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미첨이 불편한 팔을 들어 말을 저지했다.
혀를 끌끌 차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콧방귀로 쓰리 콤보를 마무리하고는 이노우에 후미오를 지나쳐갔다.
지휘부의 마지막 남은 한 사람 국토안보부 책임자에게 향했다.
“포 호스멘은 이번 작전에서 빠지는 것으로 하겠소.”
“네? 포 호스멘이 빠지면 이번 작전 자체가···.”
“굴러들어온 복도 차버리는 머저리들이랑 작전은 무슨 작전···. 홈랜드도 털고 가는 게 좋을 거요.”
“미국의 안보가 걸린 작전입니다. 재고해주심이···.”
국토안보부 책임자가 간절하게 부탁했지만, 로버트 미첨은 완강했다.
“못 들었소? 저놈 같은 놈이 더 있다고 하지 않소. 제대로 된 정보도 없는 작전은 폐기하는 게 정상 아니오?”
“초인님···.”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포 호스멘은 작전에서 빠져야겠소.”
확실하게 못을 박고 로버트 미첨이 현장을 벗어났다.
국토안보부 책임자가 한숨을 내쉬고는 이노우에 후미오에게 향했다.
“미안하지만, 이번 작전은 여기서 중단해야 할 것 같소.”
“국장님···.”
“포 호스멘이 있어서 가능한 작전이었는데, 로버트 미첨 초인님께서 빠진다고 하시니 별수 있겠소.”
“어떤 연유에서 그러시는지···?”
“사정은 외무대신께서 직접 파악하시는 게 좋겠소. 철수를 지휘하려면 바쁠 것 같소. 지휘부에 살아남은 이가 나 하나라···.”
국토안보부 책임자가 서둘러 움직였다.
현장의 미군 병력에 지시를 내리고, 여기저기 전화도 돌렸다.
“대체 왜···?”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국토안보부 책임자를 바라보던 이노우에 후미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
“뭐? 양키들이 이동하고 있다고?”
해방군 사령관이라 불리는 여인, 야마무라 레이코가 전화를 받고는 화색을 띠었다.
고레벨 각성자들을 앞세운 미국 놈들이 감염자 격리 작전을 진행하면서, 해방군의 입지가 좁아지는 국면이었다.
검문소에 초기 단계 감염자들을 보내 균열을 조장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 형편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들여온 진단 키트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감염을 판독해내는 탓이었다. 감염자뿐만 아니라 잠재적 보균자까지 걸러지는 통에 철저한 고립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만일 감염자만 모아놓고 핵폭탄이라도 때려 박으면 문제였다. 재생 능력의 범위 밖일 가능성이 클 테니.
그런 상황에서 미국 놈들의 이동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자세히 말해 봐. 임무 교대야? 빠져나가는 거야?”
[양놈들 간에 교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자위대 놈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자위대 놈들···. 아까 불장난 세게 했다는 놈은? 그 새끼도 갔어?”
[안 보입니다. 다른 검문소로 간다는 것 같았는데···. 아무튼 여기 양놈들은 싹 사라졌습니다. 자위대만 드글드글 합니다.]
“오호···.”
슬슬 움직여도 될 시점이었다.
안 그래도 뚫고 나가려고 준비했었다. 동향 파악을 위해 보냈던 감염자가 미국 초인의 특성에 소멸한 뒤 잠시 물러선 상황이었다.
화염으로 소멸시키는 특성을 보유한 각성자가 신경 쓰였다. 몇 명이나 될지, 화염의 강도는 어느 수준인지.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방법도 고려했다.
자칫 앞선에서 희생자가 많아지면, 뒤쪽이 오합지졸이 될 우려 때문에 미뤄두기로 했다.
상황을 파악한 뒤 치밀하게 전략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기회였다. 미국 각성자 놈들이 모두 철수한 상황. 자위대 병력은 대수로울 게 없었다.
“슬슬 출동하자.”
해방군 돌격대를 소집했다.
감염 이후 보름 이상 경과된 자들이었다. 신체 능력과 재생 능력 모두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몇 명이나 되지?”
“300명 조금 넘습니다.”
“그럼 일단 200명으로 하자. 나머지는 네가 데리고 있어. 여기서도 필요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소집된 돌격대 중 100여 명은 부관과 함께 남겨두기로 했다.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은 2000여 감염자들을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돌격대가 돌파에 성공한 뒤 불러내는 방법도 있으니.
“다들 자위대 나부랭이라고 방심하는 일 없도록 해. 머리에 총 맞아서 대가리 터지면 재생이고 뭐고 없으니까.”
준비를 마친 돌격대 전사들에게 주의 사항도 전달했다.
거대한 함성과 함께 출격이 시작됐다.
***
“병신 새끼가 왜 안 오지?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찾으러 가봐야 하지 않겠어?”
거침없는 육두문자 속에도 근심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노인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에도 조급함이 여실했다.
“그러게. 간단히 치고 빠지라고 일렀거늘, 녀석이 욕심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가자. 여기 있어봤자 재미도 없잖아.”
실험체 여인이 검문소 쪽으로 가리키며 입술을 씰룩였다.
“그럴듯해 보이는 양놈들은 다 가고, 병신들만 모여들고 있어. 눈길 갈 만한 놈도 하나 없고.”
노인, 혈마 사마염은 말없이 허공만 응시했다. 자위대 병력이 몰려드는 검문소 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안 갈 거야? 그럼 영감님은 여기 있어. 나라도 갔다 올게.”
여인이 움직이려 하자, 노인이 불러 세웠다.
“잠시 있어 보거라. 재미있는 일이 생기려 하고 있으니.”
“재미있는 일이 대체 뭔데! 아까부터···.”
투덜거리던 여인이 돌연 눈을 부릅떴다.
노인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상치 않은 기세가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뭐지···?”
심상치 않은 기세가 실체를 드러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돌진해왔다.
“감염자들이다!”
자위대 병력이 동요했다.
갑작스럽게 미국의 각성자 지원군이 떠난 혼돈 상황이었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 투입된 자위대 병력이 아직 자리 잡기 전이었다.
감염자들이 빈틈을 파고드는 국면이었다.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감염자들의 공세가 시작됐다.
방식은 단순했다. 달려들어 잡아채고, 후려 패고, 물어뜯고···.
우악스럽고 무식한 공격이었지만,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자위대 인원이 시신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먹지 마! 먹더라도 다 죽인 다음 먹어!”
몇몇 감염자가 물어뜯다 못해 먹어치우려 들었지만, 어디선가 들려온 지시에 식사는 잠시 미뤄뒀다. 다시금 격살에 뛰어들었다.
“사격 개시!”
“머리를 쏴! 머리 아니면 소용없어!”
“자동소총이랑 박격포도 준비해!”
자위대도 대열을 갖추고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기세가 꺾인 상황, 감염자들의 거친 돌격을 막아내기에 일반 병사들은 연약하기만 했다.
가끔 총격에 대가리가 터져서 나뒹구는 감염자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그보다 수십 배 많은 병사의 시신이 산처럼 쌓여갔다.
“쟤네들이야? 부하 삼겠다는 애들이?”
실험체 여인의 눈빛에 흥미가 깃들었다.
청년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둔 인상이었다.
“어떠냐? 괜찮을 것 같으냐?”
“좀 무식해 보이긴 하는데, 적당히 가르치면 써먹을 만은 하겠네.”
노인과 여인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전황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자위대 병력이 무너지고 있었다. 총구가 불을 뿜고, 중화기도 쏘아댔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대로면 전멸이야! 지원병은 안 오는 거야!”
“오고 있답니다! 5분이면 도착한다고 합니다!”
“조금만 버텨! 우리 편 저쪽 편, 가릴 거 없어. 닥치는 대로 갈겨!”
지휘관의 필사적인 지시에도 탈주병들이 생겨났다.
사망 병사에 이탈 병사까지, 검문소를 지키는 자위대 병력이 급속도로 줄어갔다.
반면 감염자의 피해는 손으로 꼽을 수준에 불과했다.
“슬슬 우리도 움직일 때가 된 것 같구나.”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여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뭘 움직여? 싹 다 죽일 때까지 구경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해서 부하로 만들 수 있겠느냐. 주인이 될 만한 실력을 보여줘야지. 너도 준비하거라.”
노인이 양손을 휘둘러 크게 원을 그렸다.
몸 주위로 열기가 일렁였다. 눈이 타오를 듯 붉어지더니, 전신이 시뻘건 기운에 휩싸였다. 아수라혈염기를 일으킨 순간이었다.
“가거라!”
거대한 핏빛 기운이 뿜어져 나갔다.
핏빛 불덩이의 형체가 감염자, 자위대 병력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다.
점차 규모를 키우던 불덩이가 급기야 폭발했다. 안에 갇힌 모든 생명체를 갈가리 찢어발긴 아비규환의 광경이었다.
“뭐야? 부하 삼는다더니 없애버리면 어떡해?”
“다짜고짜 따르라고 하면, 누가 따르겠느냐. 적당히 겁을 줘야지. 너도 그러고 있지 말고 좀 가서 놀아라.”
“미친 영감탱이 같으니. 에라 모르겠다.”
실험체 여인도 몸을 날렸다.
감염자에게 달려들었다. 머리를 가격했다. 가격당한 머리는 이내 재가 돼 사라졌다.
노인의 핏빛 불덩이에 이어 여인의 잔혹한 손속이 더해지자, 감염자 돌격대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파괴력도 한 수 위인 데다가 재생 능력까지 무용지물을 만드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여인의 손길이 감염자의 머리에 작렬하려는 찰나, 희끄무레한 인영이 달려들어 어깨로 여인을 들이받았다.
실험체 여인이 튕겨 날아갔고, 그 자리를 앳된 용모의 여인이 차지하고 섰다.
해방군 사령관 야마무라 레이코가 노인을 노려봤다.
“너희들 뭐야!”
노인이 뻗었던 손을 거두고 빙긋 웃었다.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이었다.
이합집산
“너희들 뭐냐니까! 왜 웃고 지랄이야!”
노인은 웃었고, 여인은 폭발했다.
혈마 사마염은 빙글빙글 웃음으로 응시했고, 자칭 해방군 사령관 야마무라 레이코는 버럭 호통쳤다.
“괜찮구나. 쓸 만해. 기대 이상이야.”
“무슨 개소리야! 누구냐니까! 죽고 싶어!”
“자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사마염이 느긋하게 응수하자, 야마무라 레이코가 출수했다.
야마무라 레이코의 선공에 실험체 여인과 사마염이 동시에 움직였다.
실험체 여인이 야마무라 레이코를 향해 수도를 내질렀고, 사마염은 야마무라 레이코를 가볍게 밀어냈다.
이어 실험체 여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놔두거라. 어차피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사마염의 대수롭지 않은 손짓에 야마무라 레이코가 멀찍이 밀려갔다. 튕기듯 반격에 나서려다 멈춰섰다.
사마염의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절감했다. 자신보다 월등히 우위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뭐지? 왜 우리 애들을 죽인 거야? 정부에서 보냈어?”
야마무라 레이코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군인 놈들도 같이 죽였네? 정부는 아닌가? 그럼 뭐야? 누가 보낸 거야? 양놈들이야?”
“보면 모르겠느냐? 지구상에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놈은 없다.”
사마염이 피식 웃더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핏빛 구체가 형성돼 나아가더니 필사적으로 탈주 중이던 자위대 병력을 덮쳤다. 거대한 열기와 함께 폭발했다. 수십 명이나 되던 자위대 병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하는 게 뭐야?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건데?”
야마무라 레이코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태도도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글쎄다. 상부상조라고 하면 어울리려나···.”
“뭐야. 영감님. 부하 삼는다더니 상부상조는 또 뭔 말이야?”
반발은 실험체 여인에게서 나왔다.
사마염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입가엔 허허로운 미소를 그렸다.
“일단은 서로 돕는 것에서 시작해야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르든지 하게 될 테니.”
“개수작 집어치워!”
야마무라 레이코가 버럭 고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