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장삼태가 뭐야. 이것들이 풀어줬더니 사장을 데리고 노네. 돌아가면 교육부터 거하게 시키든지 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오! 이자걸 대표. 도착했어요?]
“방금 공항 나왔습니다.”
[어디로 왔어요? 이자걸 대표도 아오모리 공항이에요?]
“오사카로 가야 한다면서요? 아오모리에 내려서 어느 세월에 오사카까지 갑니까? 센트레아 공항입니다.”
[센트레아 공항이면···?]
“나고야요. 오사카까지 1시간이면 갑니다.”
[오! 재주 좋네요. 역시 천재 소시오패스답습니다.]
“위조 여권 들고 온 거랑 천재 소시오패스랑 무슨 상관입니까? 졸지에 장삼태가 됐습니다.”
[하하하. 이름 좋네요. 장삼태 씨. 일단 치바현으로 오세요.]
“치바현이요? 오사카가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