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150)

“연구소장 말고도 참여한 연구원이 적지 않소. 과거에 진행했던 연구도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요.”

“짱개 놈들이 뭘 하든 안 놀라. 하도 기상천외한 짓을 많이 해서.”

유지훈이 헛웃음을 흘렸다.

“당장 실험체 잡겠다고 실험체 만들려 하고 있잖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니까.”

“실험체로 실험체를 잡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요. 내가 지난 과정을 살펴보고 나름대로 파악한 부분이 있소.”

“뭔데?”

“실험체에게 어떤 목적의식이 심어졌다는 점이오. 철저하게 그 목적의식에 따라 움직이고. 문제는 목적의식을 심은 자가 연구소장을 하수인으로 부린 놈이라는 점이오. 당신들이 혈마라 칭하는.”

“짱개 놈들 가운데 바보만 있는 건 아니었군.”

유지훈의 조소 섞인 반응에도 랴오위안허는 하던 말을 이어갔다.

“새롭게 실험체를 만드는 데 성공해도, 혈마라는 놈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클 텐데. 어찌 감당하려는지···.”

“그래서 나도 움직인 거야. 딱히 생기는 거 없는데도. 만일 혈마가 부하를 대거 늘려서 중국을 먹어치우면 다음은 우리나라 아니겠어?”

“막아야 하오. 세력을 더 키우기 전에.”

그 무렵 조도현이 통화를 마쳤다.

심상치 않은 낯빛으로 말을 꺼냈다.

“실력 있는 기술자들 여럿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흔적도 없이.”

“기술자들?”

“의사들이요. 무면허이긴 하지만 수술하는.”

“언제? 어쩌다가?”

“그것까지는 잘···. 그리고 크리스털 케이라는 마약을 유통하던 놈들도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괴노인에 대한 목격담도···.”

“크리스털 케이?”

“환각제입니다. 뇌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그놈들 근거지가 어디야?”

“잠시만요. 알아보겠습니다.”

조도현이 다시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의 대답이 마땅치 않았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가자.”

***

아담한 체구에 곱상한 용모의 여인 야마무라 레이코.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풋풋한 여대생이었다. 오사카대학 2학년으로 일찌감치 취업 준비에 들어간 모범생이기도 했다.

외국어 공부에 각종 자격증 취득까지. 오직 자기계발에만 전념하느라 일탈이나 유흥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요조숙녀였다.

그런 야마무라 레이코가 지금은 전신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앳된 미모는 온데간데없고 짙은 살기를 머금은 눈빛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이빨로 뭔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손에는 굵직한 뼛조각이 들려 있었다. 끝쪽에 손가락뼈가 보이는 듯했다. 사람의 팔뼈인 듯했다.

“에잇! 근육 많은 놈 살은 질겨. 야들야들한 애들 살이 좋은데.”

들고 뜯던 뼛조각을 냅다 집어 던졌다.

앞에 있는 사내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지만,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야마무라 레이코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자위대 새끼들은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쳐들어올 기미 같은 건 안 보이고?”

“엄두도 못 내는 양상입니다.”

“겁쟁이 새끼들. 그따위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됐지.”

“사령관님께서 구하시면 됩니다. 해방군의 준비가 순조롭습니다.”

해방군 사령관. 야마무라 레이코의 현재 모습이었다.

식인으로 세력을 키워가는. 피해자가 새로운 인원이 돼 합류한 덕분에 해방군은 하루가 다르게 규모를 키워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충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육을 탐하는 충동이었다. 학교에서, 또 학원에서, 누군가를 볼 때마다 먹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가까스로 잠재우며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학교 식당에서 접시를 떨어뜨린 친구가 손을 베어 피 흘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견딜 수 없는 욕구에 결국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물어뜯었다. 친구가 필사적으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달려들어 떼어내려 했지만, 가벼운 손짓에 멀찍이 내던져질 뿐이었다. 전에 없던 괴력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친구의 육신이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친구는 숨이 끊어졌다. 30분 가까이 이어진 참극이었기에 경찰도 출동했다.

열 발 가까운 총성이 울린 다음에야 엽기의 현장이 종료됐다.

야마무라 레이코는 피를 뿜어대며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내가 왜? 어쩌다가? 이렇게 죽는 건가? 차라리 잘 됐어.’

영혼은 짙은 안갯속을 헤맸다.

지옥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단념의 시간이었다.

갑자기 환한 빛이 엄습해왔다. 피하려 했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

눈을 떴다. 병실이었다.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총알이 관통하는 순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생생하기만 한데.

피가 빠져나갈 때 얼어붙을 듯한 한기에 떨었던 게 조금 전인데.

총상도 모두 사라졌다. 핏자국만 남아 있을 뿐 멀쩡했다.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에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수갑이 채워진 손에 살짝 힘을 줬다. 툭 하고 끊어졌다.

때마침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식인의 충동이 본능으로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닥치는 대로 먹었다. 간호사에 이어 경비 요원, 형사까지···.

오사카시 식인 역병의 시발점은 야마무라 레이코였다.

후생노동성 방역 당국에 이어 경찰, 자위대까지 투입됐지만, 막을 수 없었다. 피해자만 늘어갔고, 역병의 규모와 범위만 키웠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처음엔 정신을 차릴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견딜 수 없는 죄의식에 손목을 긋기까지 했다. 피를 뿜긴 했지만 이내 멀쩡해졌다.

어느새 충동은 사라졌다. 본능이 됐고,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녀의 먹잇감이 된 희생자가 그녀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부터는 죄책감마저 사라졌다.

오히려 즐기게 됐다. 식인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확인하게 된 미증유의 힘을.

본능이 일상이 되고, 같은 존재가 늘어나면서, 그녀의 머릿속에 괴랄한 사고가 들이차기 시작했다.

‘일본은 강해야 해. 약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고통받는 거야.’

괴랄한 사고는 곧 사명감이 됐다.

‘나는 강해. 내가 일본을 강하게 할 거야. 약해빠진 겁쟁이들 싹 먹어치우고 강한 일본인들만의 나라로 만들 거야.’

그때부터 야마무라 레이코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죽였고, 먹어치웠다. 그럴 때마다 추종자 또한 늘어갔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 희생자들이 추종자 대열에 합류했다.

누군가 그녀와 추종자들에게 해방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야마무라 레이코는 해방군 사령관이 됐다.

“현재 해방군 규모가 얼마나 되지?”

“3000명에 조금 못 미칩니다.”

“아직 조금 부족하네. 5000명만 되면 바로 치고 나갈 생각인데···.”

“다들 숨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사카부를 빠져나간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치고 나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정부에서 핵미사일 카드를 만지작거린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흥! 쫄보 새끼들이 핵미사일은 무슨···. 쓸 생각이었으면 지난번에 한국에다 대고 갈겼어야지. 병신들.”

야마무라 레이코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생각하니까 열 뻗치네. 내일까지 인원 모이는 거 보고 나가자. 나가면 또 인원은 늘어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방향은 어디로···. 일단 도쿄도입니까?”

“응. 도쿄도를 시작으로 좍 훑은 다음에 한국으로. 조센징들한테 진 빚 이자까지 쳐서 갚아줘야지.”

***

전장의 형성 (3)

“개새끼야! 다 말했잖아! 더 아는 것도 없어!”

중년 여인이 욕설을 퍼부어댔다.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몸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엉망이었다. 팔은 부러진 듯 덜렁거렸고, 손가락도 뭉개져 있었다.

주저앉은 모습이 몹시 불편해 보였다. 허리를 심하게 다친 듯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입으로는 육두문자를 멈추지 않았다.

“씨팔놈아! 네 아버지도 나한테는 이러지 않았어! 깍듯이 동료로 인정했다고! 자식새끼가 나한테 어떻게.”

“아버지 이야기 꺼내지 말랬지!”

청년이 중년 여인에게 손찌검을 날렸다.

어조는 격했지만, 표정은 싸늘했다. 냉정함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아직 부족해서 이러는 거 아냐. 이 정도 했으면 없던 기억도 떠올라야 하잖아?”

“다 쥐어짰다고! 더 생각나는 것도 없어. 년놈들 새로운 신분만 알면 되는 거 아냐?”

“장 노인인가 하는 새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고.”

불과 30분 전. 중년 여인은 평소처럼 고기를 썰고 있었다.

정육점 주인으로서 고기를 팔다가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고객이 찾아오면 언제든 작업에 들어갈 채비를 갖춘 채였다.

일상이 무너진 건 뜻하지 않은 방문객들 때문이었다.

싸늘한 외모의 청년 일행과 부드러운 분위기의 서양 중년인 일행이었다. 청년은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오랜만이네. 아버지 소식은···.”

말을 끝맺기 전에 발길질부터 날아왔다.

“건방진 년! 감히 아버지를 입에 올려!”

한때 세계 빌런계의 정점에 섰던 자의 아들이었다.

흑룡회 용두 리자오슝의 차남 리펑리엔. 리자오슝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사실상 궤멸 지경에 처한 흑룡회를 살리기 위해 미국 유학 도중 귀국한 것이었다.

리펑리엔은 발길질을 시작으로 무자비한 구타를 이어갔다.

얼마 전 중년 여인으로부터 가짜 신분을 얻은 자들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노인과 젊은 남녀에 대한 정보였다.

중년 여인은 아는 모든 것, 심지어 셋의 새로운 신분까지 소상히 털어놓았지만, 구타는 고문으로 확대됐다.

“장 노인. 그 새끼는 또 뭐야? 그 새끼에 대한 정보를 내놓으라고!”

기억을 쥐어짜다시피 해 말했지만, 리펑리엔은 만족하지 않았다.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지경에 됐음에도 고문은 중단될 기미가 없었다.

서양 중년인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만류할 때까지는.

“이쯤 해서 그만해도 될 것 같군. 더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시간만 아깝겠어.”

서양 중년인이 여인에게 다가와 턱을 어루만졌다.

“그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정말 모르는가?”

“모른다고 했잖아! 나는 고객의 행방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아. 그게 내 장사의 철칙이야.”

“아쉽게 됐군.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서양인 중년인이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중년 여인을 내려다봤다.

“그자들은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이들을 제거하고 떠났지. 당신만 제외하고 말이야. 이상하지 않은가?”

“그, 그건···.”

중년 여인의 눈빛에 당혹감이 흘렀다. 이내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말했다.

“이, 일본이야. 일본으로 가지 말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했어. 그 조언이 나를 구했다나 어쨌다나.”

“일본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고?”

“그, 그래. 일본에 식인 괴질이 창궐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알려줬어. 어디 가더라도 일본은 피하라고 했어.”

“일본에 식인 괴질이라···.”

서양인 중년인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리더니 돌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게 또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재미있군.”

서양인 중년인이 리펑리엔을 돌아봤다.

“이만 가지. 필요한 건 다 얻은 듯하니.”

“일본인가? 확신할 수 있나?”

“물론.”

“여기서 놓치면 다시 기회를 잡기 힘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가면서 설명하도록 하겠네. 서둘러야 할 듯해.”

서양인 중년인이 리펑리엔을 지나 정육점을 빠져나갔다.

리펑리엔이 불러세웠다.

“잠깐!”

“뭐지? 서둘러야 한다고 했는데.”

“실험체 두 년놈의 목은 내 차지야. 소금에 절여 아버지의 영전에 바쳐야 할 테니.”

“얼마든지. 흑룡회와 다크 디멘션이 손을 잡았는데, 그 정도 선물은 드려야지. 난 장 노인인가 하는 놈으로 만족하지.”

그제야 리펑리엔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육점을 빠져나왔다.

정육점에서 10m 정도 멀어졌을 때 서양 중년인이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춰섰다. 정육점을 돌아봤다.

죽음의 그림자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며 중년 여인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때였다.

“우리가 손잡은 걸 알릴 필요는 없겠지?”

서양 중년인이 빙긋 웃더니 가볍게 손을 뻗었다.

쿠쿠쿵쾅쾅!

굉음과 함께 정육점 건물 주변으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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