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50)

묵빛 기세가 작렬하는 빛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청년과의 거리도 단숨에 축소됐다. 목을 베어버릴 기세로 청년을 엄습해갔다.

“어! 다짜고짜 뭐하자는 거야!”

청년의 표정에 깃든 장난기가 사라졌다.

심검의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감지한 것이었다.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공간을 왜곡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심검은 청년의 어깻죽지를 스치는 정도에 그쳤다.

사실 어깨를 반쯤 자를 위력의 검격이었지만, 청년의 신체가 원체 단단해 튕겨낸 결과였다.

“어쭈! 제법인데!”

청년이 어깨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이내 재생돼 멀쩡해졌다.

일단 문답무용의 선공은 실패로 돌아간 양상. 공이 청년에게 넘어간 형국이기도 했다.

“이제 내 차례지?”

청년이 몸을 날렸다.

몸놀림이 기괴했다. 어슬렁 움직인 듯했는데, 어느 틈에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움켜쥐려 했다.

신법이라면 유지훈도 무림 일절이었다.

흔들 하는 동작으로 청년의 손을 비껴낸 뒤 심검을 내질렀다. 겨냥한 곳은 청년의 팔목이었다.

서걱!

가르긴 했지만, 완전히 자르진 못했다.

청년이 신속하게 팔을 비틀기도 했지만, 역시 단단한 신체에 막힌 탓이었다. 심검도 끝까지 파고들지 못할 정도였다.

절반가량 잘랐다. 덜렁덜렁 붙어 있는 양상이었다.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바로 회복돼 붙어버렸으니.

대결이 이어졌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의 격돌.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빠르기는 청년이 우위였지만, 유지훈에겐 심검과 노련함이 있었다.

반대로 유지훈의 심검은 모든 걸 벨 수 있었지만, 청년에겐 어지간해선 잘리지 않는 신체와 재생 능력이 있었다.

유지훈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중국 최강의 초인들이라는 팔대 사부 가운데 다섯이 실험체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몸놀림 때문이었다. 속도는 둘째 치고, 예측불허의 움직임을 감당하지 못했을 듯했다. 공간을 왜곡한 양상으로 닥쳐와 목을 잡아 뽑아버리는 데 당해낼 도리가 없었을 터였다.

유지훈도 심검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낭패를 봤을 수도 있었다.

“무결아. 이거 비무 아니다. 무조건 제압하고 봐야 한다.”

혼자서 제압하려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화무결이 협공에 나서 움직임이라도 제어해줘야 심검을 활용해 뭔가 해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

“안 그래도 뛰어들 여지를 찾고 있네.”

화무결도 수차례 대결에 개입하려다가 멈칫한 상황이었다. 실험체의 신법이 도통 무리(武理)에 맞지 않은 탓이었다.

자칫 뛰어들었다가 유지훈의 움직임에 저해되면 곤란했다. 실험체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개입이 돼야 했다.

‘활강시의 약점은 머리, 뇌다. 일단 목을 분리한 뒤 뇌를 으깨 처치해야 한다. 지훈이의 심검이 목을 벨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파고들 여지를 찾기 쉽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며 틈을 찾으려 하는데,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랴오위안허였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자네. 타인의 특성을 빌려 쓸 수 있다고 했는가?”

“빌려 쓴다기보다 잠시 습득해 사용하는···. 그렇소. 빌려 쓴다고 할 수 있을 거요.”

“그럼 정신 바짝 차리고 있게.”

화무결이 공력을 끌어올렸다.

눈을 부릅뜨고 유지훈과 실험체의 격돌을 노려봤다. 개입할 순간을 찾는 것이었다.

개입의 방식은 장력, 순간은 둘이 가장 가깝게 붙은 때였다.

장력으로 둘을 동시에 날려버리려는 의도. 흩어져 동작을 멈춘 순간을 노리려는 전술이었다.

순간을 포착했다.

“지훈이! 아파도 좀 참게.”

십 성 공력을 쏟아부은 장력을 뿜어냈다.

콰쾅!

유지훈과 실험체 청년이 서로 얽히는 찰나, 화무결의 장력이 작렬했다.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으윽!”

“아악!”

유지훈과 청년이 피를 뿜으며 멀찍이 날아갔다.

나란히 날아가는 듯했지만, 이내 흩어졌다. 체구가 큰 유지훈이 조금 덜 날아가 내동댕이쳐졌다. 청년은 좀 더 날아가 나뒹굴었다.

상태는 청년이 다소 나아 보였다. 단단한 육신 덕분일 터였다.

어쨌거나 둘 다 재생 능력이 있어 이내 멀쩡해질 테니, 당장의 상처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일세!”

화무결이 랴오위안허에게 신호를 보냈다.

랴오위안허가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양손을 내뻗었다.

공간을 일렁이는 싸늘한 기세. 백색 화염이 청년을 덮쳐갔다. 서서히 화염 안에 가뒀다.

랴오위안허의 특성 습득기가 발동한 순간이었다. 로버트 미첨의 특성을 습득해 청년에게 쏟아낸 것이었다.

원래 주인의 헬파이어만큼 강렬하진 않았지만, 청년을 집어삼킨 화염은 육신을 지워가기 시작했다. 소멸의 작동이었다.

“으으으. 이게 뭐야? 이거 할 줄 아는 놈이 또 있었어?”

화무결의 장력에 너덜너덜해진 상황에서도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상처투성이의 육신이 백색 화염에 갇혀 소멸해가는 와중에 조금씩 재생하기 시작했다.

“아까 팔 부러뜨린 놈에 비하면 장난이네.”

피식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사색이 됐다.

“너, 너는 왜 멀쩡한 거야?”

유지훈이 심검을 움켜쥔 채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으론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겉보기엔 상당히 회복한 듯했다. 움직임에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모질아. 너만 재생 능력 있는 거 아니다.”

심검이 묵빛 광휘와 함께 백색 화염의 공간을 갈랐다.

악착같이 화염을 헤치고 나오려던 실험체의 목을 스치듯 지나갔다.

거침없었다. 둔탁한 충돌의 양상도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었다.

두둥실. 실험체의 머리가 화염을 뚫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털썩. 머리를 잃은 실험체의 육신이 화염 속에 주저앉았다.

소멸이 가속됐다. 뇌에서 멀어진 육신에 더 이상 재생은 없었다.

“안돼!”

육신을 잃은 머리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사라져 가는 육신을 향해 절규했다. 육신을 향해 굴러가려 했다.

소멸해가는 와중에도 육신은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머리를 손에 쥐려는 듯. 목에 붙여 재생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소용없었다. 사력을 다해 몸부림쳐도 소멸의 공간을 헤어날 수 없었다. 백색 화염이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사이 육신은 완전한 무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갔다.

“안돼! 내 몸, 내 몸 내놓으란 말이야!”

절규는 처절했지만, 허망했다.

백색 화염이 잦아들 무렵, 실험체의 육신 또한 사라졌다.

유지훈이 랴오위안허를 향해 슬쩍 웃어 보였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한 건 했네!”

“운이 좋았을 뿐이오.”

랴오위안허가 로버트 미첨을 흘깃 쳐다봤다.

그의 특성을 습득해 사용했음을 알리는 모습이었다.

“너희들 다 죽여버릴 거야!”

실험체의 마지막 몸부림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머리만 남았지만, 좀처럼 죽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머리만 있는데 어떻게? 물어뜯기라도 하려고? 굴러다니면서?”

“영감이 너희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미친년이랑 같이 와서 싹 다 태워버릴 거라고!”

“영감이면 혈마? 어딨는데?”

실험체는 유지훈의 질문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기 말만 계속 쏟아냈다.

“영감이 불 싸지르는 재주 가르쳐준다고 할 때 배울 걸 그랬어. 배웠으면 너희들 다 태워 없앴을 텐데.”

“불 싸지르는 재주? 아수라혈염기 말이야?”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그냥 걸리면 다 죽는다고.”

“너도 그걸 배울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하대?”

“가능하니까 가르쳐준다고 했겠지. 병신 새끼야.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영감을 불러야겠구나.”

실험체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 입을 하늘 쪽으로 향하게 했다.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영감! 빨리 와서 나 좀 구해 줘! 이 새끼들 다 죽여버리라고!”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화무결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쉴새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머리통을 향해 권격을 내리꽂았다.

뻐걱! 뻐억! 퍼석!

연달아 세 차례 작렬한 권격에 실험체의 머리가 완전히 으깨졌다. 그제야 조용해졌다.

“보자 보자 하니까 시끄러워서 못 살겠네.”

성에 안 차는지 화무결은 발로 으깨진 머리의 잔해를 짓이기기까지 했다. 하나하나 잘근잘근.

“야! 혈마에 대해 캐내고 있는데 그렇게 없애버리면 어떡해!”

“듣자 하니 시끄럽기만 하지, 도움 될 만한 건 눈곱만큼도 없었네.”

전초전이 일단락됐다.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깔끔한 정리를 위한 청소 도구가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

기세들의 충돌 (3)

실험체 청년을 말끔히 소멸시킨 시점의 상황.

국토안보부와 CIA, 전미각성자협회로 구성된 지휘부는 사실상 와해 지경이었다.

CIA 사무국 간부 요원 둘 사망, 전미각성자협회 부회장도 사망, 국토안보부 측 책임자 반쯤 실성···.

작전의 핵심인 포 호스멘의 로버트 미첨은 팔 병신이 됐다. 회복되기 전까지는 특성 발동 불가 상태였다. 이를테면 일반인.

극적으로 유지훈 일행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지휘부는 와해에 그치지 않고, 몰살에 이르렀을 터였다.

지휘부 부재 상황에서 정리는 쉽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살피는 형국. 눈치 없이 등장해 소란을 피운 바보 덕분에 빠르게 정리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중년의 일본인이 수행원을 이끌고 허겁지겁 현장에 나타났다. 유지훈을 알아보자마자 표정부터 구겼다.

“유지훈 씨! 여기 미국과 일본이 중요한 작전을 진행하는 장소입니다. 유지훈 씨가 함부로 와선 안 될 곳이란 말입니다!”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후미오였다.

인사차 지휘부를 찾았다가 소동의 끝자락을 접한 것이었다.

유지훈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시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이노우에 후미오는 언짢은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넋을 잃은 모습으로 팔을 감싸 안고 있는 로버트 미첨을 알아봤다.

“유지훈 씨!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왜 자꾸 일본을 망치러 드냔 말입니다!”

“내가 일본을 언제 망쳤다고···.”

이노우에 후미오의 노성에도 유지훈은 심드렁한 표정을 귀를 후볐다. 못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이건 중대한 외교적 결례입니다. 유지훈 씨는 지금 한일 관계뿐 아니라 한미 관계까지 망치고 있다고요!”

“알았어. 갈게. 가면 될 거 아냐.”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UN에도 제소할 것입니다.”

유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벗어났다.

화무결이 의아한 눈빛으로 뒤를 따랐다.

“이렇게 그냥 간다고? 혈마는 어쩌고? 저자가 뭘 잘못 알고 있지 않은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야지.”

“시끄럽잖아. 너도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라며.”

유지훈이 발로 뭔가를 밟는 시늉을 했다.

실험체에게 혈마에 대해 캐물을 때, 화무결이 머리를 밟아 으깨버린 일을 지칭한 동작이었다.

“그래도 혈마는 어쩌려고···.”

“놔두면 알아서 정리될 거야. 어디 온천이나 가서 몸이나 풀자.”

“온천? 온천 좋지!”

내처 표정이 어두웠던 랴오위안허도 온천이라는 말에 반색했다.

“안 그래도 뜨끈한 물에 몸 좀 담그고 싶었소.”

희희낙락하며 걸음을 재촉하는 세 사람을 일본 외무대신은 눈살을 한껏 찌푸린 채 노려봤다.

욕설을 중얼거린 뒤 로버트 미첨에게 달려갔다.

“로버트 미첨 초인님. 괜찮으십니까? 저는 일본 외무대신입니다. 진작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당신이 일본의 외교 책임자라고?”

“그렇습니다. 이노우에 후미오라고 합니다. 조금 전 사건에 대해서는 사죄드리겠습니다. 좀 더 철저히 일대를 통제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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