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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는 많은데, 만나본 사람은 없는데요?”
유지훈 일행은 크리스털 케이 유통 조직을 좇아 수소문을 이어갔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노인과 젊은 남녀에 대한 목격담은 계속 들려왔지만, 정작 접촉한 사람은 만나볼 수 없었다.
목격담에 따르면 노인과 남녀는 보름 가까이 이 지역에 머물렀다. 열흘 이상 허름한 숙박업소에 틀어박혀 있었고, 밖으로 나와 움직인 건 이삼일 정도였다.
접촉한 사람이 없진 않을 텐데, 만날 수 없었다. 수소문해 찾아가면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만 접할 뿐이었다.
암시장의 특성상 한동안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동하면서 제거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한데···.”
그때 조도연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이 동네에 위조 여권 다루는 전문가가 있습니다. 신분까지 확실하게 만들어준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시도해보기라도 했어?”
“그, 그게···. 저 말고도 많이들 알아봤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굉음이 들려왔다.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과 함께 멀리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뭐, 뭐야! 핵미사일이라도 때려 박은 거야?”
“저, 저기···.”
조도연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여권 위조하는 곳이 있는 지역 같습니다.”
다급하게 달려갔다.
버섯구름이 내려앉은 곳에 폐허가 된 건물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건물이 있던 흔적이었다.
“여기 같은데요···.”
한발 늦었다.
한편으로 제대로 추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도 했다.
“미사일 같은 무기는 아닌 듯하지?”
화기에 의한 폭발은 아니었다. 화약의 냄새가 전혀 없었다.
화무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의 격발에 의한 것인 듯하네.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는 기의 흔적이 느껴지네.”
“그렇소. 응축된 마나에 의한 폭발이오.”
곤륜의 사부 랴오위안허도 동의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의 흔적을 감지하더니 천천히 손을 뻗었다. 건물의 잔해를 향해서였다.
쾅! 다소 작은 폭발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런 특성을 사용했을 거요. 블래스트 종류의 특성인 듯한데, 대단한 수준이오. 초인이지 싶소.”
랴오위안허가 자신의 특성인 습득기로 폭발을 재현한 것이었다.
랴오위안허는 주위에 있는 각성자의 특성을 사용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자였다.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어도 습득이 가능했다.
대단히 무서운 능력자이긴 했지만, 습득할 대상이 없을 때는 무능력자나 마찬가지였다. 유지훈이나 화무결처럼 마나에 의한 특성이 아닐 때도 습득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약점이 뚜렷했기에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엔 한계가 있었다.
“오호! 그쪽 특성 신기한데! 나랑 붙으면 재미있겠어.”
“아닐 거요. 유지훈 초인의 특성은 전혀 읽히지 않소. 당신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일 거요.”
흉수를 추정해내야 했다.
첫 번째로 용의 선상에 오른 이는 역시 혈마였다.
“혈마 놈이 살인멸구 한 걸까?”
화무결의 질문에 유지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거야. 마나의 영역이라고 하잖아. 아수라혈염기는 내공의 영역이야. 이 노인네가 재현할 수 없을 거야.”
“그럼 누가···?”
“우리 같은 놈들이 또 있다는 말이겠지. 혈마 놈 일행을 쫓는···. 우리랑 의도는 다르겠지만.”
유지훈의 시선이 랴오위안허를 향했다.
“초인 같다고 했지? 이 지경을 만들어놓은 놈이.”
“아마 그럴 거요. 모르긴 해도 내 아래는 아니지 싶소.”
“팔대 사부의 아래가 아닌 초인이라···. 중국에 그런 초인이 있나? 블래스트 계열의 특성을 보유한 초인이?”
“내가 알기론 없소. 하지만 모르오. 드러나지 않은 초인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이 나라요.”
맞는 말이었다.
괴상망측한 쪽으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나라였으니. 파도 파도 괴담인 나라에서 초인 하나 숨어있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어쨌거나 여길 폭파시켰다는 이야기는 여기에 단서가 있었다는 의미잖아. 혈마가 여기서 뭔가 했다는 뜻 아니겠어?”
“그렇게 볼 수 있겠군.”
“그렇다면 위조 여권을 만들었다는 건데. 어딘가 외국으로 가려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지?”
“타당한 추측이네.”
화무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혈마의 목적을 짐작할 수 있으면 행보 또한 예측할 수 있을 텐데···. 이놈이 뭘 하려는 걸까?”
“뭐긴 뭐겠어. 세력부터 만들려고 하겠지.”
“세력? 아···. 혈교를 대체할 세력이겠군. 당장은 동조하는 놈들이 실험체 둘에 불과할 테니···.”
“당장 혈교처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를 만드는 건 힘들 거야. 일단 무력부터 확보한 다음에 제압해가면서 끌어들이려 하겠지.”
“그렇다면···?”
화무결이 눈매를 좁혔다.
심상치 않은 상황을 상정한 듯한 표정이었다.
“활강시부터 만들려 하지 않을까 싶어. 재료가 될 만한 자들을 구하기 좋은 곳으로 가려 할 듯해.”
“그게 어디겠는가?”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일단 가자.”
“어디로?”
“어디긴 한국이지. 이윤성 국장 능력 활용해야지.”
유지훈이 랴오위안허를 쳐다봤다.
“그쪽은 어떻게 할래? 같이 갈래?”
“나는···. 쉽지 않을 것 같소. 수배자 신세라 여권이 정지됐을 거요.”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어. 조선족 자치국에 망명했잖아. 여권 새로 발급하면 돼.”
일단 일행이 조선족 자치국으로 향했다.
랴오위안허의 망명 절차를 마무리한 뒤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
“허허허. 무슨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군요.”
이윤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입에선 연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요즘 세상 자체가 소설에나 나올 상황 아닌가요? 다른 차원에 무림이 존재하는 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유지훈이 귀환 이후 처음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해 털어놓은 순간이었다. 다녀온 세계가 무림이라고.
화무결이 무림의 차원 이동자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21세기 지구에 거대한 위협이 될 혈마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야 효과적인 협조를 구할 수 있을 테니.
물론 상대는 이윤성 하나였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거란 믿음이 있는 인물이었다.
“혈마는 또 뭔지···. 제가 무협 소설을 읽은 적이 없어서 도통 와닿질 않는군요.”
“있어요. 무시무시한 놈. 전세계 빌런 조직의 두목들 다 모아놔도 혈마 놈 하나보다 못할 거예요.”
“그럼 설마···. 유지훈 초인보다 강할 수도 있습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중요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놈이 강해질 거라는 점이에요. 세력을 키워 혈교의 위용을 갖추면···.”
이윤성은 여전히 어이없어하는 눈치였다.
“활강시라니···. 강시는 어렸을 때 홍콩 영화에서 본 게 전부인데.”
한편으로 상황의 심각성은 받아들였다.
유지훈에 대한 신뢰는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혈마라는 놈이 활강시를 대량으로 만들기 좋은 곳으로 갔을 거란 말씀이죠? 조건이 충족되는 국가를 찾아봐 달라는···.”
“바로 그거예요. 일단 활강시의 재료로 고레벨 각성자는 적합지 않을 거예요. 살아있는 상태에서 술법을 진행해야 하니까요.”
“레벨이 그리 높지 않아도 근력 자체는 탁월한 각성자가 최고의 재료가 될 걸세. 그런 각성자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곳이지 싶네.”
화무결의 부연 설명을 듣고 이윤성이 SSG로 향했다.
“저 혼자서 바로 답을 드릴 만한 사안은 아닌 듯합니다. 집단 지성이 필요한 시점 같습니다.”
SSG 내부 정보망과 기타 정보 조직 그리고 각성자협회 정보망까지 총동원한 분석에 들어갔다.
3시간 정도 지난 뒤 이윤성의 연락이 왔다.
[조건에 부합하는 국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조건과 부합하지 않는 곳에서 답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회색지대 (1)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건에 부합하는 나라를 찾았는데, 다른 나라가 더 어울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일단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국가는 튀르키예입니다.]
이윤성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설명부터 시작했다.
튀르키예. 한때 터키라고 불렸던 국가다. 투르크 전사의 나라답게 각성자 전력도 상위권이었다.
특이한 점은 강화 계열 각성자 비율이 높았고, 레벨을 능가하는 신체 능력을 보유한 각성자도 많았다.
공식적인 초인은 하나에 불과했지만, 신체 능력만으로는 초인에 버금가는 레벨 7 각성자가 다수인 국가였다.
혈마가 노릴 법한 각성자가 많은 나라라고 볼 수 있었다.
“투르크 전사면 돌궐을 의미하는가? 신강에 돌궐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인들이 제법 있었네.”
스피커폰을 통해 듣고 있던 화무결이 아는 체했다.
지금으로 치면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의미했다. 위구르족 출신 무인들 가운데 돌궐의 자부심을 드러낸 이들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신강이면 마교의 터전이기도 하네. 혈마가 돌궐의 혈통을 이은 자들을 찾는 건 말이 될 듯하군.”
유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고 인정할 만했다.
[그런데 정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뭔데요?”
[전에 미국 LA에서 식인 사건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린 적 있을 겁니다.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해요. 덕분에 미국이 제가 CIA 요원들 때려잡은 일 신경 쓰기 쉽지 않을 거라 하셨죠. 그런데 그 사건이 왜요?”
[어제부터 LA 쪽 통신 봉쇄가 풀려서 소식이 들어오고 있는데요. 식인 사건의 양상이 몹시 기이합니다.]
여태껏 식인 사건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했다.
신빙성이 없진 않았지만, 정보로서 가치는 높지 않았다.
봉쇄가 해제된 뒤 들려온 소식들이 정보로서 가치를 높이고 있었다.
[식인 피해자들이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괴력을 지닌 존재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네? 그게 어떻게···. 좀비예요?”
[좀비랑은 다른 듯했습니다. 멀쩡하게 치유된 모습이고, 이성까지 있는 양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재생 능력을 지닌 괴물을 양산하는 역병이 돌았다는 의미겠네요? 봉쇄가 풀렸다면 해결됐다는 거고요.”
[그렇습니다. 국토안보부와 CDC가 포 호스 멘이라고 불리는 초인 집단을 초빙해 박멸 작전을 진행했다는 것 같습니다.]
“박멸시켰으면 일단락됐네요. 그 상태면 혈마랑 연관 짓긴 힘든 거 아닌가요? 무슨 진전이라도 있었어요?”
[포 호스 멘이 일본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국토안보부와 CIA의 연합 작전이라는 소문도 들려오고요.]
국토안보부가 연계됐다는 점이 의미심장했다.
국토안보부는 미국 내에서 미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조직이었다. 원칙적으로 외국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CIA와 연합 작전이라니. 심지어 국가 전략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초인 집단을 일본으로 보내는.
미국 국내 안보와 직결된 작전이 아니라면, 뭔가 중요한 것을 손에 넣으려는 의도라고 봐야 했다.
“문제의 식인 사건과 연관됐을 수 있는 작전이라는 말씀이군요.”
[때마침 일본에서도 정보가 통제되고 있습니다. 오사카부가 봉쇄됐다는 소문이 있는데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오사카부에 식인 사건이 있을 수도 있다는···?”
[식인 괴질의 창궐이 의심되는 상황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초인 집단이 일본으로 향하는 이유가 식인 괴질로 인해 탄생한 괴존재 확보일 수도 있겠군요.”
[가능한 추론입니다. 미국 현지에선 모조리 소멸시켜서 샘플 확보에 실패했다면요. 중국에서 실패한 슈퍼 솔져 프로젝트 실험체를 일본에서 확보하려는 의도로 분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식인 괴질의 피해자가 재생 능력을 지닌 괴존재가 된다니.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었다.
미국이 전략적으로 괴존재를 확보하려고 하듯, 혈마에게도 먹잇감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화무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괴존재의 양상이 활강시와 다르지 않은 듯하네. 만일 나이마저 먹지 않는다면 활강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걸세.”
“그 이야기는 혈마가 조그만 손을 보면 활강시로 만들 여지가 충분하다는 뜻이네?”
“그렇지. 심지어 강제할 필요도 없을 수 있네. 이성이 있다고 했으니 불노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설득이 통하면···.”
자연스럽게 혈마의 활강시 군단에 합류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혈마의 세력이 급격히 커지고, 좀 더 나아가면 혈교의 부활이 앞당겨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순간 유지훈의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 번째로 혈마 일행을 추적하는 무리에 대해서였다. 단둥시 암시장에 엄청난 폭발을 남긴 존재들.
“국장님. 혹시 미국 초인 중에 블래스터 계열의 특성을 보유한 놈이 있나요? 건물 하나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 정도의 위력으로요.”
[일단 포 호스 멘 중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 클래스의 초인 집단이 세븐 원더인데, 블래스터 계열의 특성은···.]
이윤성이 말을 얼버무렸다.
없다고 말하려는 듯하더니 탄성을 질렀다.
[아! 빌런 중에 있습니다. 다크 디멘션의 수장 저스틴 로저스. 특성이 플라즈마 블래스터라고 했습니다.]
“다크 디멘션의 수장이라고요? 이 자식들은 안 끼는 데가 없구나.”
[왜 그러십니까? 다크 디멘션이랑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문제야 있죠. 미친 마녀 죽였잖아요. 근데 이번엔 제 문제는 아니에요. 놈들이 혈마 뒤를 쫓는 모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