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스틴 로저스의 일본 입국 기록을 알아보겠습니다. 내각 정보국에 우리 사람이 있어서 가능할 겁니다.]
“알아보시는 김에 포 호스 멘인지 언제 입국하는지도 부탁드려요.”
이윤성과 통화는 여기서 종료됐다.
정보 조직을 총동원해 미국과 일본의 동향을 수집 분석한 뒤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중 또 하나를 실행에 옮길 때였다.
이자걸과의 통화였다. 변종 몬스터를 일본에 보냈던 장본인.
당시 변종 몬스터에 의한 변이가 토착 몬스터 뿐만 아니라 일반 들짐승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었다.
어쩌면 식인 괴질이 당시 변이를 일으킨 들짐승이나 반려동물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네. 유지훈 씨. 지금 쉬웨이칭 박사님이랑 열띤 토론 중이었습니다.]
이자걸은 중국 슈퍼 솔져 프로젝트 연구소장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있었다. 또 뭔가를 획책하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슈퍼 솔져 프로젝트를 이어받기라도 하려고요?”
[못할 것도 없죠. 사실 저도 슈퍼 솔져나 진 배 없는데요.]
맞는 말이었다.
이자걸은 언제든 초인을 능가하는 괴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시 전화하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한창 중요한 대목을 토론 중이었는데요.]
“안 됩니다. 이쪽도 만만치 않게 급합니다.”
[으음. 유지훈 씨가 급한 게 더 급하겠죠. 말씀하시죠.]
“지난번에 일본에 어미 녀석 보냈을 때 일으켰던 변이 있잖습니까.”
[그랬죠. 녀석이 음식 먹다가 남기고, 아무 데나 똥 싸지르고 다녀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주의 잘 줘서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게 아니고, 잘 하면 여기저기 제대로 엿 먹일 기회가 온 것 같아서 그러는데요···.”
***
네 서양인이 나리타 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입국했다.
각기 다른 연령대와 인종 그리고 확실히 차별되는 분위기였지만,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여유였다. 강자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
익살스러운 인상의 히스패닉 노인과 이지적인 분위기의 백인 중년 사내, 고혹적인 미모의 흑인 여성과 예리한 눈매의 동양인 청년.
포 호스멘(Four Horsemen)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초인 집단. ‘묵시록의 네 기사’에서 이름을 빌려온 집단답게 죽음의 기사로서 역할을 해왔다.
묵시록과 달리 대상은 인류가 아니었다. 몬스터와 빌런이었다. 몬스터의 멸종과 빌런의 소멸을 소명으로 초인의 삶을 이어왔다.
백기사 로버트 미첨과 적기사 마커스 수아레스, 흑기사 엘라니스 잭슨과 청기사 데이비드 포스터.
이들은 항상 함께였다. 어떠한 임무든, 또 어떠한 적수든, 넷이 함께 임하고 상대했다.
혹자는 이들 개개인의 능력을 폄하했다. 혼자서는 초인 하나 상대하기에도 버거울 거라고.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함께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를 지워버렸다.
함께 있을 때 이들은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개개인으로서도 세계 10위 안에 충분히 이름을 올릴 강자들이었다.
“이렇게 조용히 입국하는 건 낯선 경험이지 않은가? 어딜 가든 엄청난 인파에 시달리곤 했는데.”
히스패닉 노인, 마커스 수아레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나리타 공항은 한적했다. 얼마 전 변종 몬스터 출몰 이후 일본을 오가는 하늘길 대부분이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근엔 정부 차원에서 항공편을 통제했다. 출국을 원천 차단했고, 입국도 극히 제한적으로 받아들였다.
공항에 사람이 드나들 형편이 아니었다.
미국을 비롯한 북미 지역에서 가는 곳마다 인파를 몰고 다녔던 포 호스멘에겐 사뭇 생경한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임무를 고려하면 조용한 게 좋소. 일본에서 우리가 온 진짜 목적을 모르게 해야 하니 말이오.”
백인 중년 사내, 로버트 미첨이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뒤를 따르던 동양인 청년 데이비드 포스터가 눈매를 찡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 임무라는 거 무시하면 안 됩니까? 로버트도 겪어봐서 알잖아요. 놈들을 생포하는 건 사실상 불가하다고요. LA에서도 생포하려다가 마커스 영감님 죽을 뻔한 거 기억 안 나요?”
“데이비드 말이 맞아요. 듣기로 숫자도 LA 때보다 월등히 많다고 했어요. 생포는 쉽지 않을 거예요.”
흑인 여성 엘라니스 잭슨까지 청년에게 동조하자, 로버트 미첨이 빙긋 웃었다. 여유로운 미소였다.
“생포는 홈랜드 놈들이 주장하는 임무다. 놈들 주장 때문에 우리가 위험해질 이유는 없지. 내가 생각하는 임무는 따로 있다.”
“그게 뭔데요?”
“이거만 챙겨가는 것.”
로버트 미첨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어차피 여기에 모든 게 기록돼 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자료가 될 거다. 샘플 확보 차원에서 서너 개 챙겨가도록 하자.”
각성 전 로버트 미첨은 뇌 신경을 전공한 의학 박사였다.
CDC와 국토안보부에서 식인 괴질 감염자를 생포해 진행하려는 연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사이트가 있었다.
결국 연구의 본질이 뇌로 향하게 되리라는 점이었다.
“그럼 나머지는 싹 지워버려도 된다는 말이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국도 아닌 곳에서 위험할 이유는 없으니.”
“그래도 죽음의 기사로서 이름값은 해야죠.”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정장을 갖춰 입은 사내들이 네 사람에게 다가왔다. 서양인 둘과 동양인 다섯이었다.
중년의 동양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일본을 도우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후미오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이어 서양인이 네 사람을 준비된 차량으로 안내했다.
“사무국에서 나왔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네 사람은 말없이 마중 나온 CIA 요원을 따라갔다.
대기하고 있던 대형 승합차 올라탄 뒤에야 질문을 던졌다.
“어디로 가는가?”
“일단 도쿄의 숙소로 갑니다. 본격적인 작전은 내일부터 수행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습니다.”
“문제 되는 지역의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쿼런틴을 진행 중입니다. 정확하게는 비감염자를 빼내는 작업입니다. 오사카부에 감염자들만 남게 되도록.”
로버트 미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CDC는 LA의 식인 사건 때 확보한 감염자의 잔해로 감염 여부를 판독할 수 있는 키트를 만들었다.
일본 오사카부에서 키트를 활용해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구분하는 작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비감염자는 오사카부를 탈출하게 하고, 감염자만 남기는 방식이었다.
“키트의 정확도는?”
“굳이 판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양성 반응이 나오면 사살해도 좋다고 일본 정부가 승인했습니다.”
“참혹하겠군.”
CIA 요원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많은 사람이 사살됐음을 인정하는 눈치였다.
“오사카부로 바로 가도록 하지. 이런 아비규환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거든.”
포 호스멘이 식인과 학살의 현장으로 차량을 돌렸다.
***
회색지대 (2)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행이 순조롭진 않았다.
일단 항공편이 없었다. 변종 몬스터 출몰과 변이의 유행 이후 정부에서 일본을 여행금지 국가로 지정한 탓이었다.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여행금지 부분은 인도적 목적의 방문으로 해결됐고, 항공편은 전세기를 띄우기로 했다.
이윤성이 백방으로 힘써준 덕분에 여기까진 무리 없이 진행됐다.
유지훈과 화무결 그리고 곤륜의 사부 랴오위안허, 단 셋만 향하는 여정. 예기치 않은 훼방꾼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대체로 야당 의원들이었다. 여당 내에서도 대통령에게 불만이 있던 의원들이 동조했다. 특혜를 빌미로 시비를 걸었고, 외교상 문제를 걸고넘어지며 방해에 나섰다.
[일본에 가야 할 사람이 유지훈 초인뿐인가. 다들 국가 방침을 따르느라 참고 있는데, 유지훈 초인에게만 전세기를 허용하는 건 특혜다. 당장 철회하라!]
[유지훈 초인이 방문 목적을 명확히 하지 않았음에도 여행을 승인한 것 역시 특혜다. 분명한 방문 사유가 있음에도 못 가는 국민이 수천에 이른다. 유지훈 초인은 방문 목적을 명시하라!]
[일본에서도 유지훈 초인의 방문을 탐탁지 않아 하는 실정이다. 외교상 결례를 범해가며 일본 방문을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일 관계 복원을 위해서라도 유지훈 초인의 일본 방문 승인을 취소하라!]
[일행 중에 중국인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정부로부터 수배자로 지명된 인물이다. 중국을 적으로 돌리려 하는가. 유지훈 초인은 당장 수배자를 중국으로 송환하고 일본 방문을 포기하라!]
그동안 남북 평화 관계 진전, 대일 관계 우위 확보 등의 성과에 눌려 잠자코 있던 작자들이 모처럼 구실을 잡은 모양새였다. 연신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앞에선 찍소리도 못할 놈들이 국회에 숨어서 호통이나 치고···.
망명 카드를 써볼까 했지만, 상황상 적절치 않았다.
일본에 안 보내주면 망명하겠다? 앞뒤가 맞지 않은 느낌이었다.
국회의원 놈들이 망명을 막기 위해서라도 보내면 안 된다고 들고 일어서면 국민들이 혹할 수도 있을 테고.
이럴 때 필요한 존재가 이자걸이었다.
[바로 보내겠습니다. 오랜만에 보라 데리고 노시지요.]
거대 왕도마뱀의 막내 보라가 국회의사당에 나타났다. 몸길이 20m의 거대한 몬스터가 일대를 헤집고 다녔다. 건물 몇 채가 무너졌고 의사당 주변이 엉망이 됐다. 아주 약간의 인명 피해와 함께.
“변종 몬스터가 나타났다!”
“재앙급 몬스터다!”
“초인들 뭐해! 당장 국회로 출동하라고 해!”
때마침 초인들은 다른 중요한 임무를 맡은 상황이었다.
임무는 무슨. 임무를 빙자해 놀고 있었다. 사전에 유지훈과 이야기가 돼 있었다. 초인들과 유지훈은 한통속이었다.
적당히 국회가 폐허가 될 무렵, 느긋하게 유지훈이 나타났다.
보라와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시늉을 해준 뒤 잘 다독여 한강으로 보냈다.
“조카들은 알 깨고 나왔니?”
“그르륵그르륵.”
“아직이야? 오래 걸리네. 너희 땐 빨랐던 것 같은데.”
“그르르르륵.”
“아. 오늘내일한다고? 너는 새끼 안 낳고 싶니?”
“크릉크릉.”
“수컷이라서 안 된다고? 빨강이도 수놈 아니었나? 너도 될 거야.”
“키릭키릭.”
“그래. 어여 가서 노력해봐. 너도 엄마 될 수 있어.”
보라가 한강을 유유히 헤엄쳐 사라져 갔다. 서해로 나가 바다를 헤엄쳐 연변의 가족들에게 향할 터였다.
어쩌면 다음에 만날 땐 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보라의 활약에 보람을 더할 순간이었다.
폐허가 된 국회에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마이크 앞에 섰다.
“제가 일본을 다녀오지 않으면, 국회의사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역이 이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반박 시 네 말이 다 맞음.”
그렇게 전세기를 띄웠고, 일본에 도착했는데, 일본에서도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일단 도착한 공항이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 공항이었다. 목적지인 오사카와는 수백km 떨어진 곳이었다.
일본 정부가 아오모리 공항 도착만 허용한 탓이었다.
안전을 이유로 들었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오사카에서 벌어지는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일 터였다.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화무결과 마주 보며 헛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래도 삿포로 공항에 안 내려준 게 어디냐. 그랬으면 바다 건너느라 애 좀 먹었을 거야.”
“보라 녀석 안 돌려보내고 타고 올 걸 그랬군.”
“너 뱃멀미한다 그러지 않았냐?”
일본 정부에선 제법 극진하게 유지훈 일행을 모시려고 했다.
지난번 방문 때 안내를 맡았던 내각정보조사실 요원들이 마중 나왔다. 숙소부터 교통편까지 모든 걸 준비했다고 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모시라는 총리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방문 목적이 위험한 인물을 찾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 협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림에서 온 혈마가 혈교 부활을 위한 활강시 군단 모집을 위해 일본에 왔다고 말할 순 없을 테니.
믿을 리도 없겠지만, 믿으면 엉뚱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간 일이 커질 게 분명했다.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도 못 막을 지경에 이를 게 명약관화했다.
일단 적당히 둘러댔다.
“신원을 감추고 있어서 말씀드려도 소용없을 겁니다. 목적지가 오사카인 건 확실하니 그쪽으로 가면 해결될 겁니다.”
“그렇군요···.”
요원들의 표정이 어색했다.
뭔가 감추려 했지만, 감춰지지 않았음을 인식한 모습이었다.
“오사카는 현재 중요한 작전 때문에 통제 구역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순 없지만, 미국과 연합한 작전입니다.”
“이삼일 안에 작전에 완료된다고 들었습니다. 작전이 종료되면 모시겠습니다. 그때까지 관광이라도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난처한 상황이었다.
강제로 막으려 하면 힘으로 해결할 텐데. 이렇게 예의를 갖춰 간곡히 부탁하면 뿌리치기 만만치 않다.
그래도 불필요하게 발이 묶일 순 없는 실정이었다.
간곡한 부탁엔 간곡한 해결책을 동원하면 될 일이었다.
“무결아. 이분들 좀 재워드려라. 편안하게.”
“안 그래도 그 방법밖에 없을 듯했네.”
화무결이 슬그머니 요원들에게 다가갔다.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동작으로 수혈을 짚었다. 요원들이 픽 쓰러졌고, 공항 로비 벤치에 눕혔다.
요원들이 준비한 차량으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최신식 개량 허머였다. 지난번 일본 방문 때 이용했던 차량이었다.
“그래도 홀대는 안 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렇군. 지난번에 제법 험하게 몰았는데, 정비도 깨끗이 돼 있군.”
유지훈의 시선이 랴오위안허를 향했다.
“뭐해? 운전석에 안 타고.”
“나더러 운전하라는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