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150)

장 영감. 본래 이름은 사마염. 정체는 혈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굽은 허리에 주름투성이 얼굴, 검버섯이 가득 핀 노인이었다. 지금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꼿꼿해진 허리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까지. 30년은 젊어진 인상이었다.

건달들도 사마염의 변화를 알아본 듯했다.

“장 영감. 며칠 못 보던 새 얼굴이 확 피었네? 회춘이라도 한 거야? 거기 꼬맹이랑 무슨 짓이라도 한 모양이지?”

여인이 무심한 시선을 건달들에게 보냈다.

눈매가 꿈틀했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기세였다.

사마염이 너털웃음과 함께 만류했다.

“놔두거라. 아직 쓰임새가 있는 녀석들이니라.”

여인이 짧은 코웃음과 함께 무심하게 지나쳐 갔고, 청년이 건달 무리를 향해 주먹 감자를 들어 보이고는 뒤를 따랐다.

“저 새끼가!”

건달들이 청년을 쫓아가려 하자, 사마염이 앞을 가로막았다.

“쫓아가 봐야 좋을 일 없을 게다. 구해달라고 한 건 어찌 됐느냐?”

“뭘? 영감이 뭐 구해달라고 한 적 있었나?”

노랑머리 건달이 짐짓 모른 체하자, 사마염이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노랑머리 건달이 씩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제 기억나네. 그런데 요즘 단속이 너무 심해. 크리스털 케이 유통망 조진다고 공안들이 총출동했어.”

“두 배 쳐주마.”

“아이고. 기어코 방법이 떠올랐네. 바로 구할 수 있는데, 어디 다녀오시려고? 언제쯤 올 건데?”

“길면 두 시간, 짧으면 한 시간.”

“한 시간 안에 구해놓을게. 요금은 어쩔 거지?”

사마염이 상의 안주머니에서 지폐 두 묶음을 꺼내 툭 던졌다.

“절반은 지금, 나머지는 다녀와서 물건이랑 교환.”

“좋아 좋아. 장 영감은 계산이 깔끔해서 좋다니까. 그럼 후딱 다녀오쇼. 물건은 말끔하게 준비해 놓을 테니.”

사마염이 여인과 청년이 앞서간 방향으로 향하려 하자, 노랑머리 건달이 붙잡아 세웠다.

“근데 장 영감. 회춘한 비결이 뭐야? 저기 새끈한 꼬맹이랑 논 덕분이야? 나한테도 방법 좀 알려주면 안 될까?”

“허허허. 다녀와서 알려주마.”

“고마워. 장 영감은 역시 시원시원해.”

“고마운 일이 맞는지 모르겠구나.”

사마염이 피식 웃은 뒤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뒤처졌지만, 몇 걸음 내딛지 않아 여인과 나란히 걷게 됐다. 유령 같은 움직임. 여인은 당연하다는 듯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다음에 저 씨발 것들 못 죽이게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허허허. 말 좀 곱게 쓰라니까. 고운 처자가 입이 그렇게 걸어서야 쓰겠느냐.”

“씨발 것을 씨발 것이라 부르는데 뭐가 이상해?”

“허허허. 내가 졌다. 그런데 언령을 풀어 줬더니 나부터 해코지하려고 하느냐?”

“해코지가 아니라 버러지 새끼들 압살하는 거 말리지 말라고.”

“맡겨놓은 일이 있어서 그런 게다. 다녀오면 처리돼 있을 테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정육점에 도착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냉장고의 홍등은 꺼져 있었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군복 차림의 중년 여인이 일행을 맞이했다.

“장 노인 맞아?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변한 거야?”

“시끄럽고. 물건을 구하러 왔다. 당장 필요하다.”

“지금 당장? 이 시간에?”

중년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마염이 빙긋 웃더니 주머니에서 지폐 한 묶음을 꺼내 던졌다.

받아든 중년 여인이 환하게 웃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당장 문 닫아야겠네.”

중년 여인의 시선이 여인과 청년에게 향했다.

“셋 다 필요한 거야?”

“왜? 그걸론 부족한가?”

“아니야. 충분해. 둘 다 스무 살 정도인가? 마침 적당한 신분도 확보된 게 있어. 장 노인한테 맞는 건 모르겠는데···. 쉰 살 위로는 없는데 괜찮으려나?”

중년 여인이 사마염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마흔 살이라고 해도 믿겠다. 무슨 조화인지···. 갑시다. 사진부터 찍고 작업 시작하게.”

앞장서 가더니 뒤쪽 벽면을 만지작거렸다.

비밀 통로가 나왔다. 계단을 따라 내려간 지하 공간엔 최신식 컴퓨터와 장비들이 갖춰져 있었다.

“장 노인도 알겠지만, 내 물건은 확실해. 세계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문제없다니까. 제법 비싸게 주고 구한 신분들이거든.”

사진 촬영을 마친 중년 여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자료 입력, 프로세싱 과정 확인, 출력된 자료 전송 등 신중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화면에 뜬 내용을 어딘가로 전송하고는 개운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다 됐어. 이제 오케이만 뜨면 끝이야.”

중년 여인이 출력된 자료를 세 사람에게 건넸다.

“이게 당신들 새로운 신분이니까 숙지하도록 해. 각자 누구인지 정도는 확실히 알아둬야 문제가 안 생기지 않겠어?”

이윽고 화면에 오케이 사인이 떴다.

중년 여인은 세 사람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인 뒤, 자리를 옮겨 다른 장비에서 작업에 들어갔다.

잠시 뒤 장비 사출구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여권이었다. 사마염과 두 남녀의 새로운 신분이 만들어졌다.

“어때? 완벽하지? 위조된 건지 확인해볼 필요도 없어. 진품이니까.”

중년 여인이 세 사람에게 여권을 건네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마염이 흡족한 듯 미소지었다. 묘한 의미가 실린 듯했다.

“마음에 드는군. 그럼 나도 슬슬 마무리해야겠지?”

“마무리라니? 그런데 장 노인 어디 갈 생각이야? 어디든 다 가도 상관없는데, 일본은 가지 마.”

“일본? 일본은 왜?”

뭔가 하려던 사마염이 자세를 바꿨다.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일본에 식인 역병이 돌고 있대.”

“식인 역병?”

“응. 서로 잡아먹고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는 모양이야. 그런데 잡아먹히고도 안 죽는대. 살아나서 다른 놈 잡아먹고···.”

“오호. 잡아먹혔는데 안 죽는다?”

“몸통을 다 뜯어먹혔는데, 싹 다 멀쩡해졌다는 말까지 있더라니까.”

“하하하.”

사마염이 유쾌하게 웃었다.

“지금 그 충고가 너를 살렸다. 장사 잘 하도록.”

청년과 여인을 데리고 중년 여인의 비밀 작업장을 떠났다.

이제 향할 곳은 머물던 숙소였다. 크리스털 케이를 손에 넣을 일만 남았다.

노랑머리 건달패거리가 사마염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 영감. 생각보다 일찍 왔네? 서둘러 구해놓길 잘했군.”

노랑머리가 준비된 가방을 사마염에게 던졌다.

사마염이 가방 속 물건을 살펴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머지 돈 줘야지?”

노랑머리가 물건값의 남은 절반을 요구하자, 사마염이 여인을 흘깃 쳐다봤다.

“궁금한 게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친구랑 대화를 나눠보면 될 것 같은데.”

“아! 회춘의 비결? 역시 예쁜 아가씨랑 논 덕분이구나!”

노랑머리가 빙글빙글 웃으며 여인에게 다가왔다.

여인이 씩 웃으며 노랑머리의 볼을 쓰다듬었다. 잠시 뒤 팍! 소리와 함께 노랑머리의 얼굴이 재가 돼 사라졌다.

여인의 손길이 나머지 패거리를 향했다.

팍! 팍! 팍! 팍!

건달패거리가 모조리 새까만 가루가 돼 흩어져 소멸했다.

“적당히 해라. 돈은 챙겨야 한다.”

사마염이 미리 지급한 돈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싹 다 재가 돼 사라진 뒤였다.

“됐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

전장의 형성 (2)

연구소장 쉬웨이칭과 만남 이후 유지훈은 바로 추적에 나섰다.

단서가 확보됐다. 단둥의 의료 암시장. 21세기로 넘어온 혈마가 활강시에서 노화의 해결책을 찾으리라 예상할 때, 행선지로 가장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가자. 앞장서.”

쉬웨이칭을 앞세우려 했지만, 난색을 드러냈다.

“내가 쫓기는 신세라 함께 다니면 방해만 될 거요. 게다가 단둥에는 가본 적이 없소. 도움이 되지 못할 듯하오.”

납득되는 말이었다.

도망자를 달고 다녀봤자 꼬이는 놈들만 많아질 터였다.

심지어 쉬웨이칭은 제 몸 하나 건사할 능력도 없는 샌님 과학자였다. 보살피면서 다니다 보면 걸리적거릴 변수만 추가될 게 분명했다.

망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조선족 자치국에 남겨두기로 했다.

“제가 모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자걸이 앞장서 쉬웨이칭을 환영했다.

눈빛이 기묘하게 반짝이기까지 했다.

변종 몬스터를 탄생시킨 천재 소시오패스가 허수아비이긴 해도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만났으니.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겠다는 의욕이 엿보이기까지 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제가 가만 안 있을 겁니다.”

“하하하. 걱정마십시오. 대한민국을 위한 일 외에는 한눈팔지 않을 테니까요.”

이자걸이 보살피면 쉬웨이칭의 안전은 확실히 보장될 터였다. 만에 하나 쉬웨이칭이 딴마음을 품는다 해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테고.

이자걸과 여덟 마리 거대 왕도마뱀 그리고 이나연. 이 정도면 어지간한 국가 하나는 전복시키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당장 쉬웨이칭을 잡겠다며 찾아든 북부전구 특수부대가 거대 왕도마뱀 모녀의 식사 거리가 됐다.

78집단군 설랑부대와 79집단군 동북호부대가 속절없이 거대 왕도마뱀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80집단군 태산영웅부대는 진입을 포기한 채 감시 체계만 유지했다. 쉬웨이칭이 조선족 자치국을 빠져나갈 때만 기다리는 양상이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을 테지만. 이자걸이 얼마나 창의적으로 미친놈인지 모르는 녀석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나는 당연히 동행하겠지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소.”

곤륜의 사부 랴오위안허는 단둥행에 함께하겠다고 했다.

다만 단둥이 초행이라 안내자 역할은 불가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문제 될 건 없었다. 조선족 자치국에는 단둥을 밥 먹듯이 드나든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조호견 휘하 각성자 부대원 중에도 절반 이상이 단둥 방문 경험자들이었다. 개중엔 암시장에 빠삭한 이들도 있었다.

“의료 암시장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마약 거래하는 데 말씀이죠?”

“가봤냐? 좀 했나 보네?”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시끄럽고. 앞장서. 가이드나 해라.”

유지훈과 화무결 그리고 랴오위안허, 거기에 가이드를 맡은 조도현이라는 이름의 각성자까지. 혈마 추격조가 꾸려졌다.

조선족 지치국에서 단둥까지는 차로 3시간 남짓 거리에 불과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점심 먹자마자 출발한 추격조 일행은 저녁 시간이 되기도 전에 도착했다.

“암시장은 주로 북한과 접경 지역에 형성돼 있습니다. 특히 마약과 관련된 경우는요. 여차하면 압록강 건너 도망칠 수 있으니···.”

조도현은 제법 익숙한 듯 암시장에 관해 설명했다.

판매와 유통을 맡은 조직과도 접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어딘가로 연락하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는 놈들이 좀 있었는데, 싹 사라졌는데요. 알아보곤 있는데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의료 암시장이 마약만 취급하나?”

“그렇진 않습니다. 전문 의약품이나 의료 기기도 다룹니다. 장기를 밀매하기도 하고요. 심지어 직접 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여기 관련한 수술이 유명하죠.”

조도현이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성전환 수술을 의미하는 모습이었다.

“거기 할 정도면 여기도 못 하라는 법은 없겠네?”

유지훈이 머리를 가리켰다.

조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가 끄덕거렸다.

“들어본 적은 없지만,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네요. AS는 안 돼도 기술 자체는 최고라고들 했으니까요.”

“그쪽으로 알아봐. 수술 전문가들 쪽으로. 최근에 괴기한 늙은이가 다녀간 적 없는지도.”

“알겠습니다.”

조도현이 바쁘게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유지훈의 시선은 랴오위안허를 향했다. 사뭇 침울한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울상이야? 나라라도 잃은 사람처럼.”

“나라를 잃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잖소.”

랴오위안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가 감당하기 힘든 위기에 처했는데, 위정자들은 더 심한 위기 속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소.”

“프로젝트 재가동 말이야? 그쪽이 연구소장 빼돌려서 일단락된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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