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150)

“아무래도 감염이 진행되면서 지력이 회복되는 모양이에요. 처음엔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었다가 점차 원래 수준의 이성을 되찾는 식으로요. 만약에 지력이 발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면···.”

“골치 아파지겠지. 계획대로 해선 곤란할 수도 있겠어. 어쩔 텐가?”

마커스 수아레스의 시선이 로버트 미첨을 향했다.

“작전을 변경할 필요가 있겠소. 지휘본부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가겠소?”

“고리타분한 녀석들 상대하는 건 자네 몫 아닌가? 혼자 다녀오시게. 작전을 앞당기려면 검문소 시찰도 서둘러야 할 텐데, 우린 계속 둘러보고 있겠네.”

“그럼 다녀오겠소. 당분간 임무는 염두에 두지 않는 것으로 해주시오. 감염자를 발견하면 무조건 제거하는 쪽으로.”

“알겠네. 어차피 자네 없이는 임무도 없네.”

로버트 미첨이 일행과 헤어졌다.

CIA와 국토안보부 그리고 전미각성자협회 간부로 구성된 지휘부가 주둔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지휘부는 야전 막사 형태였다. 주일 미군과 육상 자위대 병력이 투입돼 초병 역할을 맡고 있었다.

“미첨 초인님.”

그를 알아본 초병의 경례를 경례로 화답한 뒤 막사로 들어서려던 로버트 미첨이 묘한 위화감에 뒤를 돌아봤다.

준수한 용모의 동양인 청년이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빙글빙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는가?”

대답은 없었다.

청년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한편으로 뭔가 계산하는 듯했다.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와중에 빠르게 회전하는 눈동자.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 나쁜 장면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들어가 보겠다.”

“기다려 봐.”

로버트 미첨이 막사로 들어서려 하자, 청년이 입을 열었다.

“어느 선까지 손을 써야 적당한 경고가 될지 생각 중이니까.”

“뭐라!”

로버트 미첨이 언성을 높일 무렵, 주위 초병들도 청년의 존재를 인지했다. 그때까지는 청년이 나타난 것조차 몰랐던 모습이었다.

수십 명의 초병들이 지휘부 주위를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지만, 청년이 막사 앞에 올 때까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누구요!”

“여긴 어떻게 왔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초병들의 총구가 일제히 청년을 향했다.

당장이라도 격발할 태세였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로버트 미첨을 향해 다가갔다.

“결정했어. 영감은 적당히 하라고 했는데, 나는 적당히가 안 돼. 싹 다 치워야 직성이 풀리거든.”

초병들이 로버트 미첨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초인님. 경계가 소홀했습니다.”

한편으로 청년을 향해 최후의 경고를 날렸다.

“멈춰라! 더 다가오면 즉시 격발하겠다!”

청년이 몸을 날렸고, 초병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총탄은 청년의 몸을 스치지도 못했다.

청년은 유령 같은 몸놀림으로 빗발치는 총탄 사이사이로 움직였다. 총신을 잡아 쪼개버리더니, 초병의 머리마저 뽑아버렸다.

1초 남짓이나 흘렀을까.

총성은 멎었다. 주위엔 머리가 사라진 초병들의 시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밖의 소동 때문에 막사 내 사람들이 몰려나올 때까지.

“뭐야!”

“무슨 일이야!”

“경계병들 뭐 하고 있어!”

작전의 지휘부가 모두 밖으로 나왔다.

기함해 참상의 현장을 바라보다가 로버트 미첨을 보고는 안도했다. 전미 최강의 초인이 사태를 정리하리라 믿는 모습이었다.

“초인님···.”

로버트 미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청년. 득의양양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표정에서 우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양상이었다.

“누구지? 감염자인가?”

“감염? 무슨 감염? 이 동네에 무슨 바이러스라도 돌았어?”

그때 지휘부의 CIA 요원이 벼락같이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겨냥한 곳은 머리였다.

탕! 탕! 탕!

이번엔 청년은 피하지 않았다. 다만 살짝 몸을 솟구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총탄을 받아냈다.

팍! 팍! 팍!

총탄이 가슴을 관통했다.

청년은 피식 웃었다. 가슴을 슬쩍 어루만지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해?”

어느새 CIA 요원 앞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여지없이 머리를 잡아 뽑았다.

순간 로버트 미첨이 청년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공간을 일렁이는 파장과 함께 하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싸늘한 기운이 사방으로 번져가는 가운데 화염이 청년을 집어삼켰다.

“헬파이어···.”

지휘부 누군가의 입에서 경탄하듯 흘러나온 단어였다.

헬파이어. 로버트 미첨의 특성이었다. 모든 것을 태워 소멸시키는 공능을 지닌 지옥의 불.

청년 또한 별수 없는 듯했다.

화염에 휩싸인 채 서서히 소멸해갔다.

“누굽니까? 초인님. 감염자입니까?”

헬파이어를 알아본 지휘부, 전미각성자협회 부회장이 로버트 미첨에게 물었다.

로버트 미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염자는 아닌 것 같소.”

“그럼 혹시···?”

“중국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실험체!”

CIA 사무국 간부가 청년의 정체를 알아봤다.

경악은 잠시, 이내 아쉬움의 탄식을 흘렸다.

“아쉽게 됐습니다. 생포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로버트 미첨이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생포는 불가한 상대임을. 헬파이어로 소멸시킨 것도 운이 따른 결과임을.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화염에서 들려온 소리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화염이 옅어지면서 소멸했던 청년의 몸이 서서히 형상을 갖춰가고 있었다. 재생이었다.

“이런!”

로버트 미첨이 다급하게 양손을 뻗었다. 특성을 발동하려 했다.

이번엔 청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어이 몸을 휘감은 하얀 화염을 뿌리치고 나왔다.

순식간에 공간을 축소하더니 로버트 미첨 앞에 다가섰다. 화염을 쏟아내기 직전 양팔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잡아 뽑으려 했다.

로버트 미첨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비틀었다. 몸통을 휘돌리는 기괴한 동작으로 청년의 손을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양팔이 덜렁거렸다. 부러진 듯했다.

다급하게 양손을 뻗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덜렁거리는 팔 때문에 특성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았다.

피식, 피식할 뿐 화염은 손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졌다.

“끝난 거야? 재미없게 됐는데. 또 보여줄 건 없어?”

레벨 7의 각성자인 전미각성자협회 부회장의 특성 썬더 레이저가 청년의 몸을 관통했지만, 효과는 잠시에 불과했다.

이내 회복된 청년이 목을 잡아 뽑으면서 부회장의 몸부림은 가볍게 제압됐다.

“더 보여줄 거 없으면 목들이나 내놔.”

청년이 첫 번째 먹잇감을 고르려 시선을 움직일 때.

“음흉한 놈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네!”

몹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기세들의 충돌 (2)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달렸다.

오른쪽 운전석에 한국과 반대의 도로가 익숙지 않은 탓에 그저 액셀을 밟아댈 수밖에 없었다.

차선이고, 신호고 할 것 없이 싹 다 무시했다. 심지어 중앙선까지. 속도 계기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각종 위반 딱지를 수백 장은 끊었을 법한 상황이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남의 차니까. 위반 딱지가 날아올 가능성은 일도 없을 테니.

그렇게 오사카부 인근에 도착하니 경계와 검문이 심했다.

험준한 산길도 문제없는 허머의 특성을 살려 샛길을 찾아다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샛길에도 경계 인력이 배치돼 있었다.

정들었던 허머와 작별의 순간이었다.

“지금까지는 편하게 왔는데, 이제부터 몸이 고생 좀 하겠군.”

유지훈이나 화무결은 문제 없었다.

50여 년의 무림 생활 대부분이 걷고 달리는 것이었으니.

다만 랴오위안허는 신경 쓰였다.

명색이 곤륜의 사부라는 작자가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다닌 탓에 운전도 못 한다고 할 지경이었으니.

유지훈과 화무결의 절륜한 신법을 제대로 좇을 수 있을지. 여차하면 버려두고 가야 하나 싶기까지 했다.

“잘 쫓아올 수 있겠어? 제법 험한 길로 다녀야 할 것 같은데.”

“각성하기 전에 육상 선수였소.”

“오호! 종목은? 창 던지기나, 투포환 같은 거면 말짱 무소용인데.”

“철인 3종 경기.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였소.”

“아···.”

유지훈에게 때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철인 3종 경기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가 각성하면, 무림 경공의 고수 못지않은 신법을 발휘할 수 있음을.

“천천히 좀 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앞장서 가는 거야?”

“아. 뒤에 있었소? 하도 잘 쫓아오라고 신신당부하길래, 한참 앞서가는 줄 알고···.”

그렇게 오사카부 접경 지역에 당도했을 때, 어딘가에서 범상치 않은 기세의 일렁임이 감지됐다.

기감에 있어서는 화무결이었다. 무림 천하제일인의 내공으로 폭증하는 기운을 읽어냈다.

“저쪽에···. 십 리(4km) 정도 떨어진 것 같군.”

어느 정도 이동한 이후엔 유지훈 또한 감지했다.

“화염의 기운 같은데? 혈마일까? 아수라혈염기와는 다른 듯한데···.”

“혈마는 아닌 듯하네. 화염이긴 한데, 기세가 차갑네.”

랴오위안허는 기감은 두 사람에게 미쳤지만, 특성에 관한 지식은 남달랐다. 타인의 특성을 습득하는 특성을 보유한 덕분이었다.

“차가운 성질의 화염이면 화산의 사부가 지녔던 특성과 유사하오. 빙염(氷炎)이라 불리던 특성이오. 미국의 초인 중에 비슷한 특성을 보유한 자가 있다고 들었소.”

“미국의 초인? 포 호스멘인가?”

“그건 나도 모르오.”

“일단 가보자고.”

미국의 초인이 오사카부 접경 지역에 와 있다면, 감염자 확보를 위해서일 가능성이 컸다.

특성까지 발동할 정도면 뭔가 사고가 발생했다는 의미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무결의 짐작대로 4km 정도 이동했을 때 반가운 순간을 맞이했다.

“음흉한 놈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네!”

시선에 들어온 사람들.

우악스러운 눈빛으로 먹잇감을 둘러보는 청년과 팔 병신이 돼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중년 사내 그리고 떨거지들.

하나 같이 속이 시커먼 놈들이었다.

젊은 놈은 혈마를 쫓아다니는 놈일 테니 나쁜 놈이고.

팔 병신은 남의 나라 불행을 돕는다고 와서 잇속이나 챙기려 하는 저열한 족속이다.

나머지 떨거지들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놈들이고.

“너희들은 또 뭐야?”

청년이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오랜만에 무림에서 자주 쓰던 용어를 사용하고 싶었다.

청년, 그러니까 실험체, 따지고 보면 혈교의 활강시를 상대하기에 무림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심검을 생성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